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76
샬리오니의 입가가 실룩였다. 다른 이들이 말을 꺼내기 전, 그녀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나 보니랑 할 얘기가 있으니까 다들 자리를 비켜주겠어?”
“알겠습니다.”
티나와 아레인은 방금 보니가 한 말이 신경 쓰였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군말 없이 자리를 비웠다. 샬리오니는 보니가 성녀인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전에 저 아이의 몸으로 크리하엘이 강림한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다른 세계의 그녀는 신탁이라 생각했겠지만, 엄연히 달랐다. 구속구에 신력이 묶인 보니에게 신탁을 내릴 수 없으니 크리하엘이 그 몸을 빌려 직접 강림한 것이었다.
그때 이 몸의 의식을 차지하고 크리하엘에게 성불을 부탁할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크리하엘의 심술 맞은 분위기로 보아 나설 분위기가 아니었다. 리노아왕국이 제국과의 전쟁에 얽히지 않는 것은 몸의 주인인 샬리오니도 바라던 바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크리하엘이 성불시켜줄 것이었으면 먼저 말을 꺼냈을 텐데, 그러지 않았으니 잠자코 있었다.
“흠, 그래 내가 뭐라구?”
“샬리 언니 몸속에 들어있던 신력이잖아요.”
보니가 한걸음 물러서며 그녀를 경계했다.
“그건 어떻게 알았니?”
그녀가 안심하라는 듯 보니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샬리 언니 몸에는 항상 신력이 뭉쳐있었어요. 제 안에 있는 신력이랑 달라요. 꼭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어떻게 보자마자 내가 그 신력이라는 걸 알았지?”
“응축되어 있던 신력이 지금 샬리 언니 몸 전체로 골고루 퍼져있는데요.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거예요.”
“글쎄, 아마 그건 너만 알지 싶구나. 다른 사람들은 신력을 볼 수 없으니까. 대신관도 그 사람과 접촉하지 않는 한 알 수 없어.”
구속구를 차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알아차리다니 몸속에 신력이 얼마나 강한 거지? 샬리오니는 보니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지금 아예 신력을 쓸 수 없니? 구속구 때문에 못해?”
샬리오니의 말에 보니가 깜짝 놀라 파드득 떨더니 눈을 내리뜨고 중얼거렸다.
“못… 해요.”
그 모습을 의심스럽게 보던 샬리오니가 혼잣말하듯 말을 꺼냈다.
“그렇구나, 그럼 네가 알고 있는 샬리는 영영 돌아올 수 없겠는걸?”
“네? 어째서요?”
아이의 눈망울에 금세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째서긴, 지금 이 안에 꽁꽁 틀어박혀 있단 말이야. 신력이 없으면 깨우질 못하는데 황제가 신전에 못 가게 하니 틀렸지 뭐. 너도 신력을 쓸 수 없다고 하고….”
“쓸 수 있어요! 저도 할 수 있어요!”
아이가 성급하게 말을 뱉더니 스스로 놀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눈이 동그래져서는 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를 보았다.
“신기하네, 너 구속구가 있는데 신력을 쓸 수 있어?”
샬리오니는 짐짓 모른 채 아이의 속을 캐물었으나 잔뜩 놀라고 주눅이 든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말 안 해줄 거니? 내가 이대로 이 몸에 눌러앉아도 괜찮은 거야?”
다시 울먹울먹하는 아이를 보며 샬리오니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힘을 짜내면, 아주 조금 쓸 수 있어요.”
안간힘을 쓰면 조금은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샬리오니가 미스릴로 만든 구속구 발찌를 선물로 주었던 거로 알고 있는데, 미스릴이 못한 것인지 아니면 저 아이가 대단한 건지.
“그럼 좋아. 너는 그 힘을 짜내서 내 안에 있는 샬리를 자극해 봐. 지금 안에서 웅크린 채 내 말도 못 듣고 있으니까 신력으로 자극해서 깨울 수밖에.”
“정말…그러면 샬리 언니가 되돌아와요?”
“그럼, 깨어나면 괜히 저 구석으로 들어갔다고 후회할걸?”
아이를 살살 구슬린 샬리오니가 손을 내밀었다.
“거짓말이면 어떻게 해요? 샬리 언니가 잘못되면요.”
