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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63화 (63/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63

“폐하께서 리노아의 공주님을 이미 반려로 맞이하지 않으셨습니까.”

“신탁에 적힌 이가 나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해서 리노아의 공주님을 신전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카시카프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확실히 샬리의 몸 안에 신력이 이상한 형태로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바로 찾아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분명 그 일이 아니면 샬리를 찾을 이유가 없다 여겼다.

신 크리하엘은 카시카프의 영역 밖이었다. 제 성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신성 제국 크리하엘로가 아니라 신 크리하엘이 찾는다고 하니 카시카프는 그 강제성을 어떻게 넘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크리하엘로였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우선 대신관이라도 끌어들여야 할 것 같은데. 얼마 전 뻗대던 태도를 꺾어 주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었으니 눈앞에 치즈를 흔들어 줘야 했다.

무려 신탁까지 내림으로서 그녀를 보기 바란단다. 그녀가 온전히 돌아올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의 가능성도 있었다.

“그건 안 될 것 같군.”

“예? 안 되신다니요?”

“해석이 잘 못 되었을 수도 있지 않나. 나나 그녀가 아닐 수도 있으니 하는 말이다.”

“지금까지 해석을 잘못한 적이 없습니다.”

대신관이 얼굴을 굳히며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그리고 말씀드린 김에, 이번에 받은 신탁 때문인지 만월의 밤이 사흘 후에 시작되오니 각별히 신경 써주십시오.”

대신관의 만월의 밤의 저주를 들먹이면서 위세를 떨었다.

“크리하엘도 이제 힘이 다했나 보군. 대신탁도 아니고 그 별거 아닌 신탁을 내리는데도 만월의 밤이 찾아오는 걸 보면 말이야. 요즘 좀 잦지 않았나?”

애초에 카시카프는 크리하엘을 신이 아닌 거래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신탁을 지킬 생각을 거둔 뒤로는 그에게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제국민들이 믿고 있는 종교의 일환으로서 볼 뿐이었다. 척을 지지 않을 정도, 제국의 권력을 넘보지 않을 정도로만 말이다.

“저번에 신성 제국 내에서 받았던 대신탁은 어찌 되었지? 성녀는 찾았나?”

카시카프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느긋하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대신탁은 성도에서 받는 신녀 내림 신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받은 대신탁은 그중에서도 가장 강하게 내려왔다. 신성 제국에서는 반년 전에 역대 중 가장 뛰어난 성녀가 나타날 것이라는 대신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까지 대신탁을 받은 성녀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성녀를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들추어내며 카시카프가 되물었다. 그들은 쉬쉬하고 있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황제가 하고자 하는 말을 눈치챈 대신관이 다급히 말을 꺼냈다.

“그것은 해석을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신탁을 받고 성녀를 찾아갔을 때는 이미 행방이 묘연했다. 애초에 장소를 잘 못 알았던지, 아니면 해석을 잘못한 것이다. 지금 신성 제국은 그 성녀를 찾지 못해 지금까지 비상이었다. 쉬이 드러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더더욱.

“내가 이번에 신전의 울타리 밖으로 벗어난 성녀를 봤는데 말이지.”

카시카프가 눈을 휘며 옅은 웃음을 흘렸다.

“간혹 성녀도 밖으로…. 설마…!”

대신관은 이 젊은 황제가 얼마나 능구렁이 같은지 알고 있었다. 사람을 손에 꽉 쥐고 장난감 가지고 놀 듯한다. 그것도 꽤나 험하게 말이다. 그의 사정거리 안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대신관이 잘게 몸을 떨었다.

“신탁을 받은 성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성녀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신전을 벗어나는 일이 없다. 어쩌다 한 번쯤은 있을 수도 있지만, 평생 신전을 벗어나지 못한 성녀가 부지기수다. 신전에서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마녀라고 꼬투리라도 잡으려는 건가 했던 대신관은 황제가 말하려는 바를 알아챘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나도 우연히 보았지만 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던 참이었지.”

