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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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를 보내고 답답한 마음에 황제궁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간단한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자주 타고 올라갔으니 말이다. 황태자 시절 다 집어치우고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 그 어린 날에 자주 올라왔었다. 그 당시 아레인이 자주 나를 찾아 올라왔었으니 내가 어디 있는지 알 것이다.
그는 테너 다음으로 내가 믿을 수 있는 자였다. 거의 형제처럼 같이 자라왔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곧 듣게 될 진실 앞에 긴장감을 털어버리려 애썼다. 잠시 눈을 감고 끊임없이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누르고 있을 때였다.
“들었어? 샬리 공주님이랑 아레인 경이랑 리노아에서부터 사귀고 있었대.”
“나도 알아,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였다고 하던데.”
기어이 눈을 뜨게 만드는군. 소곤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나는 지붕 위에서 소리가 난 지점으로 이동했다. 내려다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쩐지 둘이 너무 각별하다고 했어.”
“맞아. 서로 보기만 해도 좋아죽던데, 뭘.”
사람도 없고 인기척 하나 없는 그곳에서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나보고 들으라는 듯. 들리는데 인기척이 없다. 암영조가 아무리 뒤져도 알 수 없던 소문의 출처가 이것이었나. 마법사가 한 명 더 있었군. 하급마법으로 잔재주를 부릴 줄 아는 놈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부리는 자가 있다.
황궁은 사람을 잘 바꾸지 않는다. 꽤 오래전부터 심어놓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마법사는 희귀하다. 하급이라도 매우 귀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당장 황궁의 마법 부서에 상급자들의 조수로 들어갈 수 있는데 대체 뭐 하러 그 능력을 썩힌단 말인가.
그런데 두 명이나 황궁에서 시중인 노릇을 한다니 극히 희박한 확률이었다. 이에 대해서 좀 더 확실히 조사해야 할 것 같았다. 이참에 시중인들의 마법사용 여부까지 철저히 조사하라고 해야겠군. 방금 들은 소문에 다시 두통이 일었다.
정말 가소롭고 얄팍한 방법이었으나 왜인지 그 방법이 내게 먹히고 있었다. 자주 듣다 보니 내성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정신만 피폐해져 갔다. 하나하나가 듣고 싶지 않고, 믿고 싶지 않은 얘기들뿐이었다. 방금 들었던 그것은 치명타 수준이었다.
나 스스로 믿지 않는다고 되뇌어봤자…. 아레인이 오면 확인해 줄 것이다. 방금 들었던 그 소문은 지금까지 떠올리지 않으려 깊숙이 묻어놓았던 것이었다. 투알린에서 물었을 때 둘 다 서로를 부정했었다. 그 뒤로 알아보려면 더 정확히 알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파고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왜 그러고 계십니까? 여긴 오랜만이군요.”
나는 방금 소문을 들은 곳에서 미동 없이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 아레인이 의문을 표하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내가 너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그가 내 말에 입매를 굳혔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리노아에서 샬리와 연인이었다는 말은 그저 소문에 불과한가.”
그의 동공이 일시적으로 커지며 미세하게 떨렸다.
“사실대로만 말해.”
머뭇거리는 것이 썩 좋지 않은 징조였다. 그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랬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폐하, 그 이후로….”
“그래. 그렇단 말이지. 지금도, 너와 샬리가….”
나는 그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실제로는 심장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았으나.
“당연히 아닙니다. 이제 더는…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그가 낯빛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검술 수련 중에 샬리의 얼굴을 정성스럽게 땀을 닦아준다고.”
“그건….”
“샬리의 터진 손바닥에 네가 연고를 발라준다지. 그것도 아주 정성스럽게.”
“…….”
“같이 춤도 추고, 머리도 쓰다듬고.”
엘리제가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아레인에게 전했다. 연인 같았던 그 모든 행동을. 말을 이어갈수록 스스로 심장을 도려내는 격이었다. 그런데 멈춰지지 않는다.
“…폐하.”
“후원에서 밀회도 하나?”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최근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밀회 말고는 다 맞다는 소리인가.”
그가 입을 열다 말고 꾹 다물었다.
“샬리는 내 여자인데. 아레인. 그러라고 너를 샬리의 호위로 붙인 게 아니다.”
