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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75화 (75/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75

* * *

“리노아에서 아레인이 내 애인이었어요. 그녀가 내 몸에 들어오고 나서 흐지부지되었지만, 지금은 또 아니잖아요? 나도 이제 즐거운 대화를 하고 싶으니 그를 불러주세요. 아, 티나도요.”

이참에 아레인도 보고 티나도 봐야겠다 싶었던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리노아에서 애인이었다고. 그럼 샬리가 기억이 없다고 하는 게….”

“물론 나 대신 그녀가 들어왔을 때 그녀는 기억을 잃은 거로 되어있어요. 기억을 전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 말이 정말이었나…. 하아, 어쩌지. 미치겠군.”

그가 매끈하게 잘 넘긴 포마드 스타일의 머리 모양을 손으로 흐트러뜨렸다.

“당신이 오해한 부분을 말하는 거라면 그녀는 그것에 크게 개의치 않아요. 오해만 풀면 해결되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중요한 건 당신이 그 여자랑 키스한 장면이지. 격렬하게.”

그가 그녀를 강하게 노려보다가, 샬리의 얼굴에 움찔 놀라 눈에 힘을 풀었다.

“얼른 나가. 너 때문에 샬리가 깨어나질 못하고 있지 않나.”

그는 차라리 그녀를 보지 않는 게 좋겠다 여기며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그녀가 일어나면 어련히 알아서 들어가지 않겠어요? 그녀가 일어날 생각이 없으니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나온 거라고 하잖아요. 정말 말이 통해야 말이지. 아레인이나 불러줘요. 나도 더 이상 당신이랑 말 한마디 더 섞고 싶지 않으니까.”

“…려고.”

그가 낮은 톤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라구요? 잘 안 들리거든요?”

“아레인을 만나서 뭐 하려고 그러지.”

“사람이랑 대화할 땐 얼굴을 마주 보면서 하는 거예요. 뭐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예의라는 게 있잖아요.”

여전히 땅만 보며 말을 잇는 그를 비난한 그녀가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웃었다.

“뭐하긴요. 오랜만에 만났으니 회포도 풀고 해야죠.”

그가 아무 말이 없자 그녀가 짓궂은 표정으로 한마디를 더했다.

“뭐 분위기 타면 더한 것도 할 수도 있겠고.”

그 말에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감히 샬리의 몸으로, 죽고….”

노기를 띠었던 그의 목소리가 점차 힘을 잃고 사그라들더니 말꼬리를 흐렸다.

“죽고, 뭐요. 죽고 싶으냐고요? 글쎄. 당신이 나를 죽일 수 있을까?”

그녀가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결코, 죽일 수 없으니 그가 분통이 터지는 듯 일어나 방안을 빠른 걸음으로 서성이기 시작했다.

“하지 마라.”

“뭘요.”

“아레인과, 그 어떤 접촉도 하지 말라고.”

“내가 왜 그래야 하죠?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방금 그대의 입으로 말했어. 샬리에게 넘겨주었다고 했으니 더 이상 그대의 몸이 아니다.”

“흐음, 어차피 당신 놀리려고 한 말이니 걱정 마요. 그냥 옛 친구 만나듯 할 거니까. 당신은 얼른 나가봐요.”

“그 말 지키는 게 좋을 거야.”

카샤가 마지못해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그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도 본래 몸의 주인으로서 참 곤혹스러운 참이었다. 다시는 피에 젖은 잔인한 얼굴을 보지 않을 줄 알았더니 말이다.

매회 간접적으로 끔찍한 삶을 꿈으로 반복하고 있었으니 그녀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꿈의 내용은 너무 생생하고 끔찍했으며, 공주의 신분으로 남에게 함부로 말할 것도 아니었다. 그걸 혼자 끙끙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하지만 꿈의 내용과 계속 맞아 들어가는 미래를 보며 그녀는 절망했다.

