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66
그녀들을 의심한다기보다는 모든 귀족을 전부 범위 안에 넣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직 칼립타와 복사범을 잡지 못했다. 조사는 지지부진했고 범인은 참 영악한 이었다. 어떻게 암영조와 황실기사단의 수사망을 요리조리 피해갈 수 있었을까. 내 말에 라이와 엘리제가 깜짝 놀랐다.
“샬리! 그대는 가끔 보면 정말 무모할 때가 있어요. 이제 그대의 몸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에요. 좀 더 아끼라는 말이에요. 그것도 그대의 위치에 선 사람들은 책임감의 일종이에요.”
라이가 나무라듯 말을 꺼냈다. 종종 사교계에서 해야 할 행동들도 짚어주기도 하고 이렇게 내가 돌발행동을 할 때마다 기겁하며 내게 한참 설교를 했다. 그게 기만이 아닌 진실로 조언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묵묵히 들었다. 그녀는 천상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귀족 중의 귀족이었다. 그녀의 생각은 카샤와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가령 지금 같은 경우도 그녀는 돌려 말하고 있지만 내가 나서지 말고 내 시중인들이 나를 지키게 하라는 말이었다.
나는 본태가 귀족이 아니라서인지 그들의 말에 크게 공감할 수는 없었으나 그들은 그렇게 태어나 자라왔으니 그들을 설득하려면 한낱 밤을 새우는 것으로도 무리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기로 했다. 내 성의 없는 고갯짓에 라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어떻게 한숨도 저렇게 우아하게 쉬나.
“저도 라이의 말에 동의해요. 그런데 정말 검술로 잡으신 거예요? 정말 대단해요. 샬리가 검을 쓰는 모습 정말 한번 보고 싶어요.”
엘리제가 들뜬 목소리로 검술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전부터 검술을 배우는 나를 부러워했었다.
“며칠 뒤에 하는 검술에 엘리제가 참관할 수 있을지 한번 물어볼게요. 안될 수도 있으니 큰 기대는 하지 말아요.”
“정말이에요? 고마워요. 샬리. 안되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신경 써주니 너무 기뻐요.”
엘리제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렇게까지 발랄한 아가씨가 아니었는데 어지간히 검술에 관심이 많았나 보다. 저러니 안 된다고 하면 엄청 실망하겠는데? 헨리한테 뇌물이라도 먹여야 하려나. 그들과 담소를 좀 더 나누고 티타임을 끝냈다. 그들을 배웅하며 생각에 잠겼다.
대체 누굴까. 심증만으로는 라이와 엘리제가 범인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미끼를 한 번 던져보았을 뿐 별 의미는 없었다. 그리고 무턱대고 의심하고 싶지도 않았고 말이다. 요즘 들어 라이와 엘리제와 좋은 관계를 쌓아가는 중이었다.
“공주님, 엘리제가 재방문을 요청하셨어요.”
티나가 엘리제의 방문을 알렸다. 뭐 놔두고 간 거라도 있나?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딱히 없었다. 애초에 귀족영애는 파우치 말고 뭐 따로 들고 다니는 게 없었다.
“응. 들어오라고 해.”
엘리제가 내게 곧장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엘리제?”
“저, 할 말이 있어요. 둘이서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완전히 둘이서만 이야기할 수 없어요. 내 호위가 근처에 있어야 해서. 하지만 거리를 둘 수는 있어요.”
엘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자리를 이동한 후 엘리제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사실, 아까 티타임에서 샬리가 우리를 조금 의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어? 설마 그게 느껴졌다고? 티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티가 많이 났나. 아니면 나를 떠보는 건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사실 라이는 눈치채지 못했을 거예요. 제가 유난히 그런 걸 잘 느낀답니다. 보기와 다르게 예민한 편이에요.”
