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68
과한 충성이 도리어 선을 넘어 비극을 초래한 경우였다. 중죄 중의 중죄로 취급되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가 내리는 처형이 정당성이 있었으므로 나도 이 일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카샤는 더욱 바빠졌다. 왕국과 가문과의 결혼 중계를 서야 하기 때문이었다.
“백작가가 불만이 많은가 봐요. 황비 자리를 약속받고 진행했다고 들었는데 말이죠. 그게 무용으로 돌아가고 장남만 잃게 생겼으니. 그러게 왜 말도 안 되는 자리에 욕심을 냈을까요?”
티나는 정말 알 수 없다는 듯 내 머리칼에 비녀를 꽂아 넣으며 말했다. 그렇게 한동안 잠잠해지나 했던 황궁에 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내가 투기를 해서 엘리제의 황비의 황궁 입성이 취소되었다는 소문이었다. 물론 내 근처에서 일을 보는 시중인들은 이 말을 믿지 않았지만 모든 황궁인들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디는 다시 소문을 단속하고 그 출처를 알아달라고 암영조에게 요청을 넣었다. 그러나 참 이상하게도 그 소문을 전달한 자들은 있어도 최초로 퍼트린 자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갈수록 머리털이 쭈뼛 솟는 기분이었다. 독사 칼립타와 서약서의 복사범과 소문을 내는 사람이 동일인물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체 누굴까. 라이도 나를 찾아와서 걱정하기 시작했다. 사교계에도 안 좋은 소문이 돌게 되면 큰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요즘 자신도 엘리제와 같이 다니지 못했더니 둘 사이의 불화 소문이 돈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우리 셋을 이간질하려는 걸까. 셋이 뭉쳐있을 땐 사교계에서 정말 우리를 건드릴 사람이 없었다.
내가 오기 전에도 라이는 사교계에서 굳건했으니 나와의 사이를 이간질한다고 사교계를 집어삼킬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그렇다면 나를 고립시키려고 하는 걸까? 엘리제와는 연락이 도통 되지 않았다. 그녀의 오빠가 타국으로 가게 되어 슬픔에 잠겨있어 누구의 방문도 받지 않는다는 소식만 돌아왔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가문이 다른 귀족의 흉계에 빠져 오라버니를 빼앗기는 기분이지 않을까. 그녀에게 위로를 전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그녀가 읽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소문이 매우 신경 쓰였으나 다르게 생각하면 고작 소문일 뿐이었다.
“폐하께 말씀드려보는 건 어때요. 공주님?”
“안 그래도 바쁠 텐데 쓸데없는 고민거리만 안겨주는 것 같아서.”
그가 여유가 나면 한번 말해보려 했으나 요즘 그는 밤늦게 들어오곤 했다. 내가 기다리다 잠들면 들어올 때도 꽤 많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매우 피로한 기색이었다. 여긴 비타민C를 정제할 수 있는 기술이 없으니 좀 아쉽네. 대체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여기도 인삼이나 가시오가피가 있나, 까지 생각했을 때 티나가 나를 조심스레 불렀다.
“공주님, 이제 다른 소문이 돌아요.”
“또? 내가 엘리제랑 싸우기라도 했대?”
“그게 아니라….”
티나가 근처에 서 있던 아레인을 힐끔거렸다. 그녀는 곧 귓속말로 내게 말을 전했다.
“아레인 경과 소문이 났어요.”
“뭐어?”
이제 헛웃음이 나왔다.
* * *
“그런 소문이 돈다구요?”
라이가 깜짝 놀라 반문했다.
“정말 이상하네요. 소문의 출처는 알 수 없는데 계속 돌고 있으니. 사실 사교계에서도 안 좋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요. 우리 세 명이 불화가 일었다구요. 엘리제가 왜 자택에서 스스로 근신하는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텐데, 우리가 엘리제를 괴롭히고 박대했다는 소문이 나고 있어요.”
“흐음, 우리가요?”
