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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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으로 누워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이 며칠 동안 쿨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었는데 내 맘대로 잘 안되었다.
나도 모르게 분위기가 처져 있는 것이 드러났나 보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옆에서 안절부절못했을 것이다. 창밖에서 방안으로 스며드는 달빛이 나를 서럽게 했다. 푸르고 어둑한 달빛이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며 눈가를 시큰하게 만들었다.
자자.
빨리 자고 나서 내일 카샤의 집무실로 가서 대화부터 해야지. 피할 수도 있으니 황제궁에 아침부터 쳐들어갈까?
내일 할 일을 골똘히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물먹은 솜처럼 잠이 쏟아졌다. 머릿속이 현실과 분리될 찰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요즘 기감이 발달했는지 작은 소리나 기척에 예민해진 상태였다. 무방비로 잠에 빠져들려고 할 때도 반사적으로 그렇게 몸이 반응했다. 눈을 번쩍 떴다.
암살자는 아니겠지? 밤에는 달리아궁 근처에서 암영조원가 교대로 호위를 선다고 했다. 그들을 뚫고 올 정도로 대단한 자라면 내가 방어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일단 대비라도 하자 싶었다.
아니, 그런데 자객이 보통 문으로 저렇게 들어오나? 몸을 일으키려다 문득 드는 생각에 멈칫했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크게 뛰었다. 이렇게 한밤중에 내 방에 들어올 사람이 자객을 제외하면 한 사람밖에 없는데. 기대 반, 서러움 반으로 점철된 마음이 뒤엉키며 혼란스러웠다.
쉽사리 등을 돌리지 못하고 웅크린 채 가만히 있었다. 창문 쪽으로 누워있어 문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오던 이가 침대 근처에서 멈춰 서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뒤돌아볼까 하는데 등 뒤 허리 부근이 푹 내려앉았다.
나를 해치려는 이가 이런 짓을 할 리는 없겠지. 더구나 등 뒤로 앉을 때 바람에 실린 그의 체향이 훅 끼쳐왔으니 누군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대체 언제 오나, 왜 그러나 싶어 답답한 건 나였는데 왜인지 쉽사리 일어날 수가 없었다. 숨만 색색 내쉬고 있는데 그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었다.
아…. 이대로 가려나.
잠시 망연해진 마음을 붙잡고 있는데 침대 근처에서 무언가를 만지듯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시 침대 뒤쪽이 내려앉더니 그가 허리를 살며시 끌어안으며 등을 맞대었다. 서늘했던 몸이 그의 체온으로 금방 따뜻해졌다.
그 안온한 느낌이 왠지 너무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어 또 울컥했으나 꾹 참았다. 그가 뒤에서 내 손을 잡아 천천히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이상행동에 당황한 것도 잠시, 달빛에 비친 내 손가락에 약혼반지가 끼워졌다. 깊은 한숨을 내쉰 그가 손가락을 얽으며 깍지를 끼웠다.
“빼지 마.”
작게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눈동자가 놀라서 커지는 것이 보였다. 내가 깨어있는 줄 몰랐나 보다.
“너무 늦게 왔잖아요.”
“미안….”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내 몸을 제 쪽으로 돌려 안았다. 우리는 잠시간 그 상태 그대로 있었다.
“그날 왜 그런 거예요?”
“…….”
그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말이 없었다. 왜 그렇게 집요하게 서명하라고 하는지 답을 듣고 싶었는데, 기다려 보아도 꿈쩍도 안 했다.
“며칠 만인데 얼굴도 안 봐요?”
그는 마치 얼굴을 숨기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계속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버티던 그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내 생각이 짧았어. 미안해.”
여전히 눈은 내리깐 채였다. 이유는 말해 주지 않는 건가.
“그거 생각하는데 삼 일이나 기다리게 한 거예요?”
내가 짐짓 엄한 말투로 다그치자 그가 입을 몇 번 달싹이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그날 바로 후회했다.”
그런데 왜 바로 오지 않고? 의문을 가지는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가 화가 많이 난 것 같아서….”
확실히 내가 카샤에게 화를 낸 것이 그날이 처음이긴 했다. 그럼 지금까지 겁먹어서 못 왔다는 거야? 두 번 화냈다가는 일주일 넘게 못 보겠네. 허탈한 심정으로 웃자 그가 그제야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짙푸른 눈동자가 잘게 일렁이며 지그시 나를 응시했다.
“너무 힘들더군.”
“뭐가 그렇게 힘들었어요?”
당신만 힘들었을까 봐.
“보고 싶어서.”
나도 보고 싶었는데.
“그대는 너무 연약해.”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야. 나만큼 튼튼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요즘 검술도 배우고 있어 내 몸은 아주 건강하고 아픈 곳 하나 없었다.
“연약하지 않아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힘주면 뼈가 부러질지도 모르니 마음껏 안을 수가 없지 않나.”
“…….”
당신이라면 내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뼈가 부러질 것 같은데. 아, 루카 정도로 큰 덩치라면 아무리 힘주어도 안 부러질 것 같긴 하다. …상상해버렸어. 카샤가 루카를 꽉 껴안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자주 여러 번 안으면 되죠. 질보다 양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가 낮게 웃음을 흘리자 몸에 진동이 전해져왔다.
“좋은 생각이야.”
웃음기가 묻은 어투로 말하자 행복 바이러스가 옮아오는 것처럼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좋은 분위기에 산통을 깨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그래도 짚고 넘어가긴 해야지.
“말 안 해줄 거예요? 왜 그렇게 고집 피웠는지.”
그의 속내를 한 치도 알 수 없어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면 나중에 비슷한 일이 반복되더라도 쉽게 우리 사이를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안 물을 수가 없었다.
