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79
* * *
“티나…. 뭐라고 한 거야. 엘리제가 뭐…?”
나는 방금 들은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어 듣고도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엘리제는 지금 어디에 있냐는 말에 들은 대답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폐하께서 즉결 처형하셨어요. 마법 부서에서 조사를 했는데 에이솔의 추측으론 하급 마법사라 일반인은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마법을 사용했을 거래요.”
“티나, 에이솔을 불러와 줘. 궁금한 게 있으니까.”
티나를 통해 에이솔을 부르는 사이 나는 생각에 잠겼다. 카샤가 엘리제의 마법을 눈치채고 그녀를 즉결 처형했다는 부분에서 내가 이 몸속에 들어와 막연히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내가 알고 지내던 이, 엘리제가 비록 나쁜 마음을 먹고 나를 배신하긴 했지만 그래도 제국에 와서 꽤 오래 알고 지내던 이였다.
그런데 그녀가 죽었다고.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그게 현실감이 없어서 크게 와닿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웃으며 티타임에 나타날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 말로만 들어서 그런 걸까.
“티나! 라이는? 라이올라도 그 소식을 들었을 거 아니야.”
나보다 더 친했던 라이올라를 생각하자 가슴이 선득해졌다. 그것은 라이올라의 친구를 잃게 해서 느끼는 죄책감은 아니었다. 만약 나와 가장 친하다고 할 수 있는 티나가 그렇게 나를 두고 목숨을 잃는다면 느꼈을 상실감을 그녀 역시 겪고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생각만 해도 비통한 기분이 전신을 휩쓸었다. 라이올라가 그렇게 느낀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문제였다. 그녀가 안타깝기도 하고 이제 나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뒤를 이었다.
“라이올라 영애는 칩거에 들어갔어요. 친우의 죄가 크다고 자중한다면서요. 누구의 방문도 받지 않고 있다 했어요.”
나는 이마를 짚고 신음을 흘렸다. 엘리제 다음은 라이올라인가.
“귀족들이 하나같이 루스타인 백작가는 끝이 났대요. 멸문을 막으려면 동대륙의 왕국에 부마로 가야 하는데, 그나마도 공주님이 어떻게 하시느냐에 따라 멸문될 수도 있다고….”
내가 관여해서 루스타인가를 완전히 멸문시킬 수도 있다고 말하는 건가. 사실 엘리제가 살아있었다면 루스타인가는 더 이상 정치에 발도 못 붙이게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이제 루스타인가에는 남은 자녀들이 없었다. 장남은 부마로, 엘리제는…. 그렇게 되어서 대를 이를 사람이 없으니 아마 방계에서 데려와야 할 것이다.
“공주님, 부르셨어요. 이제 좀 괜찮으신가요?”
“에이솔, 갑자기 불렀는데도 와줘서 고마워요.”
“쓰러지셨을 때 도통 원인을 알 수가 없어서 걱정했답니다. 처음엔 충격을 받으셔서 그러시나 했는데 사흘이나 깨어나지 못하셔서 말이죠.”
에이솔이 달리아궁을 방문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안부를 물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에이솔. 이제 괜찮아요. 마법사가 궁의도 아닌데 어떻게 알겠어요. 그보다 엘리제에 대해 물을 게 있어서 불렀어요.”
“네, 말씀하세요. 그 악독한 이의 어떤 점을 알고 싶으신가요?”
“…아, 하급 마법은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들었는데 왜 그런가 해서요. 그렇다면 암술에 능하니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마나의 유동이 적어 아무래도 마법사가 아닌 일반인은 알아채지 못합니다만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살기를 느꼈다면 폐하께서 바로 알아차리셨겠지만 그런 것들이 아니니까요. 대부분이 잔재주로 그치는 경우라서.”
“하급 마법은 생명에 위협을 끼칠 정도는 아니라는 거군요. 엘리제처럼 환영 마법이나 소문을 부풀리는데 사용하는 것뿐인가요?”
