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64
느닷없이 튀어나온 소리에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내 근처로 다가온 카샤가 내가 쥐고 있던 자수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복숭아인데…. 나 또한 자수는 엉망인 건가. 아니다. 초보 주제에 너무 난이도를 높은 것을 골라서 그랬을 뿐이다.
나는 카샤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자수를 슬그머니 협탁 뒤쪽으로 보이지 않게 밀었다. 오늘 나랑 시간을 보낸다고 일이 밀렸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가 다시 달리아궁을 찾아왔다. 내 표정을 본 그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보좌관들한테 일을 좀 맡겼어.”
그가 보좌관한테 일을 맡기다니. 누가 들으면 서쪽에서 해가 뜬다고 할 일이었다.
“정말요?”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아뇨, 좋은 일이죠. 나랑 같이 보낼 시간이 늘었잖아요.”
보좌관들은 그동안 카샤에게 꽤 신뢰를 얻은 모양이었다. 그의 일에 대한 결벽증이 조금은 줄어든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나름대로 발전하고 있는 건가? 마주 보며 미소 짓는데 카샤가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저 아이, 빨리 내보내.”
보니의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 아직도 아이라고 부른다. 내 옆에 잠들어 있는 보니한테 귀여움이 하나도 안 느껴지는 건가. 나중에 태어날 우리 아이도 저렇게 관심이 없으면…. 그 생각까지 닿자 책 속에서 그가 황태자를 방치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건 책이니까…. 나랑은 다르겠지. 지금만 봐도 카샤는 전쟁을 그만두었고 우리는 계속 좋은 관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지 않은가.
“자고 있는데 어떻게 그래요?”
“지금 당장 깨워.”
그가 살벌한 눈으로 보니를 주시했다.
“왜 그래요? 아이한테 너무 심해요.”
“저 자리 내 자리야.”
네…? 내가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자 그는 뻔뻔한 얼굴로 보니를 가리켰다.
“내가 깨울까?”
나는 할 수 없이 보니를 흔들어 깨웠다. 보니가 눈을 부스스 뜨더니 나와 카샤를 번갈아 보았다. 눈을 잠시 비비던 아이는 카샤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침대에서 내려갔다. 그리고는 우리를 향해 꾸벅 인사하고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가버렸다. 보니가 눈치가 빨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는 하녀를 불러 침구를 모조리 갈도록 지시했다.
“그대 옆에 누워야 할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었나?”
그가 엄한 말투로 나를 다그쳤다. 보니는 아이인데…. 지금 아이한테도 질투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점점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이잖아요.”
“아이를 떠나서 그대 옆에 누울 자격이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지.”
그의 표정이 굳어있어 그 말도 심각하게 느껴졌다. 저렇게 진지하게 나오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알겠어요. 당신 말대로 할게요.”
그제야 그가 표정을 풀었다. 별것 아닌 것에도 분위기를 잡는 것이 얄미워 나는 한마디를 더했다.
“그래도 나중에 우리 아이가 엄마 옆에 눕는다고 하면 당신은 2순위인 거 알죠?”
“우리… 아이?”
음, 예상치 못한 다른 곳에 꽂힌 것 같은데?
“그럼 아이 안 만들 거예요?”
“아니, 만들어야지.”
그가 잠시 서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 돼. 본래 황족들은 태어날 때부터 유모한테 맡기고 따로 생활하는 법이다.”
저놈의 고집불통.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결국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텐데. 지금 하는 말은 아무 의미가 없었으니 논쟁은 이쯤에서 접어두어야지 싶어 말을 말았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이미 침구는 전부 교체되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죽 잡아당겼다. 품에 가만히 안겨있자 그가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미소를 흩뿌리며 나를 유혹했다.
“아이는 나중에 만들고, 지금 우리는 사랑을 나누도록 하지.”
“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게 그게 맞나? 이렇게 갑자기? 내가 쨍하니 굳어버리자 그가 나를 품에 안아 들고 침대로 이동했다. 정말로…? 아직 해도 안 졌는데.
