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65
1. 소문의 진원
그가 손을 부지런히 옮기며 말을 꺼냈다. 내가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 화나서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얄미우니 착각하게 내버려 둬야지. 두 번이나 반복해서 주무르자 몸이 훨씬 가벼운 것이 느껴졌다. 허리 부분을 누를 때는 다시 악 소리가 나올 뻔했지만, 꾹 참았다. 그는 내가 허리 부분을 누를 때 경직되는 것을 알아챘는지 그 뒤부터는 약하게 힘을 조절했다.
“깨어났으니 궁의에게 진찰을 받는 것은 어떤가.”
그가 다시 조심스럽게 내게 질문했다. 나는 천천히 침대 헤드에 기대앉았다. 도와주려는 그의 손을 찰싹 쳐내자 그가 눈에 띄게 시무룩한 모습을 보였다. 그가 내게 약병을 건넸다. 어제 종일 약병을 봐서 깜짝 놀라 쳐다보니 그가 아차 싶었는지 서둘러 말을 꺼냈다.
“이거라도 먹지. 몸의 회복을 빠르게 도와주는 마법약이다.”
그에게서 병을 받아 들이켰다. 이거 얼마나 꼼짝도 못 하고 누워있어야 하려나. 하지만 걱정은 기우였는지 회복약의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신력처럼 단숨에는 아니더라도 점진적으로 몸의 컨디션이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내 옆에서 어찌할 줄을 몰라 하며 내 수발을 다 들고 있었다.
갑자기 카샤와 첫 키스를 할 때가 생각이 났다. 그때에도 주체하지 못하고 숨도 못 쉬게 몰아붙이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시간 지나면 알아서 조절하겠지. 뭐.
“샬리, 이제 나랑 말도 하기 싫은가.”
그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내 심기를 살피며 물었다. 저런 모습을 처음 보니깐 짠하긴 하네. 이만큼 괴롭혔으면 이제 봐주자. 나는 고개를 젓고 손가락으로 목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기다리라 하고 방을 나갔다. 또 약병을 들고 오려나 하는데 그가 익숙한 색의 액체가 든 병을 가지고 왔다.
“그대가 목에 특히 좋다 하지 않았나.”
그는 엘더베리즙을 내게 가져왔고 그걸 보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의 표정도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엘더베리까지 마시고 나자 다시 급격히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깨어있은 지 두 시간도 안 되었는데. 내가 졸린 눈을 깜박거리자 그가 나를 천천히 침대에 눕혔다.
“회복약 때문에 몸이 피곤한가 보군. 옆에 계속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자.”
티나를 붙여 주고 일하러 가도 이젠 괜찮은데. 흐릿해진 정신으로 생각만 하다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 * *
다시 일어나자 드디어 쨍쨍한 해를 볼 수 있었다. 몸은 굉장히 많이 회복되었다. 수월하게 몸을 움직인 내가 조심스럽게 아, 아 하고 소리 내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목소리도 통과. 회복약, 그거 물건이네. 굳이 신력이 아니더라도 회복약도 효력이 엄청났다. 혼자 고개를 주억이는데 카샤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좀 어때?”
“훨씬 좋아졌어요.”
그가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듣고 싶었어, 그대의 목소리.”
“다음에도 이럴 거예요?”
“아니….”
처음이니까 봐주자. 그런데 그는 할 말이 더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래요?”
“할 말이 있어.”
내가 기다리자 그가 입을 열었다.
“보니, 그 아이. 이번에 신성 제국으로 가게 될 거다.”
뭐라고?
“어째서요?”
“성녀니까 신전으로 돌아가야지.”
그가 내 시선을 피하며 그렇게 말했다.
“이유가 뭐예요?”
“…….”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분명 보니를 제국을 위해 이용할 거라 했으니 같은 맥락이겠지. 내가 보니를 어떻게 챙기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
“그래서 제국이 얻는 이득이 뭔데요?”
“무슨 소리야?”