“그동안 황궁에서 그녀가 벌여온 마법들을 우리가 추적했습니다만 하급 마법사치고 꽤 응용력도 좋고 사용하는 기술도 능수능란했습니다.
치졸하긴 하지만 적재적소에 사용했다고 볼 수가 있죠. 자질이 뛰어나다는 건데 하급마법사로 머물러 있는 걸 보니 마법을 깨우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아니면 속성으로 배워 하급마법사에 머무른 게 아닐까 합니다. 백작가에서는 마법 배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했으니까요.”
“그녀의 목적은 뭐였나요?”
“황비로 들어가기 위함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는 딱히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없고 그녀가 폐하께 언급하기도 한 부분이라서요.”
역시 황비가 목적이었나. 엘리제는 대체 무슨 마음으로 황비가 되자고 했을까. 나 같으면 그렇게 똑똑한 데다 마법까지 쓸 수 있으니 다른 이를 찾아 나섰을 거 같은데. 이제 산 사람이 아니라 하니 왜 그랬는지 물어볼 수도 없었다.
* * *
말로만 전해 들어 그런 건지 모르겠으나, 나는 엘리제의 죽음을 알게 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건만 꽤 잘 받아들이고 있었다. 처음에 들었을 때만 해도 굉장히 충격적이었는데…. 나는 빠른시간내에 안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충분히 가까이 알고 지낸 이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로에 조금 환멸이 느껴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음을 곧 알게 되었다.
첫날은 그럭저럭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 지 일주일 뒤부터 나는 밤마다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헉… 헉….
새벽에 잠에서 깨어 화들짝 놀라 몸을 반쯤 일으켰다. 숨을 할딱이며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을 막아보려고 한 손으로 꾹 눌렀다. 엘리제가 혼자만 지옥으로 갈 수 없다며 내 다리를 잡아끌고 지하의 무저갱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장면에서 잠이 깬다. 항상 같은 꿈을 꾸다 깨는데도 매번 놀란다. 오늘이 벌써 삼 일째였다.
그리고 그런 나 때문에 옆에 있던 카샤도 항상 같이 깨곤 했다. 그는 어느새 협탁에 놓아둔 포트에서 물을 따라 내게 건네었다.
“샬리, 괜찮나.”
물을 꿀꺽꿀꺽 받아마신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가 나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내가 그녀를 너무 쉽게 죽였지. 부관참시라도 할까?”
그가 서슴없이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 부관참시라니…. 그녀를 두 번 죽이는 꼴이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아마 악몽에서 더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를 바라보자 그의 서늘했던 표정이 점차 풀리고 있었다. 그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를 달래며 다시 침대에 눕혔다.
“엘리제의 원한 맺힌 망령이 붙은 건지도 모른다. 보니를 부르면 해결될 문제인데…. 죽어서까지 정말 지독한 여자로군.”
보니를 부르자는 소리는 어제도 했다. 하지만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망령을 쫓아내면서 동시에 내 안에 있는 샬리오니까지 성불시키자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조금만 더 있어 보구요.”
놀란 가슴이 진정되고 더 이상 숨도 할딱이지 않았다.
“벌써 안색이 안 좋아. 샬리, 이대로 또 쓰러지면….”
그의 표정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이제 그는 다른 일로 불안해했다. 내 몸속의 샬리오니를 경계하는 것이다. 카샤는 계속 보니를 불러 샬리오니를 성불시키고 망령도 쫓아내자고 했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내 방어기제는 왜 이럴 때 작동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원혼이니 망령이니 하는 것들을 잘 믿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나 싶었다. 정말 나한테 엘리제의 망령이 붙어버렸을까.
* * *
“공주님 이 정도면 될까요?”
티나가 내게 들고 온 짐을 보여주며 물었다. 저번에 오라버니 편으로 보냈던 보스웰리아가 어마마마의 관절염증에 좋았다고 해서 한 번 더 보낼 참이었다.
“응. 그 정도면 되었어. 주방에 가서 캐리의 레시피랑 편지도 받아와 줘.”
