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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62화 (62/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62

* * *

“폐하께서 아이비를 단시일 내에 처리하실 모양이에요.”

“뭐라고?”

“오늘 조사받으러 황실기사단에 갔던 하녀가 그러더라구요. 조만간 처형될 거 같다구요.”

맹세의 서약서 복사범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조사는 계속 진행 중이었다. 아직 서명되지 않은 맹세의 서약서는 마법으로 복사하기가 쉽다고 에이솔이 알려주었기에 조사는 더 난항을 겪고 있다 했다.

초보 마법사도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좀처럼 범위가 좁혀지지 않았고, 카샤의 집무실을 다녀간 달리아궁의 시중인도 약혼식 날은 없었다는 것이다. 시녀와 하녀들은 중간중간 자주 황실기사단에 불려갔고 그 와중에 들은 모양이었다.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 티나, 폐하께 오늘 점심을 같이하실 수 있는지 물어봐 줄래?”

“알겠습니다.”

티나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카샤가 온 뒤로 티나는 싱글벙글하였다. 신경 쓰게 해서 괜히 미안해졌다. 이전에는 카샤와 나 사이에 일어나는 해프닝이나 사건들이 주변인 모두에게 오픈되어 있다는 것에 거리낌도 있었지만 이제 적응했다. 황제와 결혼하는 이상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오늘은 샬리 언니랑 밥 못 먹어요?”

요즘 보니는 살이 올라 드디어 옷발이 받기 시작했다. 내가 일부러 챙겨 먹이기도 해서 깨작거리던 예전보다 먹성도 훨씬 좋아졌다. 새삼 흡족해진 내가 보니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니가 크게 시무룩해 하며 내 허리를 짧은 팔로 낑낑대며 둘러앉았다.

말하기를 꺼리던 아이였는데 이제 원하는 바도 말할 줄 알고 많이 컸다. 요즘 나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안 떨어지려 하는 걸 보니 독립심을 키워주는 게 좋을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아이 키우는 나디한테 한번 물어봐야지.

“응. 보니는 나중에 같이 먹자. 폐하는 어쩌다 같이 먹는 거니까 보니가 양보해주자.”

“싫어요.”

바닥을 내려다보며 입이 불퉁하게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아이를 보자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벌써 반항기?

“왜 싫은데?”

“나도 샬리 언니랑 같이 자고 싶은데 매일 폐하랑 주무시잖아요. 그런데 점심도 폐하랑 같이 드신다고 하고…. 히잉.”

보니가 말하다 울컥했는지 훌쩍대며 가슴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내가 당황한 눈으로 티나를 바라보자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보니, 뚝! 떼쓰면 돼요, 안 돼요?”

아이는 금세 시무룩해져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꺽꺽거리며 울음을 그치려는 모습에 애잔해졌다.

“그러면 내일 보니랑 같이 낮잠 잘까?”

내일부터 댄스 수업이 없어서 그 시간이 비었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곧 다른 스케줄로 채워지겠지만 그때까지 같이 낮잠이나 자지 싶었다. 그동안 낮잠도 자지 않고 달려왔으니 오랜만에 휴식도 취할 겸 말이다. 보니의 얼굴이 금세 화사해졌다.

“좋아요. 샬리 언니, 진짜 내일 같이 자요.”

“너 울다 웃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엉덩이에 뿔 난다.”

농담했더니 씩 웃는다. 안 속네, 재미없게.

* * *

업무로 바쁜 카샤로 인해 같이 식사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는 쉽사리 다른 이에게 업무를 맡기지 않았다. 나는 사프란과 각종 고급 향신료로 마리네이드 된 스테이크를 잘게 썰며 넌지시 물었다.

“카샤, 약혼식에서 있었던 일이요.”

그가 잠시 멈칫하더니 와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아이비 말인가.”

“아직 화가 안 풀렸어요?”

“그대는 풀렸나?”