“네. 그 외에도 몇 가지 많지만 제일 크게 도는 소문이 이거예요. 공주님 말처럼 출처가 명확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크게 믿고 있진 않지만 재밌는 가십거리이긴 하잖아요. 계속 퍼지고 있어요.”
“다른 소문은 어떤 것들이 있는데요?”
“엘리제의 성격이 매우 예민해서 어울리기 어렵다는 소문이요. 아까의 소문과 반대가 되는 소문인데, 까탈스러운 성격을 우리가 감당하지 못해서 지금 우리 사이가 이렇다는 거죠.”
“그 소문은 얼마나 퍼져있나요?”
“아까 말씀드린 소문과 비교하면 한 줌도 안 돼요.”
내가 생각에 잠기자 라이가 나를 조심스레 불렀다.
“공주님, 엘리제를 의심하시는 건 아니죠?”
“내가 왜 엘리제를 의심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그녀가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뗐다.
“부끄럽게도 처음에 엘리제한테 의심을 품긴 했어요. 우리랑 소통도 안 되고 있는데 안 좋은 소문만 나고 그것도 우리 둘의 안 좋은 소문이 훨씬 많이 편중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소문을 퍼트린 자가 원하는 게 그게 아닌가 싶더라구요. 그렇게 서로를 의심하면서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거요.”
“일리는 있군요.”
“우리가 엘리제와 갈라지면 그다음은 공주님과 제 사이를 갈라놓으려 할 거예요. 일단 엘리제가 나올 때까지 좀 더 기다려 봐요.”
라이가 내게 건넨 제안은 딱히 와닿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엘리제를 의심하고 있었다. 왜 그녀는 우리와 연락이 되지 않고 소문도 그녀에게 동정심을 일으키는 소문만 과다하게 퍼졌을까. 특히나 아레인과의 소문은 아예 없는 일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각색되어 둘의 사이를 의미심장하게 만든 것이다. 내가 아레인의 옆구리를 목검으로 찔렀던 적이 딱 한 번밖에 없었다. 그날은 엘리제가 같이 참관하고 검술수업을 받던 날이었다.
소문은 이러했다. 친위대 연무장에서 나와 아레인이 서로의 몸을 목검으로 툭툭 장난치며 놀기도 하고 쓰다듬기도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소문은 절찬리 팔리고 있었고 억지로 막아도 장작에 불탄 듯 번지고 있었다. 이러다 황제궁까지 소문이 넘어가겠다 싶었으나 차라리 그냥 놔두자 싶었다.
소문을 들은 카샤가 무시하면 그것대로 나도 무시로 대응할 것이고 그가 잡으러 나선다 해도 좋았다. 소문이 담벼락을 넘어 황제궁에 도착했을지도 모를 며칠이 지났다. 그래도 카샤는 별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안쓰러운 마음에 그의 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렇게 피곤하면 일을 조금 맡기는 건 어때요? 저번에도 보좌관들한테 맡기고 그랬잖아요.”
“그날 맡긴 거 내가 다시 다 처리했어.”
그가 생각만 해도 화나는지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나는 그 주름을 꾹꾹 눌러 피며 말했다.
“요즘 카샤 얼굴을 자주 못 보니까 얼굴 까먹겠어요. 봐도 이렇게 피곤해 보이니까 얼마나 안쓰러운….”
“안 돼. 까먹으면.”
그가 피곤한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당신이 보기에 못 믿을 사람이에요? 전부다?”
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거부반응이 먼저 일어나. 내가 확인 안 하면 걱정도 되고.”
딱 워커홀릭이구만. 그 시종장에 그 황제라고 해야 하나. 그를 물끄러미 보며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는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얌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몸은 튼튼한데 정신적인 피로도가 큰 것 같으니 역시 일을 줄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아무튼 그는 바쁜 와중에도 소문을 듣긴 했을 거다. 그런데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으니 나도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언젠가는 다른 유행 타는 소문으로 옮겨가겠지 싶어서.
* * *
엘리제와 드디어 연락이 닿았다. 그녀는 파리하게 안색이 질려 있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태위태해 보였다. 한 떨기 꽃이 금세 져버릴까 노심초사하게 되는 심정이었다.
