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70
“제 말이 폐하께 심려를 끼쳐드렸습니까? 어떤 부분인지 알려주시면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세요.”
그녀가 황급히 눈을 내리깔며 두 손을 모으고 사죄를 청하였다. 그 모습에 눈에 힘을 풀었다. 그냥 바보 같은 여자인데 괜히 힘을 뺐다. 전에 이런 사람이 있었는데. 투알린의 페리안 왕자가 이렇게 멍청하고 눈치가 없었던가?
“알겠으니 고개를 들어라. 샬리와 아레인이 사이가 어떻게 좋다는 거지?”
그녀가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좀 전의 협박 같은 살기 때문에 꺼리는 듯싶었다. 정말 귀찮은 여자라 생각하며 말투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편히 말하도록.”
그녀가 어색하게 웃음 짓더니 조곤조곤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제 말은 사실입니다. 공주님과 아레인 경은 정말 사이가 좋아요. 폐하께 잘 보이려 꾸며내거나 지어낸 말이 아니니 노여움을 푸세요.”
그녀는 내가 못마땅했던 부분을 완전히 잘못짚고 있었다. 백치 같은 여자한테서 대체 뭘 바랄까.
“그래. 믿을 테니 말해봐.”
“공주님과 아레인 경은 사이좋은 오누이 같으십니다. 가끔 두 분이서 춤도 같이 추시고, 검술 훈련하시다가 서로 이마에 땀을 닦아주기도 하시고요. 얼굴도 정성스럽게 닦아 주시더라구요. 공주님 손이 터지셔서 연고를 발라주실 땐 서로를 아끼시는 모습이 눈에 보여 보는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레인 경이 가끔 공주님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도 있는데….”
그녀가 말하는 중반 부분부터 칼집에 손을 올리고 있다가 참지 못하고 발검하여 그녀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지금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서 하는 소린가?”
이 백치가 그들을 오누이 같다 칭하면서 막상 떠드는 건 연인이 할 행동들을 나불대고 있었다. 나를 곤란하게 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바들바들 몸을 떨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병약해 보이는 사람이 여기서 쓰러지면 곤란했다. 날카로운 검날이 목에 더 감겨들며 빨간 실선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폐하, 어째서…. 저는 폐하께서 왜 이러시는지 정녕…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지 검날에서 목을 떼지 않은 채 눈물을 그렁대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피를 보지 않았던 예리하게 날이 선 검은 그녀가 흐느낄 때마다 목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쯧 혀를 차며 검을 거두었다. 그러자 그녀가 털썩 주저앉으며 떨리는 손을 목에 갖다 댔다. 예전 같았으면, 샬리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그저 한순간에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그녀의 친우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눈치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알고도 그리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후로 네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음에도 이렇게 운이 좋으리란 법은 없으니 말이다.”
다시 궁 안으로 들어가려니 방금 들었던 말 때문에 숨이 턱 막히기 시작했다. 엘리제에게서 멀어지며 루이를 불러 아레인을 데려오게 했다. 샬리에게 사실을 확인받기엔 지금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 * *
카시카프가 미련 없이 떠나자 엘리제가 입술을 짓씹었다. 목에 대었던 손을 떼자 손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아직 멀었어. 아레인과 샬리 공주가 연인 사이라는 것도 아직 알려주지 않았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녀는 일어나 어딘가로 다급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잘 참아왔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참 대단하다 싶을 만큼.
본인은 신분 때문에 황후는 언감생심 쳐다보지도 못할 나무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황후로 시작하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차근차근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제일 자신 있는 것이 인내심이었다. 황후 자리, 라이올라에게 먼저 내주라지. 그다음엔 내 자리가 될 것인데.
라이올라가 황후를 결심했을 때부터 황궁에 사람을 심었다. 끔찍한 가족들을 떠안고 있는 여자를 추천서를 넣어 하녀로 만들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말이다. 운이 좋게도 그녀는 하급 마법까지 쓸 수 있는 마법사였다. 보통 하급 마법사는 상급 마법사를 따라다니며 그 뒤치다꺼리까지 떠안고서 마법을 악착같이 배운다. 그러면서 상급 마법사의 꿈을 가지고, 갖은 고생을 하면서 버티면 중급 마법까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저 하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딸린 식구가 많아서. 그 하녀에겐 모든 식구가 다 소중했던 것이다. 도박꾼 부자까지도 말이다. 엘리제는 그 하녀를 이해할 수 없었으나 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협박 수단이었다. 더군다나 조금이라도 마법까지 쓸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사실 마법은 엘리제 또한 사용할 수 있었다. 아무도 모르지만, 그녀는 마법사였다. 어린 시절 손님으로 방문한 마법사가 그녀에게 자질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검술과 마법 그 어느 것도 배우지 못하게 했기에 그녀는 속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녀는 수소문해 어스름한 뒷골목의 고주망태 마법사에게서 마법을 배웠다.
