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67
물론 손가락 말고 목검 손잡이 부분으로.
카샤같이 검으로 단련된 사람들은 몸이 단단해서 내 손가락으로 찌르면 손가락만 부러지고 말 거라는 걸 체득했기 때문이었다. 내게 옆구리를 찔린 아레인이 크게 튀어 올랐다. 항상 침착하던 아레인의 모습만 보다가 그 모습을 보니 너무 웃겨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옆구리를 부여잡고 몇 번 쓸더니 허탈한 웃음을 내비쳤다.
“샬리, 그렇게 남자 옆구리 막 찌르면 큰일 납니다.”
드디어 평소의 아레인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래서 목검 손잡이로 찔렀잖아요. 손가락이었으면 분명 부러졌을걸요?”
“손가락이든 목검 손잡이든 같습니다. 막 찌르면 저는 두 배로 갚아줍니다.”
그건 불공평했다. 저 딴딴한 옆구리와 내 말랑한 옆구리. 어느 쪽이 치명타일지는 안 봐도 빤한데 두 번이나 찌르겠다고?
“알았어요. 한 번만 봐 줘요.”
내가 투덜거리자 그가 미소 지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됐지 뭐.
“샬리!”
엘리제가 나를 향해 뛰어오기 시작했다. 헉헉거리며 뛰어온 그녀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정말 재밌었어요. 시간 가는 줄 몰랐지 뭐예요.”
엘리제가 오늘 무엇을 배웠는지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헨리가 뒤늦게 응급처치를 서둘러 들고 왔다가 내가 이미 치료를 다 마친 것을 보고 머쓱하게 웃었다. 헨리니까 이해했다. 안 물어봐도 어디선가 누구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깜박했을 것이다.
* * *
오늘은 동대륙의 귀빈들이 제국을 방문하는 날이었다. 우리 제국뿐만 아니라 서대륙 동대륙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라 모두가 우리를 주목하고 있었다, 이번 일도 교류가 트이기 시작하면 두 대륙의 경계가 아마 빠르게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싶다. 티나가 말하길 오늘의 콘셉트는 전설의 뒤안길로 사라진 숲속의 엘프라고 한다.
“정말로 공주님은 엘프의 피가 섞인 게 틀림없어요. 왕비님을 보세요. 그 피기 어디 가는 게 아니라니까요.”
금빛이 번쩍번쩍 빛나는 샛노란 비단으로 만든 드레스는 굉장히 화려했다. 내가 지금까지 입었던 것 중에서 으뜸이라고 추켜세울 정도였다.
가슴 부분과 등허리가 이어지는 부분까지 레이스가 한 번 더 겹쳐져 있었는데 이 부분을 작은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엮어 빛을 따라 아름답게 빛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값이 어마어마한 드레스였다. 내가 생각한 숲속의 엘프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정말 콘셉트가 엘프 맞아? 엘프들이 이렇게 휘황찬란한 드레스를 입었을 것 같지 않은데.”
“공주님은 엘프들의 여왕이니까요. 평범한 엘프들과는 차원이 다르죠.”
엘프 여왕도 이렇게 안 입었을 것 같았지만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오늘도 티나에게 맡기면 예쁘겠거니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반응은 카샤를 보면 잘 알 수 있었다. 그는 오늘 나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연회를 최대한 줄여야겠어. 안팎으로 내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군.”
그가 체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연회를 줄이면 어떻게 해요. 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만남의 장이 형성되는 곳이 황궁 연회밖에 없는데요.”
“그냥 하는 소리야. 신경 쓰지 마라. 그래도 귀찮거나 아플 때면 굳이 나올 필요는 없으니까….”
대부분의 연회가 국가행사와 연관되어 있는데 귀찮으면 나오지 말라니 정말 엉뚱한 소리였다. 우리가 연회장에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향했다가 흩어졌다. 왜 그런지는 이제 익숙했다. 리트리스 왕국의 사절단들은 미리 와서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외교 문건은 이미 어제 제국과 처리가 끝났다고 들었으니 오늘의 연회는 외교가 정식으로 성사되어 축하하는 자리였다. 각 대륙 간의 단절을 깨부수는 단초가 되는 협정이었으니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남달랐다. 사절단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리트리스 사절단과 딱히 마주칠 일이 없었으니 오늘 처음 마주하는 것이었다.
