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74
샬리가 깨어나면 이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쉽게 믿어 줄까. 카시카프는 방안에 인형처럼 누워있는 그녀를 보자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모두를 물리고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 앞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고 쓸어내렸다.
아, 지금 이 모습을 보자 그는 엘리제를 너무 쉽게 죽였다는 자각이 들었다. 사지를 잘라 개밥으로 던져줘도 모자랄 것을. 그는 그날 그녀가 깨어날까 싶어 밤을 꼴딱 새웠다. 그러나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으면 반나절을 넘게 깨어나지 못하나 싶어 그는 초조해졌다.
궁의가 다녀갔지만, 원인을 알 수 없다 했다. 신관, 신관을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법사를 불러보았지만, 그들도 알지 못했다. 별 상관이 없는 각종 회복 마법을 사용해보았지만 별다른 차도는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사흘간이나 깨어나지 않았다.
이제 카시카프는 불안함에 몸을 떨었다. 그가 창백해진 그녀의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내줄 수 있었다. 그녀가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이 그에게 무가치했다. 누군가 그의 심장을 꽉 움켜쥐고 비트는 것 같았다.
보고 싶다.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나를 다시 봐주면….
그녀를 대할 때의 그는 항상 어리숙하고 바보 같았다. 샬리와 하는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전부 다 처음이었다. 그녀와 나누는 감정도, 대화도, 사랑도. 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왜 우리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 샬리, 고작 사흘인데, 네가 보고 싶다. 이렇게 보고 있는데도. 눈앞에 있는데도 그리워서 미칠 것 같다.
제발…. 그가 그렇게 간절히 빌 때였다.
신 크리하엘이 그의 소원을 들어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녀가 깨어난 것이다. 샬리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몇 번 눈을 깜박이더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카시카프가 떨리는 심정으로 그녀의 이마를 쓸다 멈칫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이질적이었다. 그가 알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아니었다. 똑같은 눈동자인데. 마치 다른 사람처럼. 카시카프는 섬뜩함에 이마를 쓸던 손을 거두고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눈동자를 다시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는 샬리의 눈동자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보고만 있어도 그의 마음이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건, 왜 나를 그렇게…. 샬리,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왜 나를 전처럼 봐주지 않나. 환영 마법을 본 여파로 그렇다 여기기엔 너무 괴이했다.
원망하지도 분노하지도 않는다. 그저 서로가 아무사이도 아닌것처럼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가 낯설었다. 그가 입술을 깨물며 쉽사리 그녀의 곁에 가지 못하고 한 발짝 물러선 채 주시했다. 카시카프가 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샬리가 입을 열었다.
“카샤, 왜 그러고 있어요?”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웃는데도 그는 그 모습에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마주 웃었다.
“사흘이나 깨어나지 않았어. 괜찮은가. 어디 불편한 곳은 없고?”
“그러고 보니, 배가 좀 고픈 거 같아요.”
그녀가 해맑고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곧바로 식사를 들이라 하지.”
무언가가 다른데 그걸 딱 집어서 얘기하자니, 그보다도 충격을 받아서 혹시 그전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일어나면 그의 멱살을 잡는 건 아닌가 했는데 그녀는 너무도 환하게 웃었다. 카시카프는 찝찝한 기분으로 시종에게 식사를 내오라 이른 뒤 다시 그녀의 앞으로 갔다.
“기억나지 않는 건가.”
“아, 그러고 보니.”
그녀가 눈에 힘을 주며 나무라듯 그를 바라보았다.
“다음번엔 그러지 마세요. 정말 놀랐으니까요.”
그게 다라고? 그녀가 내보여야 할 반응이 이상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간단히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그대가 본 건 환영 마법이야. 나는 엘리제와 키스하지 않았어.”
“그랬군요.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아니라니 다행이에요.”
그녀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말 이해한 게 맞나? 그보다 그녀의 말투가, 억양이 왜 저러지?
뭔가 다르다. 그의 표정이 심각해지려는데 시종이 식사를 내왔다. 사흘 만에 깨어난 그녀를 배려한 식단이었다.