“지금은 너무 밝고, 또 시간이 이르기도 하고…아직 씻지도 않았고….”
내가 횡설수설하자 그가 고개를 늘어뜨렸다.
“시간이 무슨 상관이지? 씻고 싶으면 지금 같이 씻을까.”
“아니요!”
아직 서로 오픈도 안 했는데 같이 씻다니! 내가 기겁하자 그가 웃으며 줄을 당겨 시녀를 불렀다. 티나가 다가오자 카샤가 그녀에게 지시했다.
“내 피앙세가 준비하고 싶다고 하니 시중을 들어라.”
내 얼굴이 화르륵 빠른 속도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카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을까? 그가 일어나더니 달리아궁의 욕실로 향했다. 티나는 충분히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재빠르게 나를 일으키더니 다른 욕실로 나를 이끌었다. 그 와중에도 다른 시녀들과 하녀들을 눈짓으로 데려오는 걸 잊지 않았다.
“공주님, 아시죠? 피임약이요. 여전히 협탁 옆에 있으니 사용하시는 거 절대로 잊지 마세요.”
“으응…. 유효기간이 하루라고 했었나?”
“네, 그 정도면 충분할 거예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티나가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루 넘게 안 나오실 거면 제가 가져다드리구요.”
좀 적응되었나 했더니 역시나 부담스럽긴 했다. 연인, 부부의 사정을 다른 사람들이 훤히 꿰뚫고 있다는 것이 말이다.
사생활이 없으니 얼른 이 부분을 포기하긴 해야 하는데. 어렴풋이 생각만 하다 막상 눈앞으로 닥치자 창피하고 부끄러운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욕조에 장미수를 뿌리고 나를 이리저리 돌려가서 광을 낸 그녀가 점잖지 못한 속옷을 꺼내들었다. 매우 본격적이었다.
“그거, 처음부터 너무 그렇지 않을까? 그냥 평소 입던 것으로….”
“절대 안 돼요. 절대!”
그녀는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나를 간절하게 쳐다보았다. 너무 강렬해서 눈에서 광선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애초에 나는 내 드레스와 보석을 고르는 데에 티나를 인정하고 그녀의 역할로 삼아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내가 거부하려 하니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게 이해는 갔다. 나는 포기하고 티나가 주는 속옷을 도움받아 착용했다.
“정말 완벽해요.”
뭐 예쁘겠지. 나는 굳이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보지 않았다. 혼자 있었으면 모르겠으나 여전히 주변에 사람이 있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 짧은 시간에 머리칼에 오일을 윤이 나게 바르고 어깨 부분에 부분적으로만 향유를 발랐다.
“왜 어깨에만 바르는 거야? 차라리 안 바르는 게 낫지 않을까?”
“폐하께서 향유를 싫어하실 수 있으니 일부만 먼저 바르는 거예요. 공주님이 나중에 말해주세요. 아무 말씀이 없으셨으면 다음번에는 몸 전체로 바를 거예요.”
그런 거였니.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운…. 티나, 가운!”
이대로 어떻게 침실에 들어가나, 절대 안 되지. 티나에게 가운을 받아 입고 들어가자 그는 이미 침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는 아직 덜 마른 채 젖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야했다. 아직 저녁도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느닷없이 보내게 된 첫날 밤이었다. 심장이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로 침대로 다가갔다.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 나를 끌어안았다. 한참을 그렇게 끌어안고 있던 그가 내 허리와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내 턱을 부드럽게 당겨 눈꺼풀 코 입술로 내려와 키스했다. 조심스럽게 시작된 키스에 오히려 더 긴장되기 시작하고 손바닥에서 땀이 났다. 그가 입술을 맞댄 채로 허리끈을 풀고 내 가운을 벗기며 천천히 침대로 이동했다.
얽혀있던 혀를 느릿하게 빼고 나를 침대에 눕히려던 그의 동작이 멈추었다. 내가 입고 있는 건 속살이 언뜻언뜻 비치는 시스루 타입의 슬립이었다. 그의 동공이 확장되는 걸 보니 너무 부끄러워서 얼른 침대 위로 기어가 이불을 잡아당겼으나 내 시도는 그로 인해 불발되었다.
