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77
누가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봐.
‘나는 꼭두각시처럼 예정된 채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어. 내가 다른 걸 시도하려고 할 때마다 몸이 거부했으니까, 나는 쳇바퀴 속에 갇힌 거 같았어.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겠니? 이것 또한 내 영혼이 고장 나서 그런 거였어. 치가 떨리지.’
-그럼 왜 아직도 성불하지 못한 거예요? 크리하엘을 믿나요?
‘성불은 네가 들어오고 나서 내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이 조건이었으니까. 성불은 그 뒤였지. 나 또한 크리하엘을 믿지 못해. 그래서 조건을 내걸었어.’
-무슨 조건이요?
‘크리하엘이 내가 본 미래를 알고 싶어 해. 그런데 내가 본 신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나를 이 지옥에서 꺼내주면 알려주기로 했지. 그는 내가 꽤 많은 미래까지 보았다고 믿고 있거든.’
-내가 신전과 접촉하지 않아서 지금까지 성불하지 못한 거예요?
‘그래. 대신관 정도면 나를 성불시킬 수 있어. 하지만 그들에게 이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하겠지. 그리고, 혹여나 잘못해서 내가 아니라 네가 성불하게 되면 말짱 헛일이야. 나는 크리하엘 말고는 믿을 수가 없어.’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이제 미래가 바뀌었는데 지금 삶에 대해서 미련이 없어요?
그 말에 샬리오니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지금 바라는 게 뭔지 아니? 밤이 오기 전에 네가 빨리 이 몸을 차지하는 거야. 말했잖아. 나는 고장 났어. 분명 그 끔찍한 꿈을 또 꾸게 되겠지. 미래가 바뀌어봤자 황제, 그 잔인하고 악마 같은 인간이 다시 칼을 휘두를 거라고.’
-카샤는 잔인하지 않아요. 그리고 책 속에서도, 당신한테 첫눈에 반했고 잃은 후로는 독수공방했다고 나와 있었는데….
샬리오니는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무슨 소리야, 날 발견해서 기쁜 것 같긴 하더라. 그런데 그게 끝이었어. 날 데려간 건 무언가, 이유가 있는 듯했어.
그리고 결혼식 날 후사를 잇기 위해 나를 한번 안았을 뿐이지. 그 뒤로 단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았어. 하필이면 아이도 생겨버렸지.
그런데 그가 그 아이를 신경 쓴 줄 알아? 남의 자식 보듯 했단 말이야. 공적인 일이 아니면 우리 모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대전에는 귀족들의 피가 마르지 않을 정도로 잔인한 사람이었고.’
-물론 책에서는 그렇게 나와 있긴 했지만 실제로 그는….
‘물론 너는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으니 생소하겠지만 내가 본 수십 번의 미래에선 그랬었거든. 나도 저 냉혈한이 너한테 하는 걸 보면 안 믿겨. 다른 사람 같다니까. 이중인격일지도 모르니까 너 조심해.’
-…….
‘이제 궁금한 건 다 풀렸지? 내 자리에서 그만 나와 줄래? 조만간 크리하엘을 만나는 것도 잊지 말고. 아 참, 보니 말인데. 그 아이가 어쩌면 나를 성불시켜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보니 가요? 어떻게요?
-그 아이가 너를 깨운 거야. 구속구를 차고 있는데도 신력이 얼마나 강한지 그걸 뚫었어. 물론 아주 찔끔 이긴 하지만 그걸로 너를 깨웠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 구속구를 풀면 얼마나 대단할지 상상이 안 가네.
-구속구를 뚫고 신력을 사용했다구요? 나한텐 그런 말 없었는데….
‘난 모르지, 어쨌든 크리하엘을 보기 싫으면 보니를 통해서 날 성불시켜줘. 보니라면 믿음이 가거든. 아까도 그 소량의 신력으로 정확히 네가 있는 곳만 두드렸으니까 신력을 아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것 같더라.’
-보니의 구속구를 풀면 크리하엘이 올지도 몰라요.
‘뭐가 되었던 날 성불시켜줘야 해.’
-알겠어요.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까 내 예전 기억부터 돌려줘요.