각종 야채가 들어간 포타쥬에 포슬포슬한 으깬 감자와 그녀가 좋아하는 보들보들한 푸딩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식단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썩 표정이 좋지 않았다.
“고기가 좋은데.”
카시카프의 고개가 절로 옆으로 떨어졌다. 그녀가 저 포타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종종 아침 식사 때마다 그가 떠먹여 줄 때도 있었다.
“사흘째 빈속이라 고기는 소화하기 힘들어. 내가 떠먹여 줄까?”
그러자 그녀가 질색하며 손을 저었다.
“제가 먹을래요.”
그녀는 그 뒤로 말없이 포타쥬와 으깬 감자를 먹었다. 그 모습을 보던 카시카프가 테이블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식사를 끝낸 그녀가 그를 보며 물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요? 아까부터 얼굴이 심각해 보이네요.”
“디저트는 안 먹나.”
“아…. 지금은 별로 당기지 않네요.”
그의 입술이 비틀렸다.
“푸딩이 당기지 않는다고?”
“먹고 싶지 않을 수도 있죠!”
더는 참견하지 말라는 것처럼 그녀가 그를 노려보았다. 이건 아무리 보아도….
“누구지.”
“뭐가요?”
“샬리, 그대가 아닌 거 같아.”
“무슨 엉뚱한 소리예요?”
그녀가 까르륵 웃어넘겼다.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언뜻 비치는 거부감과 혐오, 거리감. 식기를 집을 때의 행동도 평소와 달라. 포타쥬를 내켜 하지 않고 디저트, 그것도 푸딩이 당기지 않는다고. 디저트 중에서도 푸딩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
“그럴 수도 있지.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내가 아닌 것 같다니, 방금 깨어난 사람한테 말이에요.
“나한테 벌을 주고 싶은 거라면…아니, 아무리 봐도 그대는 샬리가 아니야.”
똑같은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말투도, 행동도 그에게 보내는 눈빛까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녀의 안에 자리를 잡고 깨어났다.
그는 모순된 감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샬리가 맞았으면 싶기도 하고 아니었으면 하기도 했다. 샬리가 아니라면 그녀의 이상행동이 이해가 간다. 그가 사랑하는 샬리의 모습에 위화감만 가득했다. 번뇌하는 그를 바라보던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눈치챘나 보네, 그렇게 안타깝게 쳐다봐도 그녀가 돌아오는 일은 없어요.”
무슨 말인지 그 이면까지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하나만은 정확히 알았다. 그녀는 샬리가 아니라는 것.
“그녀가 돌아올 일이 없다는 건 무슨 소리지.”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있어요. 당신이 한 일을 생각하면 말이 되죠.”
“그녀를 깨워.”
그의 무식한 발언에 그녀는 발끈하려다 참았다.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스스로 일어나야 해요.”
“네가 나가면 되지 않나. 왜 그 몸에 기생하고 있는 거지?”
기생이라니, 말 참 예쁘게 한다 싶었던 그녀는 그를 크게 나무랐다.
“원래 내가 이 몸의 주인이에요. 악마 같은 사람. 당신 때문에 내가 이 아이를 부른 거예요. 더 이상 당신과 엮이고 싶지 않아서. 그게 아마 당신에게도 더 좋았겠죠. 나만 당신을 끔찍하게 여기는 건 아니란 걸 알았으니까. 피차 좋은 일이었죠.”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알 수 없는 소릴 할 거면 집어치워.”
그녀도 굳이 그를 이해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말 그대로 이건 내 몸이에요. 하지만 나는 나를 포기했어요. 크리하엘에게 부탁해서 고장 난 차원에 끼어 시간을 반복하는 나를 끊어내야만 했어요. 그러려면 그녀를 다른 곳에서 불러와야 했죠. 그 뒤로 나는 잠자고 그녀가 나 대신 행동했어요.”