당장 날아갔어야 할 네 목이 왜 아직 붙어있는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전부 오해이십니다.”
그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그래,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더니 이런 식으로 마주하는군.
“아직 마음에 두고 있군. 그녀를. 넌 항상 표정을 감추곤 했으니까.”
그를 두고 혼자 말을 이어갔다.
“투알린에서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는데, 그걸 부정하고 싶어서 너를 시험했는지도 모르지.”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그 일이 뭐지? 나도 모르는 걸 자네는 알고 있나 보군.”
“그녀에게는 폐하뿐입니다.”
“네가 그렇게 샬리의 마음을 단정 짓는 게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모르나.”
그의 입에서 샬리에 대해 잘 안다는 듯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질투로 속이 들끓었다. 나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리노아에서 그녀와 함께 보냈다. 샬리가 정말 네가 아닌 나를 좋아하는 것이 맞냐고 다시 묻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자존심이 상해서.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에서는 이미 쌓인 분노와 울화가 가득했다. 그렇다고 아레인을 벌할 수가 없다.
내 과거의 끈인 그를 버릴 수가 없다. 질투에 미쳐 가장 아끼는 부하를 내친 황제라…. 주변에 남은 사람이 극히 드물다.
그를 버린다면 나는 이후로도 내 곁에 아무도 두지 않겠지. 마지노선이었다. 아레인은 내가 만든 경계선 안에서 아슬아슬하게 한발 걸치고 있었다.
그들이 지금 연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 한계에 다다른 내 인내심을 겨우 붙잡게 만들었다. 그를 포기하는 건 과거를 버리고 형제 같았던 이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녀가 진정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지. 샬리가 그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찌 될지 모르겠으나 사실확인이 먼저였다.
“지금 아무 사이가 아니더라도 넌 과거에 샬리와 무슨 사인지 내게 알려야 했다.”
“제 잘못입니다.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그가 샬리를 마음에 품고 있고, 둘은 나보다 한참 앞서가고 있었다. 내가 먼저가 아니다. 아니, 둘이 나란히 가지만 않으면 된다. 마지막까지 그녀의 곁에 있는 건 내가 될 것이다.
“근신하고 있어. 처분은 후에 내리겠다.”
이 이상 대화했다간 이성을 잃고 아끼는 이를 내 손으로 처리하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른다. 크게 심호흡하며 진정하려 애를 썼다. 아레인과 대화만 해도 이런데 샬리와 대화하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 앞섰다. 내가 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는 건 아닐까. 그가 어두워진 얼굴로 내게 묵례하고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루이를 불렀다.
“마법사가 한 명 더 있다.”
“시중인 중에 말씀입니까.”
“모르지. 황궁 안을 쏘다니며 마법으로 소문을 퍼트리는 잔재주를 가진 놈이 한 명 더 있으니 이번엔 제대로 잡아. 요즘 우리가 꽤 방심하고 있었지.”
“바로잡겠습니다.”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 나도 이번 일은 머리가 굳었는지 생각을 못 했으니, 대신 이번엔 제대로 잡지.”
* * *
“왜 소문이 안 멈추지? 범인은 베리타가 아니었던 걸까?”
내가 티나에게 의문을 표하자 그녀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수그러들려면 시일이 걸리지 않을까요?”
“그렇다기엔 새로운 소문도 다시 돌고 있잖니.”
“그러게요. 이번 소문은 더 악질이지 않나요? 폐하와 엘리제 영애가 황제궁에서 데이트를 했다니, 공주님이 생각해도 우습죠?”
전혀 우습지 않아.
“황제궁 사람들이 둘이 있는 걸 목격했다며.”
물론 데이트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둘이 황제궁에서 만났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잠시 지나가며 본 거라고 하니까요. 요즘 백작가 사정이 그러니 몇 마디 나누었을 수도 있죠. 별것 아닐 거예요.”
그런데 왜 잠시 지나가면서 본 이들이 저마다 둘이 다정한 모습으로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것이 분위기가 좋았다고 하지? 왜 다들 하나같이 엘리제가 정말 황비가 될 수도 있겠다고 하는 걸까. 속에 있는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내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았는지 티나가 내 기색을 살폈다.
“공주님, 아까 하녀들이 한 말 믿으시는 거 아니죠? 엘리제 영애에 대한 동정론 때문인 거 아시잖아요.”
