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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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가에 기대선 실루엣을 보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분명 환영 마법이었다고 들었는데 그를 보니 엘리제와 키스하는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속이 쓰라리기 시작했다. 너무 생생한 장면이었다. 엘리제의 마법 실력이 정말 뛰어난가 보다. 나는 그를 보기가 힘들어져 고개를 틀었다.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내게는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카샤가 오자 물러날 자세를 취하던 티나와 아레인이 다시 다가와 나를 살폈다.
“안색이 왜 이렇게 창백해졌어요? 공주님, 빨리 침대로. 거봐요. 누워있으셔야 한다니까.”
티나와 아레인이 나를 부축해 침대로 옮겼다. 차라리 잘되었다 싶어 나는 눈을 꼭 감아버렸다. 곧 그들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카샤도 나갔을까. 그런데 아까 그건 무슨 말이었지. 아레인을 보고 옛 연인이라고 하는 걸 보니 아직 우리 사이를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말투엔 날이 서 있었고 남을 대하듯 차가웠다. 억울했으니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하며 오해를 풀어야 하는데 아직 그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또 엘리제와 껴안고 키스하는 장면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자 식은땀이 나왔다. 이게 다 엘리제 때문이다. 카샤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너무 화가 났다. 몇 번을 때려줘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옷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그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그가 침대 근처에 놔둔 의자에 앉는 것이 느껴졌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도 눈을 감은 채로. 마주했던 마지막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는 나와 아레인을 오해한 채 나가버렸고 나는 그와 엘리제를 오해했다. 여전히 차가운 어투로 나를 대하는 그가 서러웠다. 왜 그러는지 알고는 있는데 섭섭해서 울컥했다. 그런 마음이면서도 나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오해만 풀면 되는데 아직 환영 마법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프면 곤란하다. 할 거면 제대로 해.”
그가 서늘하고 메마른 목소리로 나를 책망했다. 우리는 아직 약혼자니까 그 역할을 제대로 해란 말인가. 마치, 아무 감정 없는 정략 결혼한 상대에게 하는 말 같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언제까지 아레인을 끼고 있는걸 봐야 하지? 옛 연인 상봉은 그쯤 하면 되지 않았나. 내가 인내심이 없다는 걸 알아뒀으면 좋겠군.”
그는 날카로운 어투로 계속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나는 눈을 뜨고 누워있던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를 볼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픈 거면 궁의를 불러. 나한테 또박또박 말대답은 잘도 하더니 지금은 또 말이 없군.”
나와 하던 대화가 이제는 말대답으로 바뀐 건가? 그가 한숨을 내쉬더니 줄을 당겨 궁의를 부르려 했다.
“궁의를 부르지 마세요.”
지금은 몸이 아픈 게 아니었다. 그러자 그가 발끈 화를 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내가 분명 할 거면 제대로 하라고 했을 텐데. 내가 언제까지 참아줄 거라고 생각하나. 한시라도 빨리그 몸에서….”
나를 오해하고 쌀쌀맞게 대하는 그가 참으로 낯설었다. 그리고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오해를 풀어도 그가 다시 예전처럼 다정할까. 온 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아프지 않아요. 당신이 엘리제와 키스하는 환영 마법을 봤어요. 아직 얼굴 보기가 힘들어서 그러니 잠시만 혼자 있게 해주세요.”
“…….”
그가 말이 없어 다시 부탁하는 어조로 말했다.
“제발요. 카샤. 나중에 얘기해요. 우리.”
이마를 짚었던 손을 내리고 무릎을 세워 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카샤의 매몰찬 어투에 마음이 상해서 그의 오해를 풀어줄 기분이 나지 않았다. 부스럭대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안도하는 동시에 실망하는 내가 있었다. 나도 내가 어찌하고 싶은 것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냥 이 상황 전부가 마음을 탁하고 무겁게 만들었다. 그가 엘리제와 키스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모든 것들이 허탈했다. 환영 마법이었다고 해도 그때 느꼈던 그 공허한 마음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것은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라 여겼던 믿음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는 엘리제와 키스하지 않았다. 거짓을 보여준 거라 되뇌며, 속으로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 그래야 한시라도 빨리 그의 오해를 풀어줄 게 아닌가. 머릿속으로 억지로 주입하고 있는데, 나갈 줄 알았던 그가 침대에 잔뜩 웅크려 있는 나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카샤…?”
