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72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잠시 멈칫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고, 또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서. 진짜 그 소문들을 믿고 나에게 온 거였어. 지금 그의 태도는 그것 말고는 설명되지 않았다. ‘아직도’라니? 그전에 내가 아레인을 좋아하기라도 했단 말이야?
그 말도 안 되는 의미를 머릿속에 담자 버퍼링이 걸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멈춰버린 내 반응을 잘 못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그의 남청색 눈동자가 새카맣게 가라앉으며 위험한 빛을 띄우기 시작했다. 분노로 이성을 잃기 전, 마치 폭풍전야처럼 고요하게 일렁였다. 당황한 내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전 아레인을….”
“말하지 마.”
그가 한 음절씩 힘을 주며 내 말을 끊었다. 무엇 때문인지 지금 그는 단단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또 혼자 생각하고 내 말은 안 듣지. 나는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아레인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이 오해하고 있어요.”
“리노아에서 아레인과 연인이었다는 사실은 왜 숨겼나. 분명 내게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었지. 이것도 오해인가?”
그가 이를 악물며 내 어깨를 꽉 쥐었다. 가해진 힘이 너무 아팠지만, 꿋꿋이 참았다. ‘나’는 전혀 아레인과 연인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 당시 나에게는 정말 기사와 공주였고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아레인이 내 상태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나 보다. 샬리오니가 그전의 기억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걸 보니.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저는 기억이 없어요. 그와 연인이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래. 기억이 없다….”
“카샤, 정말이에요. 중간에 기억을 잃어서….”
“그런 변명은 너무 형편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정말 그대답지 않군.”
그가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리노아에 알아보면….”
“그대가 쓴 맹세의 서약서 내용이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둘 사이에 끼어든 내가 미웠겠지. 그 마음을 억지로 끊어내야 했으니.”
그는 격해진 감정을 감추듯 낮은 목소리로 짓씹듯 내뱉었다.
“카샤, 제발 내 말을 들어봐요.”
“그런 상황이었는데도 그대는 내게 최선을 다했어. 미안해야 하는 건 나군. 당신이 아니라.”
조금만 건드리면 폭발할 것처럼 위태위태한 분위기가 우리 사이를 감돌았다. 나는 그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서 더 이상 그게 아니라는 이야기는 그의 화만 돋울 뿐이었다. 그는 굉장히 비이성적인 상태로 격양된 것처럼 보였다.
지금 상태에서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조금 진정되고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하면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쥐고 있던 내 어깨에서 힘을 뺀 그가 표정이 사라진 채로 나를 무감하게 바라보았다.
“그대가 좋아하는 아레인은 곧 보내도록 하지.”
그리고는 천천히 뒤를 돌아 나갔다. 그의 등은 명백히 나와의 대화를 거부하는 모양새였다. 나는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 그가 뒤를 돌아보기라도 할 것처럼.
* * *
우리 사이도 조금 단단해지지 않았나 싶었으나, 아니었나 보다. 우리는 아직도 소문에 휘둘리는 얼뜨기 바보 커플이었다. 뒤늦게 생각하니 그랬다. 카샤도 나도 서로의 일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소문이 계속 누적되자 아닌 걸 알면서도 들을수록 화가 난다. 아닐 것이라고 하면서 억누르고 있던 울화를, 어제는 서로 일시에 터트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테너를 통해 루이를 불러 물었다. 내가 들었던 소문에 비하면 그가 과민 반응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부르셨습니까.”
“지금까지 카샤가 들었던 소문이 뭐였는지 나한테 전부 알려주세요.”