아이가 쉽사리 경계를 풀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계속 내가 이 몸을 차지하고 있을까? 나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야.”
“정말이죠? 샬리 언니 없애려고 하는 거 아니죠?”
“내가 불러왔는데 없앨 리가 있겠니? 나는 성불하는 게 목적인걸.”
아이가 머뭇거리더니 슬며시 다가왔다.
“너라면 샬리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알겠지? 조금밖에 못쓴다고 했으니까 신중해야 해.”
양손으로 샬리오니의 손을 움켜쥔 보니가 눈을 감고 몸속에 있는 샬리 언니를 찾기 시작했다. 보니가 알고 있는 샬리 언니의 기운이 저 안쪽에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가 사용할 수 있는 신력은 구속구의 힘을 밀어내고 온 힘을 다해도 겨우 한 줌만 했다. 샬리 언니를 깨우기 위해 보니는 아주 신중하게 신력을 끌어올렸다.
구속구에 막혀 손끝으로 신력이 빠져나가지 못해 아이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힘을 짜낸다더니, 샬리오니가 보기에 아이는 정말 힘들어 보였다. 손을 맞잡고 있는 작은 아이의 손바닥에도 땀이 나와 축축했다. 쓸 수 있다기에 어느 정도는 가능한가 했더니 정말 말 그대로 ‘조금’인 모양이었다.
입술을 꼭 깨물고 바들바들 떠는 것이 영 안쓰러워 그만두라고 할 찰나에 실처럼 얇은 신력이 샬리오니의 손을 타고 넘어오기 시작했다.
신력은 곧바로 또 다른 샬리가 있는 곳으로 직진했다. 그런데 저렇게 신력이 있는 듯 마는 듯해서 깨울 수 있을까 싶었던 샬리오니는 몸속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보니의 신력이 또 다른 샬리를 콕콕 두드렸다. 소심하기 그지없었다. 아이의 집중력을 깨고 싶지는 않았지만 저래서야 깨우기가 요원해 보였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두드리면 안 깨어날 거 같은데? 신력도 모자라니 단번에 세게 두드리는 게 낫겠구나.”
아이는 결심한 듯 흡, 소리를 내며 손을 꽉 쥐더니 신력을 한꺼번에 쭉 밀어 넣었다.
그래 봤자 얇은 실이 좀 더 두꺼워진 것뿐이었지만 어쨌든 살살 두드리다가 단번에 쿵 치자 몸속의 또 다른 샬리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응축된 신력 덩어리가 미약하게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잘했구나, 몇 번만 더하면….”
안간힘을 쓰던 아이가 기진맥진하는가 싶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안색이 하얘져서 손을 부들부들 떠는 걸 보니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래, 고생했다. 나머지는 내가 어떻게 해볼 테니 너는 그만 가서 쉬는 게 좋겠구나. 그리고 이건 우리 둘만 아는 비밀이다.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하면 안 돼. 알겠지?”
하긴, 구속구가 있는 상태로 이 정도로 신력을 쓴다는 게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샬리오니는 티나를 불러 보니를 부축하게 했다.
“어머, 보니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어요. 공주님?”
방 안에서 달리기해도 저렇게 땀을 흘리며 늘어질 일은 없을 테니 지금 아이의 상태가 참 의아하긴 할 것이다. 샬리오니는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글쎄, 감기라도 걸렸나.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지던데 궁의한테 한번 보이는 게 좋겠어.”
티나는 궁금한 게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으나 일단 아파 보이는 보니를 끌어안고 서둘러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또 다른 샬리를 깨우려면 자극이 가해진 지금이 기회였다. 그녀는 시녀를 불러 자신이 부르기 전까지는 아무도 방에 들이지 말라고 명했다. 침대에 똑바로 누워 몸 안의 다른 샬리를 찾았다. 여전히 웅크리고 있었으나 방금의 자극으로 일부 의식이 깨어 어느 정도 소통이 가능한 상태였다.
‘어서 일어나, 잘하고 있다가 그렇게 내팽개치고 숨어 들어가면 어쩌니?’
-…….
아직 의식이 다 깨어나지 못했나? 신력이 더 필요한가 싶던 차에 신력이 잘게 떠는 것이 느껴졌다.