그녀가 어색하게 제 콤플렉스를 털어놓았다. 확실히 그녀는 겉으로는 소탈한 면이 많았으니 예민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해요. 엘리제.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딱히 구분을 두지 않고 귀족이라면 누구라도 의심을 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믿지 못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샬리의 입장을 이해해요.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예민한 편이라서 이일이 하루 종일 생각이 날 것 같아서 말을 꼭 하고 싶어서 부득불 다시 찾아오게 되었어요. 샬리가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알겠어요. 무슨 말이든 들을 준비가 됐어요.”
“라이와 내가 결백하다는 걸 알리고 싶을 뿐이에요. 우리는 다른 사람을 그런 식으로 해하는 행동을 하지 않아요. 차라리 앞에서 정정당당히 마음에 안 드는 점을 이야기하죠. 뒤에서 그런 짓은 하지 않아요.”
둘이 뒤에서 수작질을 할 사람들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또 그들이 범인이 아니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라고 확신할 수도 없었고 말이다.
“이일은 제가 천천히 판단하도록 할게요. 엘리제와 라이가 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죄가 없는데 어떻게 처벌을 하겠어요.”
엘리제가 그 말에 폭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라이가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교계에서 라이의 위신이 떨어졌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들을 딛고 올라갈 수 있도록 말이죠. 그래서 라이는 쉽게 사람들의 표적이 돼요. 증거가 없어도 안 좋은 소문에 휩싸이면 사교계는 한순간이죠.”
지금 라이의 사교계의 위치를 지켜달라는 말인가? 지금 우리는 동맹상태였으니 자주 함께 다니고 티타임도 그들 외에는 초대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아마 도와달라는 말이겠지.
“그런 일이 있게 되면 제가 도와줄게요. 나도 받은 것이 많은데 모른 척할 리가 없죠.”
그렇게 입을 싹 닦을 일이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물론 순화한 표현으로 둘러서 말이다.
“샬리, 내 얘기를 들어줘서 고마워요. 사실 내 이런 모습은 라이 말고는 잘 모르는데 이제 샬리도 알게 되었네요. 못난 사람이라고 멀리하지 않을 거죠?”
그녀가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녀의 손을 맞잡으니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시간을 뺏어서 미안해요. 다음에는 샬리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들고 올 테니 꼭 초대해주세요.”
그녀는 본래의 명랑한 모습으로 돌아가 작별인사를 건네었다. 예민한 것 외에도 겁도 참 많다 싶었다. 라이는 저런 친구 둬서 좋겠네. 나도 시간이 지나면 저들과 마음을 나누게 될까 싶었지만 라이의 목표가 신성 제국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그전까지 마음을 터놓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일이었다.
“공주님 곧 동대륙의 한 왕국이 제국을 방문한다고 해요.”
테너는 조회에서 나왔던 내용을 취합해 티나에게 넘겨준다. 그러면 티나가 매번 내게 그 내용을 브리핑해준다.
“저번에 우리랑 임시단교를 열었던 그곳이야?”
“아니요. 리트리스 왕국이라고 했어요.”
본격적으로 동대륙의 왕국들과 교류를 하려고 하는구나. 어차피 카샤는 크리하엘을 크게 믿는 것 같지 않았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왕국들은 여전히 동대륙을 꺼리고 있었고 동대륙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방문까지 하다니 외교가 크게 성공적이었나 보다. 외교부 대신은 제냐크 공작인데, 그가 일 처리를 매우 잘하나 보다. 가망성 없어 보이던 동대륙의 왕국과 연결시켰으니 외교의 신이라고 불러야 하나.
오늘은 오전부터 검술 수업이 있었다. 헨리는 엘리제의 수업 참관을 흔쾌히 허락했다. 엘리제가 검술에 관심이 많다는 말에 다른 기사를 붙여 기초 검술 훈련을 해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 말을 들으면 엘리제가 굉장히 좋아할 것이다. 그녀는 줄곧 검술을 배우고 싶어 했으니 말이다.
“샬리!”