그냥 동정론이라고 우습게 봤다간 큰코다치겠지. 그렇다고 여론이 그런 것을 아픈 엘리제 탓을 할 수도 없고.
“알아, 다른 소문이 더 심각해. 믿는 것 같지는 않지만 다들 재밌다고 퍼트리고 있을 거 아니야.”
“아레인 경이랑 곧 도피할 계획이라는 소문이요? 그러고 보니 아직 안 돌아오셨네요. 폐하께서 찾으셔서 가신지가 꽤 된 것 같은데.”
“그래, 정말 아레인이랑 도피하려고?”
나와 티나가 놀라서 소리가 나는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녀와 하녀들이 모두 고개를 조아리는 걸 보니 카샤가 입단속을 했나 보다.
그는 들어오지 않고 문가에 등을 느슨하게 기대고 있었다. 그러나 표정은 서늘하다 못해 시렸고, 입매는 굳어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 무슨 일이 있구나 싶은 생각에 기분이 싸했다. 주위를 전부 물렸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방문 앞에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계속 거기 있을 거예요?”
그는 일견 초조해 보이기도 했다. 우리는 잠시 대치 중이었고 어느새 그 사이로 벽이 생겨 있었다. 분위기가 그랬다. 그 벽은 내가 넘지 않으면 계속 그 자리에 있을 것처럼 보였다. 카샤가 방어하는 듯한 모습을 보자 선뜻 다가가기에 조심스러워졌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여기 와서 첫마디를 한 후 그 뒤로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혹시 그 질문에 답을 하길 바라는 거라면.
“내가 아레인이랑 정말 사랑의 도피라도 할 거라고 생각해요?”
농담처럼 던진 질문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대답 없이 여전히 나만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소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건 아닐 것이다.
“소문 믿고 있는 거 아니죠? 당신이 엘리제와 황제궁에서 만났다는 것보다 더 현실성이 없어요.”
그가 내 말에 미간을 찌푸리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말은 누구에게 들었지?”
“소문으로 돌아요. 당신이 엘리제와 황제궁에서 데이트 한다구요.”
그가 딱히 부정도 하지 않고 묘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엘리제와 많이 친한가?”
“친한 편이긴 하죠. 왜요?”
설마 지금에 와서 엘리제한테 관심을 두는 건가? 데이트 얘기는 왜 부정을 안 하는 건데.
“이후로 엘리제와는…. 아니다.”
“이후로 뭐요? 끝까지 말해줘요.”
지금 우리 엘리제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는 거야? 이게 우리 사이에 얼마나 생소한 일인지 그는 못 느끼는 모양이다. 전에 라이올라 얘기를 할 때만 해도 다른 사람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했던 사람이. 그가 다가오지 않으니 내가 다가갈 수밖에. 문가에 서 있는 그의 앞으로 가자 카샤가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대체 왜? 그가 그어놓은 선을 넘어버려서?
“엘리제랑 무슨 얘기 했어요?”
“뭐?”
“엘리제 이야기를 꺼내니까 그녀한테 관심 있어 보여요. 황제궁에서 만났다면서요.”
그가 피곤한 듯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실제로 요즘 그는 얼굴색이 좋지 않았다.
“엘리제 이야기를 꺼낸 건 그대가 먼저 아닌가.”
이렇게 도돌이표 하듯 의미 없이 말꼬리 잡는 건 우리가 주고받던 대화 방식이 아니었다.
“엘리제와 데이트 했어요. 정말로?”
“그걸 진심으로 묻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왜 부정을 안 해요. 말이 없으니 내가 얼마나 불안한지….”
그가 내 말을 들으며 미간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넌!”
항상 차분한 목소리로 대화하던 그가 처음으로 내게 큰소리를 냈다. 그의 얼굴이, 눈가가 격렬한 울분을 담고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다시 거칠게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후 나를 바라보았다. 잘게 떨리는 눈동자에는 뭔지 모를 절박함 마저 스며있었다.
급격히 변화하는 그의 감정이 낯설었으나,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보이는 모습에 내 속 또한 아려 죽을 것처럼 지끈거렸다. 그냥, 그가 아파 보이니 나도 같이 아팠다.
“넌…. 아직도 아레인을 마음에 품고 있는 건 아닌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