“보니를 이용할 거라고 했잖아요. 제국에 이득이 있으니 신성 제국으로 보내는 거 아니에요?”
“그냥 넘어가 주면 안 되겠나.”
그가 곤란한 표정으로 얼버무리려 하고 있었다.
“이런 일 있으면 같이 이야기하자고 했잖아요. 이렇게 통보하는 거 말구요.”
“미안하다. 다음부터는 정말 그럴 테니까….”
뭔가를 숨기려는 모습이 보이자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한테 왜 숨기려고 하는 거예요?”
“…….”
“그러지 말고 알려줘요.”
그가 한숨을 내쉬더니 마른세수를 했다.
“신탁이 내려왔다. 너를 신전으로 보내라는.”
뭐? 크리하엘이?
“그래서 보니를 지금 대신 보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보니를 보내는 것이 훨씬 큰일이었다. 아이의 신력이 풀어지고 크리하엘이 보니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할 수도 있는 일인데. 크리하엘이 내게 접근하기 힘들어서 신전으로 오라고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신탁까지 내리며 그럴 리가 없었다.
어쨌든, 무엇이 되었든 보니를 보내는 것은 상황만 더 악화시킬 뿐이었다.
크리하엘에게는 다른 성녀들도 많이 있을 테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아이를 아끼는 것과 별개로 보니를 보내는 순간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보니의 몸을 빌려 나를 찾았던 것처럼 그런 찝찝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카샤는 내 정체를 모르니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를 이해시키려면 내가 누군지 먼저 밝혀야 한다. 평생의 짐처럼 혼자 짊어지고 가려 했던 비밀을 말이다.
나를 밝히지 않으면 그를 설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가 나를 미친 사람으로 치부할까. 이야기를 듣고 그가 나를 받아주면 좋은 일이나 그게 아니라면 혼란만 더 가중시킬 뿐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후자가 될 가능성이 더 컸다. 죽도 밥도 안 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고민 끝에 나는 이야기를 조금 비틀기로 했다. 내 존재를 드러낼 만한 이야기를 숨기는 것이다.
“실은 할 말이 있어요. 카샤.”
그가 의아한 표정이라 계속 말을 이었다.
“투알린에서 보니를 처음 봤을 때 말이에요.”
그도 내가 보니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떼어 내려 했던 기억이 났을 것이다.
“그때 보니의 몸을 빌려 크리하엘이 내게 경고한 적이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이지? 신 크리하엘을 말하는 건가?”
“맞아요.”
“그때 보니는 구속구를 찾고 있었는데.”
“그래서 크리하엘이 힘들다고 했던 기억이 나요. 내게 경고 몇 마디만 하고 금방 사라졌으니까요.”
“그래도 신력이 없으면 신탁을 받지 못…. 아…. 그렇군. 그대 몸속에 신력이 있었어.”
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 사실은 나도 몰랐다. 신력이 없으면 신탁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목소리를 전하는 매개체인 성녀와 신력을 가진 신관이 있어야 비로소 신탁을 전할 수 있다는 말이 되었다.
그러면 나는 신관 대신 크리하엘의 말을 받은 셈이었다. 어쩌면 보니의 구속구 때문에 그가 힘들었을 수도 있지만, 내 몸속의 신력 자체가 적어 힘겨울 수도 있을 일이었다. 둘 다이지 않을까.
“샬리, 그 일은 왜 숨겼지? 심각한 문제야. 지금까지 그 아이와 같이 붙여놓았던 내가 멍청했군.”
“당신이 그럴까 봐 그랬어요. 보니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크리하엘은 보니 몸속에서 힘들어했어요. 그 뒤로 만월의 밤이 갑자기 찾아왔고, 그 뒤로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어요.”
“크리하엘이 그대에게 전한 말이 뭐지.”
보니가 안전에 위협된다는 이야기는 지금 상황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니 일단 넘어가는 것 같았다.
“당신이 벌이는 전쟁을 막지 말라고 했어요. 신이 안배해놓은 유희를 방해하지 말라고 했죠.”