카시카프는 투알린의 감옥에서 갇혀있던 마녀를 보자마자 신성 제국에서 찾지 못한 성녀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은 머리칼 색을 숨기고 샬리의 곁에 있는 그 아이. 아레인에게 투알린을 맡길 때도 일러두었고 말이다. 마녀든 성녀든 카시카프가 알 바 아니었다. 찾으면 그들이 알아서 할 일.

“어디 있는지 알려주십시오. 폐하.”

대신관이 다급히 물었다. 성녀의 위치가 오리무중인 고로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기에 아주 중차대한 일이었다. 지금 신성 제국에서 단연 일 순위로,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그 소문이 조금씩 알음알음 퍼져나가며 신성 제국의 신뢰도가 실시간으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그럼 이번 신탁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찾아가는 게 좋겠군.”

“…!?”

이번 신탁은 대신관 본인이 관리하고 있는 프레타스 제국 안의 신전에서 받았다. 아직 본토인 크리하엘로에 보고가 되지 않은 상태이니 신탁의 주인공만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하면 문제는 없었다.

보고는 자신 말고는 올릴 사람이 없었다. 성녀야 신탁만 받는 허울뿐인 인형이고 말이다. 자신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완전범죄였다. 만약 중요한 신탁이었다면 본토로 신탁이 내려졌을 것인데 그게 아니었으니 신 크리하엘이 이 정도에 노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대신관은 본토의 대성관들이 얼마나 많은 비리를 저지르는지 알고 있었다. 중요한 신탁이 아니라면 본인들이 유리한 대로 해석하여 전하고는 했다. 지금 그가 할 일도 마찬가지였다. 이때까지 청렴하게 살아온 결과가 무엇인가. 이 나이가 될 때까지 본토로 넘어가지 못한 채 대신관에 머물러 있었다.

자신보다 새파랗게 어린놈들이 정치질하며 대성관으로 불리고 있었으니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억울한 점도 많았다. 어찌할지 가늠하던 대신관이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겠습니다.”

신탁받은 이를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만 하면 되는 일. 해석을 잘못했다고 신벌이 내리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해석을 제 입맛대로 비꼬았던 다른 대성관 중에 신벌을 받는 자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신성 제국 전체에 은밀하게 비상이 걸린 성녀를 찾는다면 제 입지가 어떻게 될지는…. 본토의 대성관도 머지않았다. 대신관의 입가에 자연히 웃음이 걸렸다.

* * *

“이제야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것 같다.”

보니의 발목에 얌전히 자리한 새로운 미스릴 구속 팔찌는 내게 큰 만족감을 가져다주었다. 외관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요즘 유행하는 디자인과는 좀 멀긴 했지만 독특한 것이 깔끔했다. 구속구는 나름 심플한 맛이 있는 발찌의 형태처럼 보일 뿐이었다.

“에이솔, 정말 수고했어요. 비용은 달리아궁으로 청구해주세요. 개인적으로 원하는 것도 다 준비했으니 달리아 궁의 파티시에에게 찾아가면 된답니다.”

나는 에이솔을 한껏 칭찬했다.

“저야말로 원하는 것만 잔뜩 얻었으니 아주 흡족한 의뢰였습니다. 이런 의뢰는 얼마든지 환영이에요.”

에이솔이 옆에서 마주 웃더니 서둘러 달리아궁의 주방으로 건너갔다. 옆에서 티나가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보니의 발목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말하기 전까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처음 보니를 데려왔을 때 잠시 발목에 차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빼도 되는지 물어보았을 뿐, 그 뒤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언제쯤 알려줄 수 있으려나. 카샤는 일과 관련된 면에서는 극도로 결벽증이 심한 편이었다. 현재 그가 혼자 맡고 있는 업무만 해도 알 수 있었으며 귀족을 믿지 못해 위협적인 방식으로 귀족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믿고 있는 것은 어릴 때부터 함께 해왔다던 친위대와 암영조뿐이었다. 아 테너까지 포함해서. 그런 사람이니 나는 쉽사리 나와 가장 가까운 티나에게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샬리 언니, 고마워요. 발목이 너무 가벼워요.”

무거운 철구를 매번 한쪽 발목에 차고 있다가 가볍고 튼튼한 미스릴 소재로 바뀌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린아이의 균형 발달에도 좋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 하루라도 빨리 떼어 내는 것이 좋았다.