“샬리,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그가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로 말하며 다시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아까와 판이해진 그의 행동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얼굴…. 안 보여줄 건가.”
웅크린 자세 그대로를 감싸 안은 상태라 그 안으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째서, 아까는 그렇게 차갑게 대하더니…. 갑자기 혼자서 오해가 풀릴 리도 없고 너무 이상했다. 하지만 이상한 것과 별개로 서러웠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르르 풀리기 시작했다.
차갑게 식은 몸과 마음이 그의 체온 아래에 따뜻해지고 있었다. 나는 웅크린 팔을 풀고 그를 마주 안았다. 내가 알던 카샤로 돌아와서 안도의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볼을 타고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으나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조금 전에 너무 무서웠어요. 당신 말이….”
“미안해. 많이 놀랐나? 아직 당신이 안 돌아온 줄로만 알았어. 계속 그 여자인 줄 알아서….”
그가 내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 여자요?”
“당신 몸속에 있던 여자 말이야. 원래 자신의 몸이라고 주장하는.”
나는 화들짝 놀라 그와 붙어있던 몸을 떼었다.
“샬리오니를 만났어요?”
샬리오니가 나한테 카샤와 만났다는 말은 없었는데!? 아, 티나와 아레인과도 만났으니 카샤와도…. 그럼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그가 나를 그리운 눈으로 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 눈 주위가 이미 눈물범벅인 걸 깨닫고 아차 싶었다. 이런 모습은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려 하자 그가 커다란 손으로 내 턱을 잡고 엄지로 눈 주위를 쓸었다.
“미안하다. 내가 다 잘못했어.”
그가 내 눈 위로 키스하며 그렇게 말했다.
“카샤, 아레인은….”
“알아, 그대와 관련 없다는 거. 아레인은 그 여자와 만난거지, 그대가 아니라.”
그가 나를 눕히고 그 옆에 누워 나를 응시하며 뺨을 쓸었다.
“샬리오니한테 다 들었어요? 내가 누군지?”
“대충. 자세히는 모른다. 그대한테서 듣고 싶어.”
나와 샬리오니가 나누었던 대화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아직 나도 머릿속으로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서 횡설수설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는 대화를 듣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내 얼굴에 자잘한 키스를 남겼고, 뺨을 쓸었다 눈꺼풀을 쓸었다 하며 한시도 손을 가만있지 못했다. 중간중간 말이 막혀 횡설수설하는 데에는 분명 그의 책임도 있었다.
“그 여자가 잘한 게 하나 있긴 하군.”
“뭔데요?”
우리 오해를 풀어준 거 말하는 건가? 그건 참 고마운 일이었다.
“샬리, 그대를 여기로 데려왔잖아.”
다른 곳에서 왔다고 해도 그는 꿋꿋이 나를 샬리 라고 불렀다.
“전 샬리가 아니라니까요….”
“어차피 그 여자 때문에 기억도 나질 않는다며. 나한테는 그 여자가 가짜야. 진짜 샬리는 여기 있지.”
몸속의 샬리오니가 들으면 발끈할 말을 하며 그가 나를 끌어안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해를 어떻게 푸나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지금 우리가 도란도란 나누는 얘기가 꿈만 같았다. 물론 그 내용은 심각하기 짝이 없었지만.
“보니가 그 여자를 성불시킬 수 있단 말이지.”
“아, 그러려면 보니의 구속구를 풀어야 해요. 저는 그냥 이대로….”
“절대 안 돼.”
“위험해요. 샬리오니 말로는 보니의 신력이 어마어마할 거라는데….”
“내려온 신탁으로도 역대 가장 뛰어난 성녀라고 하긴 했다더군.”
“신전에서 보니가요?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대단한 성녀면 신전에서는 어째서 보니를 성녀로 데려가지 못한 거지? 투알린에 잡혀있던 보니가 이해되지 않았다.
“신성제국이 무능력해서 그런 거 아니겠나. 신탁 내린 성녀 하나 제대로 데려가지 못했으니.”
“대신관이 보니를 데려가려고 했었잖아요. 어떻게 되었어요?”