그는 내 말을 믿어 줄까. 신이 유희를 즐기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려 하고 그 매개체로 카샤를 장기 말처럼 쓰려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는 내 말을 듣더니 한참을 생각했다.
“왜 그대에게 전쟁을 방해하지 말라고 한 거지?”
아마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딱히 나라는 존재가 베고니아나 투알린과의 전쟁에서 방해되는 일은 없었을 테고, 리노아는 내가 속한 나라이니 당연히 전쟁하지 말라고 부탁한 것에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런데 크리하엘은 그것 때문에 굳이 힘을 무릅쓰며 구속구로 묶인 성녀의 몸 안에 들어와 친히 내게 경고까지 했다.
그가 보기에 그 당시의 나는 그의 정복 계획을 모르는 상태이니 크리하엘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협박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여기서 사실대로 밝히면 내가 본 소설의 내용을 이야기해야 하고 나 자신이 누군지 밝혀야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 또 다른 폭탄을 터트리는 것은 적합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건 나도 모르겠어요. 그냥 내가 방해된다고 했어요. 아마 내가 당신이 그 뒤로 계획 중인 전쟁을 막을 거라고 알고 있었나 봐요. 실제로도 나는 당신에게서 전쟁을 하지 않기로 약속을 받았잖아요.”
그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수긍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일단 넘어가는 것 같았다.
“보니를 보내지 말아요, 카샤. 그 아이를 보내고 구속구를 풀게 되면 크리하엘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어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당신을 위해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숨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군. 이제 이런 일이 있으면 당신에게 의견을 묻도록 하지. 그대는 내게 더 할 말이 없나.”
그가 확인하듯 물었다. 하나가 더 있었지만 이건 지금 말할 수 없었다.
“해야 할 말이 더 있어요. 그런데 이건 지금 말구요. 나중에 말해줄게요. 지금 상황이 안 좋으니까 해결하고 나면요.”
“얼마나 엄청난 거기에? 그러니 더 궁금하군.”
그가 표정을 풀고 가볍게 웃었다. 웃을 일이 아니건만.
“일단 대신관과 다시 이야기를 나누어야겠어. 그 아이를 보내지 않는 쪽으로 일을 처리할 테니 그대는 걱정하지 마.”
그가 내 이마에 짧게 키스하고 나갈 채비를 했다.
“아직 몸이 다 나은 게 아니니 무리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힘들면 쉬도록 하지. 당분간 검술수업도 쉬는 게 좋겠어.”
“그렇게 할게요.”
그는 나를 빤히 보다가 가볍게 끌어안았다.
“갔다 올게.”
일하는 남편 배웅하는 느낌에 기분이 이상했다. 아직 약혼 중이건만 이러니 신혼부부 같네.
“다녀오세요.”
그가 멈칫하더니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랜만에 여는 티타임이었다. 약혼식 전후로 바빴으니 말이다.
“라이. 신성 제국의 후계자와는 인사를 나누었나요?”
내 말에 라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에요. 샬리.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답니다.”
벌써 우리라고 지칭하는 것을 보니 분위기가 좋게 잘 풀린 모양이었다. 그 말은 그녀가 교황후가 될 가능성도 커진다는 의미였으니 좋은 일이기는 했다. 다만, 그녀가 가는 곳이 크리하엘을 섬기는 곳이라는 것. 딱 그거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보다 달리아궁에 안 좋은 일이 있다 들었어요. 칼립타가 나타났다는 얘기가 소문을 타고 돌고 있어요. 뒤늦게 알게 되어 이제야 걱정을 하게 되네요.”
엘리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 귀족들 입에서는 나에 대한 가십거리가 가장 큰 소문 거리였고 그중에 가장 핫이슈가 달리아 궁에 습격한 칼립타의 존재 여부였다.
“걱정해주어서 고마워요. 검술을 배우다 보니 한 마리는 제가 처리했답니다.”
나는 은근히 그들에게 내 정보를 풀며 미끼를 물길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