루이는 차근차근 황제궁에 돌았다던 소문을 일러주었다. 달리아 궁에 퍼졌던 엘리제로만 가득했던 소문과 확실히 달랐다. 오로지 카샤 하나만을 노리고 퍼뜨린 소문들밖에 없었다. 나와 아레인의 소문만이 대부분이었다. 계속 이런 소문에 노출되어 듣고 있었단 말이지. 그런데 나에게 계속 내색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유는 뭐, 나와 마찬가지겠지. 별거 아닌 소문이니까 이런 거로 일일이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서일 테고. 그런데 날이 갈수록 소문의 수위가 더해지니 힘든데 그걸 풀어줄 사람한테는 말 한번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우린 정말 바보 같다. 카샤의 오해를 대체 어떻게 풀어주지. 소문은 교묘한 진실을 섞어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친구를 함부로 의심해서는 안 되겠지만 엘리제가 의심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와 아레인의 과거는 어떻게 알았을까.
아레인은 그날 다시 호위기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카샤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었다. 역시 소문이 문제였다.
루이는 대부분을 카샤를 호위하며 붙어있었다. 그러니 엘리제와 만나서 했던 대화도 알고 있겠지. 궁금한데 선뜻 물을 수가 없었다. 나는 카샤에게 직접 듣고 싶었으니까. 한숨을 내쉬며 그를 보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루이가 아레인을 힐끗 보더니 입을 열었다.
“조장님과 공주님 사이에 불씨를 붙인 게 그 엘리제 영애입니다. 말한 본인은 좋은 뜻으로 했다 하나 그게 원인인 것은 맞지요. 그럼 이만.”
그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더 물을 새도 없이 빠르게 사라져버렸다. 엘리제가 불씨를 터트린 원흉이라고? 이왕 알려줄 거 다 알려주고 가지. 루이는 어느새 뒤꽁무니조차 보이지 않았다.
“루이가 알려준 소문에는 제가 샬리의 얼굴을 닦아주고 손바닥 치료를 해준 부분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그 부분을 엘리제 영애에게서 들었다고 생각되는군요.”
아레인이 침잠하게 가라앉은 낯빛으로 말했다.
“그 부분을 추궁당했다 했었죠? 확실히 루이가 말해준 소문에 그 부분이 없군요. 엘리제가 그날 수업 참관을 받았으니 그녀가 말했을 확률이 높아요.”
엘리제는 대체 왜 그런 말을 카샤에게 한 걸까. 내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녀는 눈치가 굉장히 빨랐다. 그런 그녀가 아레인과 나를 엮어 참관일에 있었던 일을 카샤에게 전했다.
엘리제를 불러 사실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의도를 알 수 없으니 지금까지 내가 알던 이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엘리제든 누구든 소문을 퍼트린 사람은 지금 이 상황을 얼마나 좋아하고 있을까. 카샤가 오해하고 있으니 별거 아니라 치부했던 소문은 참으로 효과가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티나, 엘리제를 한번 불러야 할 것 같아.”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옆에서 조금 전 들어왔던 시녀가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티나가 묻자 그녀가 나를 보며 울상을 했다.
“엘리제 영애가 폐하께 독대를 청했다고 해요. 후원에 같이 계시다는데.”
엘리제가 왜, 어째서 자꾸 우리 사이에 끼어드는 불순물처럼 느껴질까.
“무슨 일로 온 건지는 알고 있니?”
“정확한 건 잘 모르겠어요.”
“폐하께 가야겠어. 어차피 잘 되었네. 엘리제에게 물어볼 것도 있고 삼자대면이라도 해야지. 이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말 알 수가 없으니.”
나는 서둘러 채비한 후 달리아 궁을 나서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래요. 공주님?”
“나 지금 이렇게 황제궁 방문하는 거, 다른 여자 만나는 폐하 감시하는 것처럼 볼썽사납게 보일까?”
티나가 깜짝 놀라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계시면 오해만 더 쌓일 거예요. 지금 퍼지는 소문을 보세요. 공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진실 한 가닥에 거짓투성이에요. 또 그런 소문을 듣고 싶으신 거예요?”
“네 말이 맞아. 티나, 고마워.”