“엘리제, 괜찮아 보이지 않아요. 이렇게 나와도 되는 거예요? 볼 수 있어서 좋아했는데 지금 너무 안 좋아 보이는걸요.”
걱정하는 목소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라이도 엘리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세상에, 엘리제. 식사도 거른 거니? 이 팔뚝 좀 봐. 이러다 기아가 될지도 몰라.”
그 말에 엘리제가 희미한 미소를 했다.
“저와 연관된 소문으로 고생하셨다는 소리를 들으니 방안에만 있을 수 없었어요.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텐데 이렇게 내치지 않으셔서 정말 고마워요. 라이, 너도 믿고 기다려줘서 정말 고마워.”
그녀가 힘없는 목소리로 조용조용 얘기했다.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결국 티타임을 일찍 끝내기로 하고 일어서는데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엘리제가 픽 쓰러진 것이다. 근처에 있던 아레인이 얼른 그녀를 받았다.
“정말 쓰러져 버렸네요. 마음고생이 정말 심했나 봐요.”
라이도 깜짝 놀라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아레인, 그녀를 손님방에 데려다주세요.”
아레인이 그녀를 손님방 중 한 곳에 내려놓았다. 내가 엘리제가 깨어날 때까지 보살피기로 하고 라이는 먼저 돌아갔다. 엘리제는 몇 시간 뒤에 깨어났는데 나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제가 쓰러진 건가요?”
“티타임을 끝내고 돌아가려는 차예요.”
그녀가 미안한 표정으로 내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공주님. 폐를 끼쳐드렸네요.”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아레인이 내 몸을 안고 빠르게 뒤로 물렸다. 영문을 몰라 아레인을 바라보는데 내가 있던 자리의 천장에서 무겁게 달려있던 샹들리에의 한 축이 뚝 하고 떨어졌다.
파사삭 깨지는 소리에 그 방에 있던 티나를 비롯한 시녀와 하녀 모두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엘리제는 입을 가리고 놀라 나를 바라보았으나 그녀 주위로 파편이 튀었는지 손등에 생채기가 나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십시오. 움직이는 즉시 목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겁니다.”
아레인이 나를 꽉 끌어안은 채 날카롭게 외쳤다.
“그러는 게 좋겠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하자 문가에서 카샤가 굳은 채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카샤가 제게 오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아레인의 말대로 숨소리조차 삼키는 게 좋을 거다.”
아레인이 팔에서 힘을 풀자마자 빠져나와 그에게 다가갔다. 몇 걸음 남지 않은 상태에서 그가 나를 확 끌어당겼다.
“쥐새끼가 들어와 있었군. 루이. 이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고 마법을 쓰는 자가 있는지 조사해.”
아. 나는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폐하, 엘리제는 티타임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쓰러졌어요. 몸상태가 좋지 않아요.”
그가 엘리제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예외는 없다.”
그리고는 나를 데리고 빠르게 방을 나왔다. 달리아 궁의 침실로 데려와 나를 앉힌 그가 나를 빠르게 살피기 시작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카샤. 어떻게 이 시간에 온 거예요?”
내 말에 그의 입술 한쪽이 비죽 올라갔다. 그가 내게 쪽지 같은 것을 내밀었다. 쪽지의 내용은 샬리오니 공주가 현재 위험에 처해있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나를 꽉 끌어안더니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대와 아레인은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갑자기 아레인이 왜 튀어나오지? 소문을 이제야 들은 건가.
“소문을 듣고 그러는 거라면 당연히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알아. 그런데도 생각이 자꾸 그쪽으로 가. 방금도 아레인이라면 충분히 당신과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날 수 있었어.”
“벗어났는걸요? 저는 아무 피해도 입지 않았어요.”
“그렇게 안지 않아도 되었었다고.”
그가 말하며 더 꽉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대도 떨어지지 않고.”
“위급한 상황이었잖아요. 나도 놀라고 정신없어서 아레인이 안고 있는지조차 몰랐어요.”
“정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