“음, 밤이 늦었군.”
그가 시간이 늦었다며 내 등을 약하게 토닥였다. 말하기 싫어서 얼버무리는 건가?
“당신 생각을 알아야 나중에 이런 일이 또 생겨도 내가 대처할 수 있잖아요.”
그는 곤란한 표정으로 뜸을 들이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그냥, 우리가 서약서로라도 묶였으면 해서.”
깜짝 놀라 그를 살폈다. 서약서가 얼마나 충격이었기에 그런 생각을 한 거지.
“말도 안 돼요. 맹세의 서약서로 묶는다구요? 그날 우리는 약혼도 했고 시일은 걸리겠지만 결혼도 할 거잖아요.”
“알아, 후회하고 있다. 그땐 그런 생각밖에 안 들어서 그랬지.”
정말로 강력하게 묶이는 방법이긴 했지만, 아무도 선호할 방법이 아니었다. 새삼 그가 얼마나 집요한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내가 더 표현을 많이 하면 될까. 불안을 없애야 하는데 하필이면 저 서약서 때문에 상황이 나빠지기만 한 것 같았다.
“빨리 이 일을 꾸민 사람을 찾아야겠어요.”
우리 사이에 이간질할 사람이 대체 누가 있을까. 너무 많은 사람이 포진해 있어서 용의자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분명 내 맹세의 서약서를 보려면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내 곁에 있는 시녀나 하녀가 그런 일을 할 정도로 나를 아니꼬운 감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시켜서 그랬다는 건데, 귀족 대부분이 못마땅해하니 범위가 너무 넓어졌다. 황제파에서도 황후는 제국에서 나오길 바랄 테니 나는귀족파를 포함한 대부분의 귀족들에게 공공의 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영악하게도 증거를 남기지 않아서 찾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이 일을 꾸민 사람이 원하는 대로 우리는 놀아난 거예요. 삼일이나 얼굴도 안 봤으니 그 사람이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내 말에 그의 눈썹 한쪽이 올라갔다.
“그렇군. 이제야 알아채다니 내가 방심했어. 정말 황당한데. 내가 당하다니.”
그가 잡히면 어떻게 처리할지 작게 중얼거렸다. 뒷말은 들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별로 듣고 싶은 처벌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서 잘 거예요?”
“어?”
나를 안고 있던 그가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그걸 고스란히 안겨있던 나도 같이 느꼈다. 한순간 어색해진 분위기가 우리 사이에 감돌았다.
“저번처럼 자고 갈거냐구요. 나를 보호해야 한다면서 자고 갔던 것도 벌써 잊었어요?”
가볍게 농담하듯 말을 건네자 그제야 그의 몸에 들어갔던 긴장이 빠지기 시작했다.
“아, 그래야지. 자고 가야지.”
“그럼, 옷 벗고 와요.”
“뭐?”
왜 자꾸 깜짝깜짝 놀라고 그래.
“그렇게 입고 잘 순 없잖아요.”
그는 아직도 정복 차림이었다. 옷을 가리키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안고 있던 팔을 풀자 금세 허전한 기분이었다. 아, 많이 표현해야지!
“빨리 와요.”
“뭐?”
그만 놀랐으면. 쑥스럽게 다시 말해야 되잖아.
“…빨리 갈아입고 와요.”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내 얼굴이 아주 따끈하게 열이 올랐기 때문이다.
“기다려.”
그가 크게 헛기침을 하더니 서둘러 방을 나갔다. 흐트러진 자세를 잡고 다시 누우려니 협탁 근처에서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마법 유리병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음. 저건 아직 쓰일 일이 없겠지?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괜히 어색함을 느끼며 마법 처리된 피임약에서 시선을 돌렸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했고 그도 갑작스럽게 찾아왔으니 저건 쓰일 일이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리 마음 편하게 생각하며 편한 자세로 누웠다. 잠이 막 들기 전 그가 다시 방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무거워진 눈꺼풀을 들어 올려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언제나 안고 잤으니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내가 한 번도 이렇게 안아달라고 먼저 팔을 내민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 다가오던 그가 멈칫했다.
그는 다시 헛기침하고 침대 속으로 들어와 나를 끌어안았다. 따끈한 체온으로 감싸자 모든 것이 완벽해졌다. 기분도 좋고 편안하고 행복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가 이마부터 시작해 자주 하는 키스 세례를 시작했다.
그래, 굿 나잇 키스하고 자야지. 마지막 종착역인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 잘 줄 알았는데 어째 점점 농밀해지고 있었다.
삼 일 만이라서 반가워서 그러나 보다. 그의 키스를 받아주자 카샤가 더 진득하게 혀를 빨아 당기며 옭아매기 시작했다. 볼 안쪽과 위아래를 종횡무진 쓸어내리며 자극하자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그의 손이 내 허리와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으응….”
이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오늘이 그날인 거야? 아직 마음의 준비를 제대로…. 속으로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자 그가 내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읏, 아파….
“딴생각 하지 말고.”
정말 귀신같이 알아차리네. 그가 깨물었던 입술을 혀로 살살 핥아 내렸다.
“아파서 더 이상 못하겠어요. 이제 그만 자요.”
여기서 더 나갔다가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하자 그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당황해 버렸다.
“지금 자겠다고?”
“어, 음. 입술이 아프니까 다음에….”
그가 실망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보았다. 아, 저러니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죄책감이…. 재빨리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그의 팔을 내 허리 위로 두르자 그가 위에서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그의 웃음소리에 맞춰 같이 울리니 기분이 좋았다.
“이것도 힘들군.”
뭐가 힘들다는 걸까? 긴장이 풀린 내가 꿈속으로 넘어가기 전 한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