‘내 말 듣고 있는 거 다 알고 있어.’
-…당신은 누구?
‘누구긴, 샬리오니지. 너도 짐작하고 있었잖아.’
-그랬군요. 본인이 돌아왔으니 저는 더 이상 필요가 없겠네요. 저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또 다른 샬리가 건네는 말에는 전혀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무게가 없고 무감정했다.
‘네가 왜 그러는 줄 알아. 하지만 그 이전에 네가 누구였는지는 기억나니?’
-당연히…. 아, 내가….
‘기억이 나지 않겠지. 네가 회상하려고 할 때마다 내가 계속 막았으니까.’
-왜 그랬어요? 도대체 왜 나를 여기로 데려온 거예요?
그녀가 울분을 삼킨 채 샬리오니에게 쏘아붙였다.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너도 이제 만족하고 있지 않니? 그를 좋아하고 있잖아. 그래서 이렇게 충격받고 숨어버린 거 아니니?’
-…….
그녀가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아차 싶었던 샬리오니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물론 그건 네 오해였어. 그 여자가 걸었던 환영 마법 때문이었으니까. 실제로 그는 그 여자와 키스하지 않았으니까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돼.’
-환영 마법…? 엘리제가 마법사라구요?
‘나도 자세한 건 몰라. 황제한테 물어보든지 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당신 말이 맞아요. 지금 엘리제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죠. 내 기억을 봉쇄해놓고 만족하고 있으니 되지 않았느냐니 그게 무슨 헛소리예요?
그녀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엔 넌 돌아가지 않는 게 나을 거 같아.’
-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에요. 내 기억을 돌려줘요. 대체 잘살고 있던 나를 왜 데려온 거예요?
‘우리는 영혼의 뿌리가 같으니까 내 안에 들어오려면 너밖에 없었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영혼이 오래 윤회를 거듭하면 다른 영혼들과 달리 비대해져. 그럼 영혼을 분리해 버리거든. 그게 우리야. 뭐 영혼의 조상이 같다고나 할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 네가 겪고 있는 건 말이 되고?’
-그래서… 내가 책 속으로 들어온 게 아니란 말이에요?
‘다른 차원이라고 말해주고 싶구나. 그 책은 너를 데려오기 위한 매개체일 뿐이야. 너만 그 책을 봤으니까.’
-책도 아니라면 왜 이렇게 된 건지, 날 데려온 이유를 제대로 알려줘요.
샬리오니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이야기의 처음부터 말을 시작했다. 그녀는 충분히 알 권리가 있었으므로.
‘크리하엘이 무얼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의 뭔가를 건드렸어. 그런데 하필 내가 그사이에 끼어버린 거지. 내 영혼은 뭐랄까, 고장이 나버렸어. 나는 끔찍한 미래를 꿈으로 계속해서 매일 반복했어. 너무 생생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지. 처음 며칠은 엄청난 악몽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본 책 내용을 꿈으로 반복해서 꿨단 말이에요?
‘내 아들이 행복하게 잘 사는 건, 그 책에서만큼은 그랬으면 하는 내 바람일 뿐이야. 내 이야기가 짧은 건, 떠올리기 싫은 걸 책에서까지 자세히 쓸 필요는 없잖니. 꿈은 언제나 내가 죽으면서 끝나. 그 생생한 꿈을 반복하다 보면 사람이 미칠 수밖에 없어. 가족이 몇십 번이나 죽고 내 왕국이 사라져. 그리고 원치 않는 사람의 아이도 낳지. 그 아픔도 고통도 꿈을 꾸는 동안은 모두 사실처럼 느껴져.’
-…그럼 크리하엘이 원인이잖아요. 신이 고쳐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미안하지만 그래서 데려온 게 너야. 내 영혼이 어딘가 고장 나 버려서 성불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잖니. 그렇다고 아무나 데려올 수 있는 게 아니었어. 나와 연결된 뿌리가 다르다면 데려올 수 없었으니까. 크리하엘도 널 못 데려와. 그저 데려올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준 것뿐이지.’
샬리오니의 말을 잠자코 듣던 그녀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말이 없었다. 몸속의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길 기다렸다.
-미래라고 생각한다면 바꿀 생각은 못 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