내가 종종 리노아 왕국에 편지를 부친다는 얘기를 듣고 난 후 파티시에 캐리가 리노아 왕국의 파티시에와 교류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들어주는 부탁이었다. 리노아 왕국의 파티시에와 장단이 잘 맞는지 매번 레시피와 의견을 교환하는 편지를 부탁하기에 같이 동봉하고는 했다.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다 보니 카샤에게도 편지를 써주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매일 보는 사이에 편지가 큰 감흥이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받으면 기분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 요즘 그는 나처럼 안색이 좋지 않았다.
나는 연이은 악몽 때문에 안색이 말이 아니었고, 그는 나로 인한 불안 증세로 같이 얼굴이 하루가 다르게 죽어가고 있었다. 티나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부부가 같이 안색이 안 좋아져서 어떻게 해요?”
아직 부부 아닌데. 아니, 사실상 부부나 다름없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만 있으면 괜찮을 거야. 처음 겪는 일이라서 그래.”
내 악몽을 두고 하는 소리였다. 벌써 일주일째 악몽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공주님, 보니도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아세요? 얘가 침울해하고 있어요. 이제 그만 악령을 물리쳐요. 네에?”
그 말에 크게 양심이 찔렸다. 내가 보니를 보고 싶지 않아서 안 보는 게 아니었다. 카샤가 샬리오니를 성불시키지 않을 거라면 보니를 볼 생각은 하지 말라며 우리 둘을 떼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반발했으나 그가 애걸복걸하며 다시 생각해보라고 처연한 얼굴을 하니 입이 딱 다물어지는 것이다.
분명 보니의 구속구를 풀면 뭔가 사달이 나도 날 것 같은데. 내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저 감만 믿고 버티고 있는 것이라 카샤에게 제대로 설득할 거리도 없었다. 티나도 이제 안다. 카샤가 티나에게 말하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에 보니가 성녀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내 안에 샬리오니가 있는 것은 나와 카샤, 보니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티나는 보니에게서 엘리제의 망령을 떼어내는 줄로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왜 이렇게 보니를 보지 않고 버티는지 몰라 답답해하고 있었다.
“구속구를 풀면 위험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
“공주님은 걱정이 너무 많아요. 보니는 착하잖아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물론 보니는 착하지만 크리하엘은 아니란 말이야. 나도 보니를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됐어.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은 폐하께 편지를 쓸 거니까.”
편지는 그의 기분이 풀어지라고 쓰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니에 대한 뇌물 격이기도 했다. 나는 한참 정성스럽게 편지를 쓰고 봉투에 편지를 동봉한 후 밀랍을 녹여 인장을 꾹 찍었다. 편지만 줄 것은 아니었다. 연습만 줄곧 하다가 처음으로 완성한 자수를 놓은 손수건까지 같이 선물할 참이었다. 나는 곱게 포장한 손수건과 편지를 티나에게 건네었다.
“폐하께서 굉장히 좋아하실 거예요. 이번에 놓은 자수를 보니까 공주님도 많이 느셨더라고요. 쿠키 모양이었죠? 섬세하게 쿠키가 부스러진 조각까지 수 놓으셔서 감탄했잖아요.”
나는 티나의 말에 멈칫했다. 그건 검과 방패였는데 쿠키라니? 거기에 쿠키 부스러기는 무슨 말일까.
“잠시만, 티나. 자수 손수건은 아무래도 빼는 게 좋겠어.”
나가려는 그녀를 서둘러 붙잡았다. 아무래도 또 나 자신의 자수 실력을 무시하고 난이도가 너무 높은 것을 골랐나 보다.
“어째서요? 쿠키 모양이 폐하가 사용하기엔 너무 귀여운가요? 걱정하지 마세요. 폐하는 공주님이 주시는 거라면 뭐든 잘 사용하실 거예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런데 쿠키는 아니란 말이야.
“아니야, 자수 잘하지 못한 것 같으니까….”
“제 말을 믿으시라니까요.”
티나가 웃음 지으며 손사래를 치더니 그대로 나가버렸다. 아, 망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