그게 그녀의 미래라면 차라리 이 몸을 버리겠다 생각했던 그녀가 마지막으로 신전을 찾았을 때였다. 자신은 떠나더라도 가족만은 무사하길 바랐던 그녀가 신전에서 간절히 소원을 비는데 크리하엘이 나타나 그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렇게 다른 세계에서 데려온 그녀는 본인 대신 그 역할을 아주 잘해주고 있었다.

그녀가 다른 세계를 떠올리며 그리움과 추억에 젖을 때마다 일부러 그 옛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게 차단했다. 처음엔 버거웠으나 차츰 그녀의 과거를 차단하는 것이 익숙해져 갔다. 그녀가 잘해주어야 샬리오니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리노아 왕국을 지키는데 다른 세계에서 온 그녀가 아주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녀가 샬리오니의 가족에 애착을 갖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그 속에 있던 샬리오니의 몸과 마음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전혀 달랐다. 꿈속에서 그렇게도 증오하고 미워하던 황제를 다른 세계의 그녀는 샬리오니의 마음과는 다르게 그에게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꿈속의 자신도 하지 못했던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몸으로 그와 마음을 나누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으나 그 덕분에 리노아 왕국도 전쟁에서 빗겨났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샬리오니는 그녀가 신전에만 들르길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하엘은 참으로 변덕스러운 신이었으니 그녀가 꺼리는 것이 이해 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크리하엘을 만나야만 샬리오니가 성불할 수가 있었다. 다른 세계의 그녀가 카샤의 전쟁을 훼방 놓았으니 분명 크리하엘이 불같이 화를 내리라는 것은 뻔해 보였다. 샬리오니는 속으로 응원했지만 말이다. 언제 성불하든 이 몸에서 잠자고 있으면 아무 상관이 없었으나, 지금 그녀는 샬리오니보다 더 깊게 잠들어 있었다.

참 곤란한 일이었다. 이 몸을 내팽개쳐버렸으니 말이다. 샬리오니가 깊은 고민에 빠질 즈음에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다. 그 뒤로 들어온 것은 샬리오니가 오랜만에 마주하는 아레인이었다.

“깨어났군요. 샬리. 정말 걱정했습니다. 지금은 괜찮습니까.”

아레인이 샬리오니의 안색을 살피며 안부를 물었다. 샬리오니가 그리운 눈으로 아레인을 바라보았다. 샬리가 자신을 그리 볼 이유가 없음에도, 그 눈길에 아레인은 가슴이 뻐근해져 오기 시작했다.

“샬리, 무슨 일 있습니까?”

그녀가 왜 그리 보는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둘러 물었다.

“당신이 그리웠어요. 아레인.”

그녀가 눈을 휘며 웃었다. 그 낯익은 모습에 아레인의 표정이 굳었다. 샬리는 저렇게 사람을 떠보는 말을 내뱉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저에게 그렇게 웃어주는 것은 꽤 익숙했다. 최근이 아니라 과거의 그녀에게서 많이 보아왔던 모습이었다. 마치 기억을 잃기 전의 샬리오니 공주 같았기에 아레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억이…. 돌아왔습니까?”

“잠시 돌아왔어요. 나중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요.”

아레인은 왠지 모르게 큰 상실감을 느꼈다. 그녀가 기억을 찾았다 하였으니 참 다행인 일이었으나 마치 샬리를 잃어버린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한사람인데 왜 자신은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혼란스러웠던 아레인이 마지못해 축하 인사를 건넸다.

“기억이 돌아와 다행입니다. 아마 이 소식을 리노아에서 들으면 크게 기뻐하겠지요.”

“내가 돌아와서 기쁜 표정이 아니군요. 뭐, 왜 그런지는 알 것 같지만요.”

“아닙니다. 기쁩니다. 좋은 일….”

“됐어요. 그런 입에 발린 말. 당신이 기억을 잃은 샬리를 좋아하고 있다는 건 이미 눈치챘답니다. 그런 건 제삼자의 눈으로 더 잘 보이는 법이니까요.”

그녀가 스스로를 제삼자로 칭하자 아레인은 의아했으나 곧 그의 마음을 들켰다는 생각에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언제 아신 겁니까. 저는 잘 숨겨왔다고 생각했는데요.”