‘음, 그건 안 되겠는데…. 미안.’
-어째서요?
‘네가 자꾸 회상하려고 해서 내가 그냥 아예 지워버렸어.’
-…미쳤어요? 남의 기억을 그렇게 함부로!
‘하지만 내가 단언하는데 정말 없는 게 나을 정도야. 우리가 영혼의 뿌리가 같아서 그런지 몰라도 네 인생도 불행했어. 나만큼이나.’
-그건 내가 판단하는 거예요. 당신이 아니라!
그녀가 화를 내는 이유를 알았지만 샬리오니가 생각하기에 그 기억은 정말로 없어도 될 정도였다. 물론 기억이 나면 돌아가고 싶어 할 것이나 그것이 그녀의 행복 때문만은 아니었다.
‘너 여기서 살아가기로 했잖아. 그런데 그 기억이 나서 무슨 소용이 있어? 살던 곳의 지식은 남겨두었으니 되었지 않니?’
-너무 이기적이잖아요. 나를 여기서 살아가게 하려는 당신의 수작으로밖에 안 보여요.
‘그 말이 맞아. 하지만 생각해 봐. 황제를 놔두고 그냥 돌아갈 거야?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황제는 다시 전쟁을 반복하겠지. 장담하는데 아마 내가 본 미래보다 더 제정신이 아닐걸?’
또 다른 샬리는 말이 없었다. 샬리오니는 답답했지만, 그녀를 기다렸다.
-당신을 성불시켜줄 수 없겠어요.
‘뭐? 어째서?’
-나는 크리하엘을 믿을 수 없어요. 보니 몸속에 그가 들어오는 것도 싫고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아요. 카샤를 자신의 유희를 위해 이용하는 악랄한 신이에요.
‘그 말에 동감하긴 하지만, 성불하는 동안 보니 몸에 안 들어올 수도 있지 않을까?’
-구속구를 차고 있는 보니 몸에 꾸역꾸역 들어왔었는데 풀면 어떻게 되겠어요? 분명 옳다구나 하고 들어올 거예요.
‘뭐, 네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나는 곧 성불할 것 같으니 별로 걱정은 안 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두고 보면 알겠지. 이제 나와 봐. 오랜만에 몸을 움직였더니 얼마나 피곤한지 아니?’
그녀가 말이 없자 샬리오니는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채근했다.
‘안 나와?’
그녀가 나가고 싶지 않아서 안 나가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나가요?
‘참, 들어갈 땐 잘도 들어가더니. 의식을 온몸 구석구석으로 풀어. 네 몸을 다시 쓴다고 생각해. 팔을 들고 고개를 돌리고 손가락을 움직인다고 생각해 봐.’
샬리오니의 말대로 그녀는 다시 몸을 움직인다 생각하려 애를 썼다. 손가락과 발가락을 움직이고 숨을 내쉬고, 그리고 눈을 떴다.
“정말 되네.”
눈을 깜박거리며 시험 삼아 내뱉은 말이었다.
“들어갔어요?”
본인 대신 들어갔는지 물어보았지만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 * *
나는 침대에 자연스럽게 누워있었다. 바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진짜 샬리오니와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하엘이 무언가를 건드렸는데 그게 잘못되어서 샬리오니의 영혼이 고장이 나버렸고 그녀는 끔찍한 미래를 꿈으로 생생하게 수십 번씩 반복하고 있었다.
미래를 바꾸려고 하면 몸이 거부했다. 그래서 찾아간 크리하엘에게 도움을 받아 나를 데려왔다. 그리고 이제 보니를 통해서 성불시켜달라고? 그녀의 안타까운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여러 사람에게 엄청난 민폐를 끼치고 있었다. 나는 납치당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도 차원을 넘나드는 납치.
“당신 범죄예요. 이거, 알아요?”
그녀는 다시 들어갔는지 어쨌는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약혼식 때는 목소리를 흘려서 잘만 놀라게 하더니 순전히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미래를 바꾸지 않았다면 카샤는 지금쯤 여러 사람의 피를 흩뿌리며 전쟁을 반복하고 있을 것이다.