여전히 뜻 모를 소리였다. 차원이 어떻고 시간을 반복하는 삶을 살고 한다는 것이 비현실적이라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거예요. 이해해요. 이런 일은 나 말고 없었으니까요. 크리하엘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어요. 나는 시간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 그녀를 다른 세계에서 불러왔어요. 정확히는 나를 위해 크리하엘이 불러준 거죠.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에요. 당신이 찾고 있는 그 사람이요.”
“샬리가 다른 세상 사람이라고? 그걸 나보고 믿으란 말인가.”
“나는 설명해주는 것뿐이에요. 믿고 말고는 당신 마음이죠.”
“그 말이, 사실이라면. 왜 네가 튀어나오는 거지? 그녀에게 몸을 내어줬다 하지 않았나.”
“나라고 좋아서 있는 게 아니에요. 내 몸이지만 이제 지긋지긋할 뿐이야. 이미 정이 다 떨어졌어요. 이 아이를 부르고 나면 내 혼백을 거두어 주기로 했는데 크리하엘은 깜깜무소식이지. 그러니 나를 신전에 데려가요.”
“헛소리만 하는군. 샬리를 신전에 데려가라니 제정신인가? 한 번만 더 그 입을 놀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이 여자가 하는 말을 믿지도 않지만, 놔두니 점점 하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샬리를 신전에 데려가면 신관들이, 아니 신성제국이 득달같이 달려들 것이다. 그리고 무슨 연유인진 몰라도 크리하엘이 제일 좋아하겠지. 아니, 이제 알 것 같군. 크리하엘리 샬리를 찾는 이유를. 믿고 싶지 않지만, 지금 상황이 믿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입 열면 어쩔 건데요? 날 죽이기라도 할 거예요? 당신이 말하는 그녀가 들어있는 이 몸을? 막무가내인 건 여전하네요.”
“아까부터 나를 잘 알고 있다는 듯 얘기하는군. 불쾌하니 그만하지.”
“누군 알고 싶어서 알았나. 그럴 거면 납치하질 말든가.”
“무슨 말이지?”
그는 다른 사람을 납치한 적이 없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만 아까부터 늘어놓고 있었다. 그렇다고 믿지 않자니, 그녀는 정말로 제가 아는 샬리가 아니었다.
“뭐, 지금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그런 게 있어요. 지금 많이 꼬였다구요. 크리하엘이 당신에게 거는 기대가 많았는데 뭐. 저한테는 좋은 일이죠.”
“헛소리 그만하고…. 제발…. 샬리를 불러줘.”
그는 이 여자와 말도 안 되는 농담 따먹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지금은 간절히 샬리를 끌어안고 눈을 마주치며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이었다.
“미안하지만 내 능력 밖이에요. 그녀가 스스로 깨어나지 않는 한….”
“네 몸이라면서 왜 깨우질 못한다는 거지?”
“온몸을 꽁꽁 둘러싸고 방어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그래요? 당신이 얼마나 충격을 줬으면 그러겠어요.”
“그건 내가 아니라고…. 그럼 다시 들어가.”
“뭐요?”
“전처럼 다시 들어가서 나오지 말라고. 나는 그녀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테니.”
“계속 그 상태면 이 몸이 어떻게 될까 봐 일어난 거예요. 난 상관없지만, 당신은 상관있을 텐데요,”
그녀가 콧방귀를 끼며 그를 비웃었다. 같은 샬리의 모습인데 정말 생소했다. 전혀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건 네가 샬리 몸에서 한시라도 빨리 나가는 것뿐이다.”
“대체 몇 번이나 말해야 해요? 내가 나가면….”
“됐어.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은 없다. 난 그녀한테서 들을 거야.”
말투 한번 까칠하다. 항상 저랬지. 그녀가 심술이 나서 그에게 쏘아붙였다.
“그럼 나도 보고 싶은 사람 있으니 불러줘요. 어차피 내가 들어있는 동안은 대화도 하기 싫을 거 아니에요? 나도 마찬가지니까요.”
“불러달라니. 네가 여기에 아는 사람이 있다고?”
“아레인. 내 애인 불러줘요. 그녀가 오기 전까지 아레인이 내 애인이었으니까요.”
그 말에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다시. 뭐라고? 아레인이,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