나를 걸고넘어진 건 진작 풀렸으나 카샤의 이미지에 악영향을 끼쳤으니 불쾌하긴 했다. 다만, 처형은 아이비에게 과한 형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카샤에게도 좋지 않은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그건 아니지만 처벌을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가 식기를 내려놓았다. 먹는 도중에 얘기해서 입맛이 떨어졌나?

“누가 알려줬지?”

“뭘요?”

“곧 처벌할 거라는 거.”

“저는 알면 안 돼요? 나도 관련이 있잖아요.”

“그대는 이런 일에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나도 모르게 미간이 좁혀졌다.

“당신 옆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인형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가 나를 빤히 보더니 잠시 고민하듯 와인 잔의 기둥을 쓸었다.

“그대는 모질지가 못해. 꼭대기는 언제나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놈들을 쳐내야 하고 잠시도 쉴 수 없는 숨 막히는 곳이지. 내 욕심으로 그대까지 이 정치판에 끌어들였으니….”

“이미 당신 옆에 있기로 한 이상 각오한 일이에요.”

내 말에 그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당연히 물릴 생각은 없다. 내 방식은 잔인하지만, 효과는 좋지. 그렇다고 그대에게 강요하는 게 아니다. 도리어 보지 않았으면 좋겠거든. 그러니 나는 그대가 최대한 이런 더러운 판에서 멀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다.”

결국 아이비를 처형하겠다는 말이었다.

“우리는 곧 부부가 될 거잖아요. 같이 의논했으면 좋겠어요.”

“매번 마주해야 하는 일인데 그대가 질려서 황후 하기 싫다고 때려치울까 봐서 그래.”

그가 체념하듯 불평조로 말했다. 그는 가끔 황제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저렇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할 때가 종종 있었다.

“절대로 안 때려치울게요. 정 원한다면 맹세의 서약서라도 써요?”

그 말에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농담이라도….”

“이제 내 마음 알겠죠? 카샤가 맹세의 서약서에 서명했을 때 내가 어땠을 거 같아요?”

그가 굳어진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상상 이상으로 고통스러운데. 미안해.”

그가 테이블 위로 한 팔을 쭉 뻗어 손바닥을 펼쳤다. 그 위로 손을 얹자 그가 손등에 키스하더니 입술을 묻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식사시간에 이런 우울한 얘기를 꺼내서 미안해요. 그래도 나는 당신이 폭군처럼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게 싫어서 그래요. 처형하지 말고 다른 형벌을 생각해 봐요.”

“알겠다. 정말 운이 좋은 인간이야. 노역으로 바꾸도록 하지.”

한시름 놓자 얼굴이 펴졌다. 식사를 대충 마친 우리는 황제궁 정원의 티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카샤랑 티타임을 가지니 좋긴 한데 바쁜 사람 붙잡고 있는 거 아니에요?”

“오랜만에 해가 떠 있을 때 같이 마주하는 것 같아서 정말 좋은데.”

하긴, 황궁에 온 뒤로 그와 같이 있는 시간이 대부분 밤이었기 때문에 지금이 생소하기 했다. 점심시간을 틈타 짧은 데이트 하는 기분도 나고 좋네.

“나도 좋아요.”

웃는데 돈 안 든다고 내키는 대로 활짝 웃었다. 그런데 좋아할 줄 알았던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정말 무방비하다. 다른 이에게도 그렇게 웃어주는 건 아니지?”

카샤가 멀리 떨어져 있는 아레인을 향해 힐끗 눈길을 주었다.

“웃는 건 다른 사람한테도 이렇게 웃어주죠. 웃음을 어떻게 참아요.”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 대신 당신이랑은 다른 사람들이랑 하지 않는 걸 하잖아요.”

“흠…. 예를 들면 어떤 거?”

내가 입을 열자 그가 손짓으로 막았다.

“아니, 말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주면 좋겠는데.”

이 사람이, 갈수록 능구렁이가 되어가네. 나는 한번 그를 흘겨본 후에 자리를 그의 옆으로 옮겼다. 그가 기대 어린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이렇게 신나있는데 실컷 해 주지 뭐.