책에서 짤막하게 본 그는 매우 삭막하게 느껴졌다. 행복해 보이지도 않았고. 샬리오니의 말을 들어보아도 그렇다. 그는 냉혈한에다 폭군이었다고 했다. 분명히 크리하엘의 말대로 전쟁을 했을 텐데, 그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던 것일까. 지금의 그와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물론 아이비 때를 생각하면 가끔 과한 형벌을 내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죽이지는 않았는데. 카샤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우리 사이에 쌓인 오해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는 나와 아레인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고, 나는 그와 엘리제의 환영 마법을 보고 오해했다.
아레인과의 오해만 풀면 될까. 그러고 보니 내가 쓰러지고 티나가 크게 놀란 것 같았는데.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침실의 줄을 당겼다. 곧 방문이 열리고 티나가 들어왔다.
“공주님, 이제 들어가도 괜찮아요? 아레인 경도 잠시 들어가도 되는지 물어보는데요.”
둘 다 많이 걱정했을 테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티나를 따라서 시녀들과 아레인 경이 들어왔다.
“보니는 괜찮아졌어요. 기력이 소진되어 그렇대요. 공주님은 괜찮으신 거죠?”
“보니가? 왜?”
나는 깜짝 놀라 티나에게 되물었다. 보니한테 무슨 일이 있었나. 아프기라도 한 것처럼 들리는데…. 티나가 묘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주님과 같이 있었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아, 샬리오니가 몸을 차지하고 있을 때 말이구나. 그러고 보니 보니가 신력을 이용해서 나를 깨웠다고 들었다. 기력이 소진되었다고 하는 걸 보니 주변에 티나가 없었나 보네.
“어렴풋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좀 전의 일이었는데요? 큰일이네요. 궁의를 다시 불러야겠어요. 모처럼 기억이 돌아오셨는데. 쓰러질 때 분명 아레인 경이 받쳐 들어서 머리는 다치지 않았는데 말이죠.”
티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내 기억이 돌아와?”
“샬리, 나한테 했던 말 기억합니까?”
티나에게 물었는데 아레인이 대뜸 내게 질문을 했다.
“아레인한테요? 내가 무슨 말을 했나요?”
그의 표정이 이상했다. 울 것 같기도 하고 웃을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을 다시 잃으신 것처럼 보이는군요.”
“어머! 공주님. 설마 다시 기억을 잃으셨어요?”
티나가 갑자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샬리오니가 잠시간 몸을 차지해서 기억이 돌아왔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다시 내가 몸을 차지했으니, 기억이 안 나는 게 맞는 거긴 한데. 기억을 찾았다가 잃었다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응, 기억 안 나. 내가 잠시 기억을 찾았었나 보네.”
나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네, 공주님, 기억을 되찾았다가 다시 잃으셨는데 괜찮으신 거예요?”
“응. 난 이게 편해. 기억을 되찾지 않아도 생활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잖아.”
나는 파드득 놀라는 티나를 잡아 앉히고 다독였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티나.”
“저뿐만 아니라 모두 걱정했다구요. 보니도, 아레인 경도. 음…. 그리고 당연하지만 폐하께서도요. 공주님이 왜 쓰러지셨는지는 모두 뒤늦게 알았어요…. 그게….”
확실히 옆에 있던 티나가 몰랐던 걸 보니 내가 본 것이 환영 마법이 맞긴 한가 보다.
“보니가 아프다고 하니 걱정이네. 내가 가봐야겠어.”
“보니요? 금방 기운 차릴 거예요. 아마 눈뜨면 바로 공주님부터 찾을걸요?”
“샬리도 만일을 대비해 좀 더 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레인이 일어나려는 나를 만류했다. 아무래도 내가 쓰러진 이유를 모르니 원인불명이라 생각하고 걱정할 법했다.
“이제 돌아다녀도 될 것 같은데…. 나 멀쩡해요. 정말로.”
내가 아레인을 설득하려고 하자 티나가 옆에서 고개를 저었다. 그때 문 근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나간 지가 언젠데 아직 아레인을 붙잡고 있나. 아직도 옛 연인과의 상봉이 끝나지 않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