“다른 거로 무마하긴 했는데, 조만간 다시 얘기하러 올 것 같긴 해. 그 전에 그 여자 성불부터 시켜야겠는데.”
그는 여전히 보니에게 관심 하나 없는 모양이었다.
“구속구 풀었다가 잘못되면 어떻게 해요?”
보니도 그렇고 잘못되면 그 주변 사람들 모두가 피해를 보게 된다.
“대비해야지. 그대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몸속의 샬리오니가 괘씸해서 성불시켜주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혹여나 보니의 몸을 빌려 또다시 나타날 크리하엘이 무서운 것이었다. 나는 그 신에게 사사건건 걸림돌이었으니 말이다.
“크리하엘이 나타날 수도 있잖아요. 동대륙의 영웅처럼 저를 죽이려 하면 어떻게 해요.”
“그건 신빙성이 없어. 오래된 이야기고 구전이라서 믿을만한 이야기가 못 돼. 동대륙에서 흘러나온 말이니 더더욱 그렇고.”
확실히 동대륙에서 나온 역사책과 서대륙의 역사책의 내용이 다르긴 했다. 그 뒤로 내가 동대륙의 영웅에 대해 계속 캐묻자 지식의 편중은 잘못된 거라며 도서관 사서가 서대륙 역사책도 읽어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서대륙에서는 동대륙이 그들을 영웅을 숭상하려는데 신이 걸림돌이 되어 역사를 왜곡했다고 나와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크리하엘을 본 나로서는 동대륙의 역사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카샤도 신탁을 받았다고 했으니 크리하엘을 봤을 텐데.
“카샤도 신탁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어요? 크리하엘을 만났잖아요,”
“그건…. 만났다고는 할 수 없지. 성녀가 신탁을 받으면 대신관이 말을 전해준 것에 불과하니까.”
내가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데? 나는 크리하엘을 눈앞에서 직접 대면한 기분이었다.
“성녀가 신탁을 받는 모습이 어땠는데요?”
“성녀의 눈동자가 희게 변하더군.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대신관에게 전했지. 대신관은 내게 그걸 풀어서 전해주고.”
눈동자가 희게 변하는 부분은 같은데, 수수께끼 같은 말이라고 하니 영 와닿지 않았다.
“그래도 크리하엘이 당신을 자신의 장기 말로 쓰려 하는 거 알았잖아요.”
“그 대신 나도 받는 대가가 있었지.”
“어쨌든 전 그대로 놔두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안에서 잠들어 있기만 하니 아무 문제 없잖아요.”
샬리오니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녀는 내게 빚이 있으니 성불은 한참 뒤에 해도 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같이 성불하든지, 뭐. 내 안위가 먼저지, 그녀의 사정까지 봐줄 생각은 없었다.
“싫다. 그 여자가 네 몸을 차지하고 있는 꼴은 다시 보고 싶지 않아.”
그러나 카샤가 문제였다. 그는 극구 반대하며 당장 성불시켜야 한다 난리였다.
“이제 그럴 일은 아마 없을 거예요.”
“갑자기 그 여자가 생각이 바뀌었다고 네 몸을 차지하면 어쩌냔 말이다.”
“그녀는 끔찍한 꿈을 꿔요. 다시 몸을 찾는다는 소리는 안 할 거예요.”
“사람이 얼마나 욕심이 많은 줄 아나. 나만 해도…. 아무튼 안 돼. 이건 내 말을 들어. 샬리, 그 여자는 성불시켜야 해.”
샬리오니가 한 말이 이거였나. 내가 원하지 않아도 하게 될 거라는 게 카샤를 두고 한 말이었나 보다.
“내가 의식을 차지하고 있으니 괜찮아요. 카샤.”
그가 잠시 입을 달싹이는가 싶더니 꾹 다물었다. 그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고민에 빠질 때였다. 카샤가 숨도 못 쉴 정도로 한순간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지난 사흘 동안 그대를 잃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샬리 네가 아니라 그 여자가 깨어났어. 그렇게 끔찍한 기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아.”
그에게서 억눌려있던 절절한 감정이 짙게 묻어나왔다. 그 모습에 차마 성불 못시킨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크리하엘의 위험을 감수하자니 막막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둘에게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