“프레타스 제국의 황제를 뵙습니다.”
사절단의 대표자는 온몸에서 카리스마가 넘치는 여성이었다. 여기사가 딱 그러할까. 짙은 흑발에 시원한 이목구비가 그 분위기에 한몫하고 있었다.
“폐하, 옆에 계신 아름다운 여인이 누구인지 소개받을 수 있을까요?”
그녀의 말에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미사여구는 붙이지 않는 것이 더 좋을 뻔했으나 사절단으로 처음 온 그녀가 그 사실을 알 일은 없었다.
“리노아 왕국의 샬리오니 롯트 리노아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리트리스 왕국의 포 데 세이라입니다. 세이라 불러주세요.”
그녀는 말투조차 호쾌했다. 나는 홀린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와…. 멋있다.”
나도 모르게 말이 흘러나왔다. 나는 가끔 본연의 카리스마가 넘치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빼앗기곤 했다. 카샤가 그 대표적인 예였으며 눈앞의 여자도 만만치 않았다. 소개에 따르면 그녀는 리트리스 왕국의 왕족이었다. 아무래도 대륙 간의 첫 외교 행사다 보니 왕족이 직접 온 것인가?
“여기 와서 멋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군요. 감사합니다. 샬리오니 공주님도 매우 아름다우시군요.”
그녀가 내 손등을 들어 올리자 카샤가 옆에서 손을 낚아챘다.
“미안하지만 허락할 수가 없군.”
그가 북풍한설처럼 차가운 어투와 표정으로 그녀를 대했다. 언제 이렇게 분위기가 바뀌었지? 내가 당황해서 세이라를 힐끔 바라보자 그녀가 짓궂은 표정을 했다.
“질투가 굉장히 많으신가 봅니다. 저한테도 그러시는 걸 보니. 너무 그러시면 샬리오니 공주님도 금방 질릴지도 모르니 조심하세요.”
그녀가 말을 끝내고 호탕하게 웃었다. 헉. 카샤만큼 직설적인 사람이야. 둘이 거울 아니야? 거울…. 이번에는 카샤가 나를 원망스러운 눈을 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음. 저 상태 그대로 두면 왠지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연주가 시작되어 나는 카샤를 댄스홀로 이끌었다.
내가 끌어당기자 끌려오긴 하는데 영 미적거린다. 잠시 멈추고 위를 올려다보자 그도 멈추어 나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원망스러운 눈초리에 이번에는 입까지 조금 튀어나와 있는 것 같다. 뭐가 단단히 마음에 안 든 게 분명한데. 춤을 추며 그에게 물었다.
“카샤, 뭐 때문에 그러는지 말해줘요.”
“…….”
그는 대답 없이 춤만 추었다.
“숨기는 일 없기로 했잖아요.”
그가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나 스스로 이걸 말하자니….”
“뭔데요?”
내가 채근하자 다시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내가 제일 멋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 내가 세이라에게 멋있다고 중얼거린 소리를 듣고 그러나 보다.
“세이라한테 멋있다고 해서 그래요?”
“홀린 것 같던데.”
“사람이 멋있으면 홀릴 수도 있죠.”
내가 인정하자 그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홀리는 거랑 좋아하는 건 다르잖아요. 그냥 첫인상이 좋아서 감탄사가 나온 것과 다름없어요.”
그래도 그의 표정은 펴질 줄을 몰랐다.
“내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누구예요.”
“나.”
대답도 잘하면서 왜 그래.
“그럼 세이라 신경 쓸 필요 없죠? 내가 신경 쓰는 사람은 당신뿐이잖아요.”
마지막 말은 어째서인지 도리어 그를 자극한 꼴이 되었다.
“나 말고도 신경 쓰는 사람 많지 않나.”
그가 그렇게 말하니 그렇긴 한데….
“이성으로 신경 쓰는 사람은 한 명뿐이에요.”