그는 귀한 술만 건네면 입이 술술 열렸다. 소문이 가짜는 아니었는지 엘리제는 순식간에 초급을 떼고 하급 마법사가 될 수 있었다.
놀라운 성취였다. 엘리제는 제가 마법에 큰 재능이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녀가 스스로에게 감격하는 사이 고주망태가 된 마법사가 낄낄대며 웃기 시작했다. 배까지 잡고 여관에서 크게 웃자 그제야 엘리제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고주망태가 그랬다. 네가 배운 것은 하급까지 속성으로 가는 방법이다. 하지만 한계가 하급 마법이 끝이지. 나와 같은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구나. 너도 이제 평생 하급 마법사다. 배우는 속도가 매우 빨랐으니 아마 재능이 컸을 것인데 어찌할꼬. 그는 한껏 엘리제를 비웃은 채 머리를 테이블로 처박으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엘리제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제가 사기당했다는 사실은 둘째치고, 더 이상 하급 마법에서 중급으로 올라가지 못한다는 것이 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빠르게 체념했다. 애초에 가문에서는 마법조차 배우지 못하였으니 이만큼이라도 배운게 어딘가 싶어 애써 위로하였다.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그녀는 하급이지만 일시적으로 환영 마법을 쓸 수 있었다. 이건 그녀의 사교계 생활에 정말 요긴하게 쓰였다. 다른 이들을 깎아내릴 때마다 환영 마법은 필수였다. 끌어내리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추문을 만드는 일쯤이야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었다.
그렇게 거슬리는 이들을 빈틈없이 차근차근 치워버리며 올라왔다. 그런데 난데없이 타국에서 공주가 들어온 것이다. 황궁에 들어오기 전에 처리하려고 암살자를 고용했으나 실패했다. 기대하지는 않았다. 죽으면 좋았으나 아니어도 다음이 있었다. 기다릴 수 있었다. 공주는 아름다운 외모와 사근사근한 말투를 무기 삼아 황제를 꾀고 약혼자 자리에 들어앉았다.
그녀는 리노아 예법을 아주 우아하게 구사하며 사람들의 선망을 받아 사교계에 무사히 안착했다. 그래서 엘리제는 계획을 변경했다. 이제 라이올라는 황후가 되기 글렀으니 계획을 바꿀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엘리제가 심어놓은 마법사 하녀가 공주의 시중인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공주의 정보를 물어다 주었다. 좀 멍청한 줄 알았던 공주가 의외로 선전하고 있다 들었다. 수업 태도도 바르다며 칭찬이 자자하고 성격 또한 좋아 시중인들이 그녀를 전부 다 잘 따른다 했다. 엘리제가 심어둔 하녀조차 그녀에게 넘어가 버린 것이 우스웠다.
그러나 그 하녀는 협박 앞에서 꼼짝도 못하는 인간이었다. 아주 천천히 빈틈없이 환영 마법을 씌워 사람들 모르게 칼립타를 들여보내고 맹세의 서약서를 복사했다. 엘리제의 흔적은 남지 않았고 하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간과 공을 차곡차곡 들이자 성과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삶이란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돌아가지 않는 법이었다. 엘리제의 큰 오라버니가 동대륙의 부마로 가기로 결정이 되면서 루스타인 백작가는 급속하게 침울해졌다. 엘리제를 황비로 끌어들이려던 귀족들은 모두 참수형을 당했다. 황비가 될 기회도 날리고 큰 오라버니도 떠났다.
엘리제는 충격받은 마음에 조급함이 앞섰다. 그들의 사이가 좋아지고 있다는 말에 더더욱 박차를 가했다. 빠르게 소문을 흘리고 괴롭혔다. 더는 시간을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인내심도 시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여러 가지 소문으로, 특히나 황제에게는 더 악질적으로 퍼트렸다. 그의 독점욕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리노아에서 샬리오니 공주의 행적을 웃돈까지 얹어주며 사람을 구해 정보를 샀다. 우습게도 지금의 아레인 경과 그녀는 예전에 연인 사이였었다. 그 후에 헤어졌다는 말도 없었다.