그는 앉아 있고 나는 서 있었는데도 우리 시선은 크게 어긋남이 없었다. 내가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가 눈을 감은 채 미소 지었다.

“또?”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위에서 끌어안으니 이건 또 색다르네.

“또?”

그의 잘생긴 이마에 키스했다. 이제 카샤는 기분이 좋은지 웃음을 실실 흘렸다. 마치 한창때의 짓궂고 장난기 많은 학생처럼 천진난만한 모습이 얼핏 눈에 들어왔다. 새로운 그의 모습을 발견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알아갈수록 우리는 더 허물이 없어지고 있었으니까.

“또?”

이러다 또또 병에 걸리겠네.

“이제 없어요. 끝.”

그가 입꼬리를 비죽 올리더니 내 허리를 잡아당겨 그의 무릎 위에 앉혔다.

“아직 안 한 게 많은데 벌써 끝나다니, 샬리.”

나는 그의 양 볼에도 차례대로 키스해 주었다. 그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더니 연속으로 입을 가볍게 맞추었다.

“나는 참을성이 없어서 너무 힘든데, 그대는 안 그런가?”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나며 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나를 빤히 보는 그의 눈동자에서 밑으로 깔린 짙은 욕망이 넘실대고 있었다. 위험신호였다. 이럴 땐 살을 내어주고 뼈를 끊는 수밖에 없다. 눈을 도르르 굴리다가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이거 참 민망하기 그지없는 자세다. 뭐, 지금까지의 행각도 남들이 봤으면…. 왜 이렇게 뒤늦게 부끄럽지.

“이제 안 힘들죠?”

“으음…. 글쎄.”

글쎄 라니. 목에 둘렀던 팔을 풀고 그를 가까이서 바라보자 카샤가 얼굴을 반대로 돌렸다. 뭐야?

“카샤.”

그가 나를 바짝 당겨 힘을 줘 끌어안아서 얼굴이 그의 어깨 뒤로 넘어가 버렸다. 카샤의 귀 뒤로 그의 체향이 확 감겨들자 전신이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얼굴 왜 안 보여줘요?”

“…….”

그의 가슴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낑낑거리는데 밖에서 시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대신관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대신관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괜히 심장이 덜컹했다. 약혼식 때 일 따지러 온 거 아니야? 이제야 얼굴을 보여준 카샤의 얼굴이 조금 붉었다. 내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하며 뒤쪽을 가리켰다.

“황비궁으로 가 있어라. 혹시나 엇갈리며 접촉이 있을 수도 있으니 정원 반대쪽으로 나가고.”

그가 나를 황제궁의 정원 뒤쪽 후원으로 이끈 후 작별 인사를 했다. 잠시간의 어수선함이 있고 난 뒤 누군가 정원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후원 출구로 천천히 이동했다. 어렴풋이 카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신관이 여기까지 무슨 일인가.

-폐하, 신전에서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내가 후원을 거의 다 빠져나오자 티나가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공주님, 나오지 않으셔서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어요. 황제궁 시종이 이쪽으로 바로 나오실 거라 했는데….”

티나가 나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이는데 저쪽에서 드문드문 들려오는 소리가 귀에 박혀 들었다.

4. 신의 부름

카시카프는 대신관이 방문했다는 소리에 샬리오니의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그녀와 대신관이 마주치지 않도록 후원 뒤편으로 그녀를 보내었다. 대신관이 따로 들를 일이 없는데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 카시카프가 시종에게 손짓했다. 시종이 그의 손짓을 보고 대신관을 정원 안으로 들였다.

“크리하엘의 종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대신관이 카시카프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그사이 시종과 시녀들이 조용히 차와 다과를 내왔다.

“대신관이 여기까지 무슨 일인가.”

“신전에서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무슨 신탁이 내려왔기에 나를 찾아온 건가.”

대신관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조심스럽게 신탁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가장 찬란한 성신이 반려자를 찾아왔으니 얼굴을 비추리라.’

카시카프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어쩌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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