“그래. 그대의 침실에 누울 수 있는 것도 나뿐이지.”
“그, 그렇죠.”
또 노골적인 대사를. 누가 들었을까 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금 바로 갈까?”
그가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이제 방금 연회장에 왔는데 바로 가자구요?”
“원래 황제가 연회장에 끼면 분위기가 죽는 법이야. 빨리 사라져 줘야지.”
그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했다. 그렇긴 하지. 아무도 상사를 반기지 않으니까. 파티를 제대로 즐길 수가 없을 것이다. 그가 나를 이끌며 빠르게 댄스홀을 벗어났다. 왠지 오늘은 집요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연회장을 벗어나는데 멀리서 우리를 발견한 세이라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도 마주 흔들어주려고 손을 올 리자 그가 내 손을 잡아챘다. 왠지 세이라가 웃음을 참고 어깨를 들썩이는 것 같다. 멀리 있어 정확하진 않지만 어쨌든 그래 보였다.
* * *
외교도 연회도 성공적으로 끝난 뒤 며칠이 지났다. 리트리스 왕국에서 보낸 서신으로 인해 제국이 발칵 뒤집혔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었다.
“리트리스 왕국의 여왕님이 루스타인 백작가의 장남에게 청혼서를 넣었대요. 부마로요.”
“어떻게 그렇게 된 거지?”
“사절단으로 오신 세이라 님이 보시고 첫눈에 반하셨나 봐요. 차기 여왕 후보라 하니 나쁜 조건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제국을 떠나야 하고 백작가도 포기해야 하니 고민이 많은가 봐요.”
어쩐지 그녀의 카리스마가 넘치던 모습이 이해가 갔다. 지배자로서 풍기는 면모였던 것이다. 차기 여왕 후보라 했으니 납득이 가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나저나 루스타인이면 엘리제 가문인데, 엘리제의 오빠에게 반하게 된 거네?
여왕님 성격 한번 화끈하시구나. 바로 청혼서를 넣다니. 국가 간의 교류라 청혼서는 먼저 황궁에 도착하였다고 들었다. 시일이 좀 지난 후 결국 백작가의 장남이 리트리스 왕국의 부마로 가기로 결정되었다 들었다. 다른 귀족들이 백작가를 압박했다고 하니 썩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대륙 간 교류의 희생양으로 선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후계자로서 교육을 다 받은 장남을 데려간다고 하니 속이 쓰릴 것이다. 또 다른 소문으로 듣자 하니 장남이 내키지 않아 했다 하였으니 조금 걱정되긴 했다. 루스타인가는 그 때문에 한동안 매우 바빠 엘리제를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그런데 황궁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조만간 황궁에 황비가 들어온다는 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 말도 안 되는 소문에 코웃음을 쳤으나 소문은 도무지 사라질 기미 없이 점점 구체화 되어 가고 있었다.
그 황비로 들어올 예정자가 엘리제라는 것이다. 나디가 더 이상 확실치 않은 소문을 퍼트리는 이를 엄벌에 처한다는 공문을 띄우고 나서야 잠잠해지긴 했으나 영 기분이 이상한 것은 사실이었다.
대체 왜 그런 소문이 돌았을까. 루스타인 백작가는 바빠져 라이도 엘리제를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라이는 그런 소문은 소문을 낳으니 도는 즉시 바로 막아야 한다고 했다. 그녀를 보낸 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 싶어 결국 카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아, 그 소문 말이지. 신경 쓰지 마라. 헛소문이다. 당연히.”
“어째서 그런 소문이 났을까요?”
“귀족 중에 루스타인 백작가에게 허영심을 불어넣은 자들이 있는 모양이더군. 리트리스 왕국과 결혼하게 되면 내가 그녀를 황비로 들일 거라고 한 모양이야.”
“그거 황족모독죄 아닌가요?”
황제의 생각을 예단하다니 중죄 중의 중죄였다. 더군다나 황제의 허락도 없이 황비의 자리를 언급하다니 말이다.
“걱정 마라. 다 처리했으니. 그대는 더 이상 이 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쓰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대가 별로 알고 싶지 않은 거야. 내일이 그들의 처형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