내 남자는 내가 지켜야지. 황제궁에 도착해서 알현 신청을 넣고 후원 쪽으로 시종과 함께 이동했다. 그는 내가 알현 신청 없이 올 수 있도록 조처를 해두었으나 지금 우리는 냉전 중인 상태라 다짜고짜 찾아가기가 그랬다.
후원에 거의 다다랐을 때 멀리서 엘리제와 카샤가 서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카샤는 내게서 등을 지고 있었고 엘리제는 정면에서 보였다. 곧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카샤에게로 다시 눈을 고정하더니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를 황비로 맞아주세요.”
그 말은 여기서도 들렸다. 너무 또렷해서 안 들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멈춰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공주님, 왜 멈추셨어요?”
티나가 뒤에서 의문을 표했다.
“방금 못들은 거야? 엘리제가 한 말.”
“뭐라고 하는 것 같았는데 정확하게는 안 들렸어요.”
나 혼자만 들은 건가. 불쾌했다. 너무나 불쾌하고 화가 났다. 이렇게 화가 난 적은 처음이었다. 그가 승낙하지 않을 걸 알지만 그래도 친우로서 지금까지 지냈던 이가 나를 도발하듯 쳐다보더니 저 얘기를 꺼냈다.
이 화를 어떻게 삭이지. 아니, 내가 왜 삭여야 해? 그녀의 뺨이라도 올려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페리안 왕자 때처럼 주변에 있는 거 아무거나 골라잡고 흠씬 두들겨 패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보는데 그녀가 나를 보며 싱긋 웃더니 카샤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몸을 밀착시켰다.
입이 딱 벌어졌다. 겁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내가 때리기도 전에 그녀가 죽게 생겼다.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리는데 그녀가 카샤의 뺨에 손을 올려 쓰다듬기 시작했다.
엘리제, 미쳐 버린 거야? 그녀라면 카샤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 어떻게 저렇게 대담한 행동을 할 수가 있지. 엘리제가 저런 말도 안되는 행동을 하는데도 가만히 있는 그가 이상하다. 나는 초조해져서 카샤의 등을 바라보았다. 보이는 건 그의 등 밖에 없었다.
그녀를 떨쳐낼 줄 알았던 그가 허리를 숙이더니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너무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이게 뭐야. 말도 안 되잖아. 그가 왜 엘리제에게 키스를…. 혹시, 혹시 그날 내게 엘리제에 대해 하려고 했던 말이 이거였나. 그녀를 받아들이고 황비로 맞이한다는 내용이었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카샤가 나한테 절대로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데 왜 저렇게 격정적으로 그녀와 입을 맞추고 있는 거지.
우욱-
너무 충격적인 장면에 헛구역질이 나왔다. 속이 다 뒤집히는 느낌이었다. 멀리서 보는데도 그 모습들이 또렷하게 보인다.
백조처럼 잔잔한 수면 아래를 끊임없이 갈퀴를 휘저으며 노력해왔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었나 보다. 지금까지 애써왔던 모든 것들이 허무해지는 순간이었다.
아, 보기 싫어. 내가 왜 저런 걸 봐야 해. 세상이 거꾸로 뒤집혀도 상관없으니 그만 봤으면.
몸에서 힘이 스르르 풀리며 새파란 하늘이 눈에 가득 담겼다. 우중충한 내 마음과 다르게 보이는 하늘은 너무 맑고 새파랬다. 무너지는 몸뚱어리가 느껴졌으나 그냥 놔두었다. 균형을 잡고 다시 세울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저 깊은 곳 어딘가로 기어들어 가고 싶었다. 의식이 내 바람대로 저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공주님! 공주님!?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지?”
희미해지는 의식 사이로 티나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티나, 내가 또 네 걱정을 끼치는구나. 그런데 너도 이해해 주겠지. 저 모습을 같이 본 너라면….
“…샬리?”
멀리서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것 같다. 엘리제와 열정적으로 키스하는 당신이라니. 알고 싶지 않아. 보고 싶지도 않고. 그 뒤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암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