“샬리 언니, 지금 낮잠 자면 안 돼요?.”

카샤와 이야기가 길어질까 봐 오후수업을 빼놓은 상태였다. 그러니 시간이 비는 것은 맞았지만, 낮잠을 자기엔 좀 애매하긴 했다. 오늘 비는 시간에 샬리오니가 손재주가 나빠서 왕비도 포기했다는 자수를 배워볼 다짐을 하고 있었는데 어찌할까.

“그래, 지금 자러 가자. 언니가 보니 재워줄게.”

아이 먼저 재우고 나는 그 옆에서 자수를 놓아야겠다. 기본적인 것은 티나에게 배워둔 참이었으니 그걸 연습해야겠지. 보니는 기쁜지 활짝 웃으며 얼른 후다닥 침실로 뛰어들어갔다. 오랜만에 달리아궁에 들른 나디가 그런 우리를 보더니 조언을 했다.

“저렇게 너무 받아주면 버릇만 나빠져요. 공주님.”

“역시 그럴까요? 그런데 너무 귀여워서 해줄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과하게 떼를 쓰는 것도 아니라서 거절하기도 어렵고 말이죠.”

“보니가 눈치가 빨라서 그래요. 안될 것 같으면 금방 포기하고, 해줄 것 같으면 공주님한테 조르는 거 모르시죠?”

어, 그랬나? 어린나이에 처세술이 참 빠르다. 이 험한 황궁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정도 눈치는 가지고 있어야 하니 보니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본격적으로 시녀로 키우면 어떨까 싶어요. 성향이 시녀로 아주 딱인데 말이죠.”

“음, 일단 지금도 기본적인 것은 배우고 있다고 들었는데 벌써부터 그러면 애가 힘들지 않을까요?”

시녀도 조기 교육인 것인가.

“사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려도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없는 일이 되는지라….”

그렇긴 하다. 보니의 황궁 내에서의 거취는 데려온 카샤의 권한이 가장 컸으니 말이다.

“일단 제가 카샤에게 한 번 물어볼게요.”

카샤가 보니를 황궁 사람으로 받아주려나. 그는 아이를 언젠가는 제국의 이익에 맞춰 대할 거라고 하였는데. 잊고 있었는데 새삼 보니의 위치가 불안정했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는데 보니가 우다다 뛰어왔다.

“보니, 위험하니까 뛰면 안 된다고 했을 텐데.”

나는 짐짓 엄하게 일렀다.

“잘못했어요.”

보니가 내게 용서를 구하며 귀여운 덧니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요것 봐라. 확실히 눈치가 빠르긴 하다. 내가 진심으로 혼내는 것이 아닌 줄도 알고 봐달라는 듯이 해맑게 웃으니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냐고. 내가 나디를 보자 그녀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니 기다리다 안 와서 다시 온 거야? 얼른 가야겠네.”

곁에서 하녀가 자수 세트를 들고 따라오자 보니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샬리 언니, 안 잘 거예요?”

“언니는 보니 재우고 그 옆에서 자수 놓으려고, 그러다가 졸리면 보니 옆에 누워서 잘 거야.”

보니가 시무룩해하더니 또 고개를 끄덕인다. 이럴 땐 고집을 안 부리지. 타협할 줄도 알고, 크게 될 녀석일세. 우리는 침대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보니 등을 토닥이며 어르자 아이는 금세 잠이 들었다. 나는 쿠션을 세워 반쯤 기대앉아 근처 협탁에 놓아둔 자수 세트를 침대로 가져왔다.

뭘 하지? 난 손재주가 있으니 너무 쉬운 난이도는 넘어가자. 적당한 난이도의 복숭아를 골라 수를 놓기 시작했다. 심기일전하여 자수연습을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금세 가버렸다. 고개를 들자 창문으로 노을이 예쁘게 물들며 방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오랜만에 여유가 묻어나는 오후라 잠시 자수를 멈추고 아무 생각도 없이 한참을 창문을 응시했다. 그렇게만 해도 고요한 시간을 갖게 되는 이 시간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이건, 진주조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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