“가리지 마. 그러면 더 미칠 거 같으니까.”
기어가던 그 자세 그대로 얼어있는데 그가 내 등을 감싸 안으며 어깨를 미약하게 깨물었다.
그가 목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등을 내려오려 입을 맞추었다. 혼미해지는 정신을 놓치지 않으려 부여잡고 있는데 흐릿한 눈앞으로 협탁에 있는 유리병이 눈에 들어왔다.
피임약! 정신이 번쩍 들어 얼른 그 품속에서 빠져나왔다. 그가 허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에 얼른 협탁을 가리켰다.
“이거 마셔야 돼요. 기다려요.”
그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내가 먹여줄게.”
그가 협탁에서 유리병을 가져와 뚜껑을 열었다. 뽁소리를 내며 열린 피임약을 건네받으려는데 그가 자신의 입으로 액체를 털어 넣었다.
뭐 하는 거야? 내가 놀라 쳐다보자 그가 눈을 반달로 휘며 내 입술 위로 겹쳤다. 그가 하려는 게 뭔지 깨달은 내가 입을 벌리자 그가 액체를 내 입속으로 흘려 넣었다. 하지만 절반이 넘게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도 모르게 울상이 지어졌다.
“이거 효과 하루란 말이에요.”
“계속 먹여줄게.”
그가 아찔하게 웃으며 액체가 묻은 입가를 핥아 내렸다. 왜 저렇게 야하고 난리지. 내가 눈을 감아 버리자 그가 나를 끌어당겨 다시 키스했다. 조심스러웠던 전과 달리 숨이 멎을 것처럼 격렬했다. 그를 꼭 끌어안았다. 짧게 끝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내가 일어났을 때는 밖이 어둑했다.
* * *
눈을 떠 깜박거렸다. 침실 안이 어두컴컴했다. 해가 뜬 오전까지 나를 붙들고 놔주지 않았으니 지금이 새벽일 리 없었다. 그 뒤로 카샤가 입술로 흘려보낸 피임약이 몇 병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대부분이 흘러내려 제대로 받아넘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일부러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다. 뻣뻣하게 굳어 못 움직이는 거다. 여기서 움직였다간 분명 악 소리가 날 게 뻔하다. 검술로 단련된 몸은 연인과의 성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딱 죽을 것 같아 그만하라는 말에도 알겠다. 그만하겠다. 하고도 지켜지는 법이 없었다.
차라리 일찍 기절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부쩍 좋아진 체력은 그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할 만큼 다하고 지쳐서 잠이 들었으니. 아니, 그걸 할 만큼 했다고 할 수가 있나?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그만 자라고 하는데….
눈만 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밤인데 다시 눈 감고 잠을 청할까 싶었다. 뒤처리는 어떻게 했는지 침구도 몸도 보송보송했다. 팔다리를 조금씩 움직이자 약간 욱신거리는 한데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다. 답답해서 잠도 안 올 거 같은데. 아픔을 무릅쓰고 살며시 팔을 크게 움직여보았다.
괜찮은 거 같은데? 조금 욱신거리는 근육통이 있는 것 말고는 크게 아프지 않았다. 방심한 내가 몸을 일으키다 악 소리를 내며 다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침실로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로 있는데 천천히 침대로 올라오는 걸 보니 카샤인 모양이었다. 그가 내 얼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미안한 표정을 했다.
더 미안해해. 더! 나는 표정으로 무언의 뜻을 표명했다.
“정말 곤란하군. 그대를 신관에게 치료받게 할 수도 없으니.”
그가 내 팔을 약하게 주무르며 풀죽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소리 내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 악소리가 났을 때 내 목소리가 쉬어 있어서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팔부터 시작해 뻣뻣한 몸 전체를 정성스럽게 주무르며 풀어주기 시작했다.
“화가 많이 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