예상대로 붕 뜨고 신이 난 상태의 엘리제가 손을 붕붕 흔들었다. 체통 없는 행동이었으나 그녀는, 저번 티타임에 자신을 내보이고 난 후부터 나를 훨씬 편하게 대했다. 그 모습이 나에게도 편히 다가와서 좋았다.
“오늘 기초 검술을 배울지도 몰라요. 괜찮겠어요. 엘리제?”
지금 그녀의 복장은 드레스가 아니라 검술을 배우기 편한 복장이었다.
“정말이에요?”
그녀가 입을 틀어막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입고 나온 거 안 들키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몰라요. 알다시피 아버지는 제가 검술을 배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니까요.”
그녀가 내게 작게 속삭였다. 우리는 친위대 연무장 건물로 이동했다. 그녀는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관람객처럼 구경하기 시작했다.
헨리와 통성명을 나눈 엘리제가 금세 볼이 붉게 변했다. 귀족영애들 대부분이 모두 헨리와 블레인과 말을 하고 싶어 안달이던데 어째 두 남자는 영 관심이 없었다. 헨리는 엘리제와 인사를 나눈 뒤 한 기사를 부르며 엘리제의 교육을 맡겼다. 엘리제는 신이 나서 그 기사를 따라갔다.
“공주님, 요즘 나날이 공주님을 저격하는 악질범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훈련 강도를 높이겠습니다.”
“그런 일 없어도 높일 거였잖아요.”
내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아무 일이 없어도 매일 훈련 강도를 높이는 선생이었다.
“크흐흠. 어쨌든 실력을 향상하려면 그 수밖에 없습니다.”
헨리는 말은 많았지만 정말로 내뱉은 말을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다. 오늘도 지옥 같은 훈련을 마치고 대자로 바닥에 뻗어 버렸다.
“이런, 오늘 손바닥이 많이 터졌는데요. 목검에도 피가 묻었군요.”
헨리가 혀를 쯧 차더니 친위대 건물에서 구급상자를 들고 오겠다 하고 자리를 비웠다. 모든 에너지를 쏟고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잔디에 누워있으니 노곤하게 잠이 살살 오기 시작했다. 이런 곳에서 자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비몽사몽 한 상황에서 눈을 뜨지 못했다.
가만히 반쯤 잠든 상태로 누워있는데 누군가가 내 손바닥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축축한 무언가도 손바닥을 점령하고 있었다. 손바닥 전체를 그리 만든 사람은 곧 천으로 내 손을 돌돌 말기 시작했다.
누구지? 싶었지만 좀처럼 눈이 떠지질 않았다. 누군지 모를 사람은 손바닥의 처치를 끝낸 후, 타월로 내 이마와 목덜미의 땀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타월에 물을 적셨는지 타월이 다녀간 자리가 시원했다. 내 얼굴까지 다 닦아주다니 헨리가 이랬을 리는 없는데 싶어서 눈을 번쩍 떴다. 아까 타월로 내 얼굴을 문지를 때부터 완전히 잠이 깨어 현실로 돌아왔었다. 눈을 뜨자마자 마주친 건 아레인이었다. 아레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레인?”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자, 그가 내게서 몸을 물렸다. 손바닥을 깜박하고 바닥에 짚자 따끔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하얀 붕대에 풀물이 들었다.
“아레인이 처치해 준 거예요? 땀도 닦아주고요?”
“헨리가 빨리 안 오기에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제가 처치했습니다.”
그가 사무적이고 딱딱한 어투로 내게 말했다. 평소의 그의 다정한 말투와 어울리지 않았다. 조금 전의 조심스러운 행동도 그렇고 말이다. 조금 거리감이 느껴졌다.
“고마워요. 아레인. 헨리는 아마 친위대 건물로 가던 중에 다른 사람과 수다 떨다가 까먹었을 수도 있어요.”
내가 웃으며 농담을 건넸지만, 그의 딱딱한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얼마 전부터 우리 사이는 리노아에 있을 때처럼 좀 더 편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것은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그는 여전히 나를 어색하게 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관계도 개선해 볼 겸 그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