그저 샬리오니가 기억을 잃어 어영부영 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보통 사람은 잃었던 기억도 금방 돌아오기 마련일 텐데. 그러니 지금까지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녀의 연인인 아레인은 버젓이, 심지어 호위기사까지 하며 같이 다니고 있었다.
황제보다 더 자주 붙어있고 가까이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였던 엘리제가 확신하게 되었던 계기는 검술수업에 참관했을 때였다. 아레인 경은 언뜻언뜻 꿀이 떨어질 것처럼 다정한 얼굴로 그녀가 검술 훈련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 표정을 오래 드러내지 않았다.
엘리제처럼 아예 작정하고 치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잘못 보았나 할 정도로 찰나였다. 검술수업을 참관하며 엘리제가 알게 된 것이 또 있다. 무뚝뚝한 줄로만 알았던 헨리 공작은 제일 말이 많았다.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는지 모를 정도의 수다쟁이였다. 본인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힘들어서 지금까지 연회에 나오지 않은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엘리제는 기초 검술 훈련 막바지였고 공주는 막 끝낸 듯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땀에 젖은 셔츠가 살갗에 달라붙어 얼마나 남들의 시선을 끄는지도 모른 채로 말이다.
옆에서 아레인이 공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잠시 그렇게 보는가 싶더니 근처에서 타월을 얻어와 물에 적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샬리 공주의 손을 아주 조심스럽게 닦아 내리더니 그 위로 자신의 포켓에서 꺼낸 연고를 조심스럽게 바르고 있었다.
얼마나 정성스러운지 보고 있던 엘리제의 몸이 배배 꼬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붕대로 다시 또 조심스럽게 감고 다시 새 타월을 적셔 땀에 젖은 그녀의 얼굴을 귀 뒤쪽까지 꼼꼼히 닦아 내었다.
저게 연인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이쯤 하면 그들이 연인이라는 걸 확신했으니 엘리제는 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목검으로 장난치며 노는 꼴이 못 봐 줄 지경이었다. 엘리제가 마법으로 만든 소문은 그 뒤로 암암리에 궁을 휩쓸며 퍼져나갔다.
하급 마법사를 무시하지만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일이 많았다. 하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고, 찾지도 못했다.
아마 마법사가 추적했다면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마력 파장으로 인해 내가 심어둔 하녀는 들켰을 것이다. 하지만 소문은 입으로만 전달된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라 마법과 전혀 연관이 없었으니 그들은 범인이 시중인들 중 하나라고 착각했으며 그들 중 마법을 쓸 수 있는 자가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특히나 황궁은 사람을 잘 바꾸지 않는다. 대부분이 믿을만한 사람들이니 더더욱 찾기가 어려울 터였다. 가끔 아슬아슬할 때면 환영 마법으로 빈틈을 메꾸었다. 흔적이 남겨져 있는 곳을 보지 못하게 말이다. 엘리제가 못할 때는 하녀에게 시켰다. 귀찮았지만 서두른 만큼 제대로 해야 했다.
그러나 결국 실수를 하고 말았다. 환영 마법으로 쪽지가 날아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너무 급하게 만들어서 마법 수식에 오류가 있었는지 환영 마법이 걸리지 않은 것이다. 샬리의 방에 누워있던 엘리제는 실패한 마법이 작동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차라리 쓰러져 버릴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방문 너머에 열린 문으로 황제가 오는 것을 보았다. 한참 뒤에 왔어야 할 사람이 마법 실패로 일찍 와버렸다. 그는 엘리제가 있는 쪽의 침대에서 바로 보였다. 그녀는 어차피 들킨 거 시선이라도 끌어보자 싶어 샬리 밑의 샹들리에에 눈길을 주었다.
황제가 도착함과 동시에 아레인 경이 샬리를 끌어안고 떨어지는 샹들리에를 피했다. 기대하지 못했던 효과가 있었다. 아레인이 그녀를 꽉 안고 있는 것을 보는 황제를 즐거운 눈으로 관찰했다. 엘리제는 조사실로 들어가기 전 하녀에게 독침을 건네었다. 그녀의 등 뒤에 꽂아주고 마지막 협박을 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