“당사자가 아니니 알 수밖에요. 섭섭하긴 했어요. 나보다 기억을 잃은 사람을 더 좋아하니 말이에요.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기억을 잃었던 이는 당신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요. 아니지, 이걸 안심하라고 해야 하나.”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했다. 그는 샬리에 대한 마음을 평생 숨기고 있을 생각이었다. 아레인의 마음을 그녀는 평생 몰라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눈치챘고 기억이 돌아왔으니 아레인의 속은 절망적이었다. 그의 표정을 본 그녀가 그의 마음을 짐작한 듯 실소를 흘렸다.

“아까 말했듯이 내 기억이 오래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잠깐 돌아온 거니까 안심하세요. 언제 기억을 잃은 이로 바뀔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잠깐 돌아오신 거라고요?”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요. 아마 이게 마지막 만남이 될 수도 있겠군요. 아레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지막이라니요?”

샬리오니는 씁쓸한 얼굴로 아레인의 손을 맞잡았다.

“기억이 돌아온 나와 마지막이 될 거란 얘기에요. 물론 기억을 잃은 나는 당신과 계속 보겠지만요.”

“계속 둘을 나누시는데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결국, 한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냥 혼자 하는 넋두리 같은 거니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녀는 천진난만하게 싱긋 웃으며 손을 떼어냈다. 웃는 모습이 정말 예전의 그녀였다. 그녀가 자주 웃음 짓던 모습. 그녀는 기억이 돌아온 것이 잠깐이라고 했지만 그건 말이 안 되었다. 돌아왔으면 돌아왔지, 잠깐 돌아온 건 뭐란 말인가. 아레인은 여러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던 그녀의 말을 상기하고는 생각들을 털어버렸다.

“티나가 우리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밖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기척이 느껴지는군요.”

아레인이 웃으며 티나를 언급했다. 샬리오니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티나를 불렀다.

“티나를 안 보고 갈 순 없지. 들어와!”

그녀의 말에 방문이 벌컥 열리며 티나가 쏜살같이 들어왔다.

“공주님, 갑자기 쓰러지시면 제가 얼마나 놀라요. 무슨 일로 쓰러지신 건지 기억나요? 궁의들도 하나같이 모른다 하니 정말 돌팔이들이 아니겠어요?”

티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다다다 쏟아내었다.

“티나는 여기 오더니 얼굴이 활짝 폈구나. 어쩜, 네가 좋아하는 보석이랑 드레스가 많아서 좋지? 네가 행복한 모습을 보니 내가 이제 마음을 놓을 수 있겠어.”

“공주님?”

“기억이 잠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왜인지 금방 다시 기억을 잃게 될 거라 하시지만요.”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듯 아레인이 자기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기억이 돌아오셨어요?”

티나가 반색하며 손뼉을 짝 쳤다.

“아레인의 말대로 잠깐이니까 그렇게 좋아하진 말고.”

샬리오니가 웃으며 방방 뛰는 티나를 진정시켰다.

“아 참, 보니가 공주님 보고 싶다고 떼를 쓰는데 어떻게 하죠? 바로 물어봐 주겠다고 하고 깜박했네요. 방문 앞에서 여전히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티나의 말에 샬리오니가 난색을 보였다. 보니는 그녀가 모르는 인물이었다. 물론 어떤 아이인지는 알고 있었으나 샬리오니에게는 초면인 것이다. 뭐, 적당히 다른 세계의 그녀처럼 맞장구나 치자 싶었던 샬리오니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니도 들어오라고 해.”

티나가 방문을 열자 보니가 문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러더니 샬리오니를 보고 후다닥 뛰어왔다. 그러나 샬리오니의 코앞까지 달려와 품에 안기려던 보니의 동작이 일시에 멈추었다.

“보니, 왜 그러니?”

티나가 영문을 몰라 물으니 보니가 눈을 깜박이며 샬리오니를 안으려던 팔을 늘어뜨렸다.

“샬리 언니의 몸속에 있던 사람.”

보니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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