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60
* * *
내가 전쟁을 목적으로 리노아에 아레인을 보낸 것 때문에 샬리는 크게 충격받았다. 그녀는 마지못해 내 청혼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지만, 그 순간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이제 그녀는 내 곁에 항상 있을 것이다. 그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기쁨이 충만했다. 그녀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싫어하거나 외면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건 내 착오였다. 샬리를 옆에 둔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그녀의 애정에 목이 말랐다. 그저 옆에만 있어도 좋았을 거라니. 나는 대체 무슨 착각을 했단 말인가. 그녀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 모든 것이 내게만 향하길 바랐다.
혼자만 보고 싶다. 다른 이들이 샬리에게 향하는 시선이 못내 불편하다. 내가 얼마나 그녀를 속박하고 싶어 하는지 샬리는 모를 것이다.
아마, 놀라서 도망갈지도 모르니까. 그리되면 참 곤란한 일이니 그녀가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그러면 참 곤란한 일이니 그녀가 내게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인내심이 극히 없는 나였지만, 그녀라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그 끝에 얻는 열매는 다디달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기다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사람의 감정이란 정말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샬리에 관한 것은 모든 것이 다 그랬다. 나는 참을성이 없어졌다. 불안한 나머지 아레인을 호위로 붙였지만, 그마저도 무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투알린 승전 연회에 가기 전 아름다운 그녀를 봤을 땐…. 문을 잠그고 싶었다. 다른 놈들이 이 모습을 본다고 생각하니 속이 뒤틀렸다. 그래도 나는 가볍게 농담하듯 웃어넘겼다. 진심처럼 보이면 겁을 집어먹을지도 모르니까. 아기 사슴은 조그만 일에도 놀라기 마련이니.
그녀는 간간이 내게 웃어주지만 그게 다였다. 그어놓은 선을 넘으려는 나를 다가오지 못하게 웃음으로 무마시켰다. 자신의 본분은 나와 약혼하는 것이 다인 것처럼,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그녀가 이따금 내보이는 자그마한 애정에 허덕였고, 갈증이 일었다.
그리고 그것을 희망 삼아 견디며 지냈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볼 때면 온몸 구석구석에 내 흔적을 남기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다 가끔 손목이나 목, 쇄골에 남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어릴 때 받았던 신탁을 완수하기 위해서, 나는 포르토와의 전쟁을 계획하고 있었다. 리노아와 전쟁하지 못했으니 한 번을 더 횟수를 채워야 한다.
어디를…? 작은 공국이라도 건드려야 되나,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보다 큰 곳을 치려니 시일이 오래 걸린다. 예정했던 나라를 바꿨으니 다시 준비 작업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웬만하면 결혼 전에 끝내고 싶었다. 그래야 안심하고 마음껏 그녀를 품에 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꽤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스스로 방심한 것을 몰랐다. 샬리에 대한 내 독점욕과 집착이 나날이 늘어가고, 그에 힘입어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가끔 그녀가 나를 떠나는 것은 아닐지, 초조한 마음이 불쑥 고개를 내밀곤 했다. 샬리가 겁먹지 않게 내 감정을 조절하는 일이 조금씩 버거워져 가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 조금씩 마음을 여는 것이 보일수록 더 안달이 났다. 그러다 결국은 터지고 말았다. 그녀가 손끝으로 하얀 목을 둥글게 그었을 때, 그 야살스러운 모습을 보자 감정이 급격히 달아올랐다. 머리가 제대로 사고를 하지 못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내가 없을 때 뭐? 그것도 한밤중에? 지금 저 모습은 남자가 노리는 게 아니라 도리어 유혹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극심한 불안감이 감정을 살라 먹고 폭주하기 시작했다. 전쟁하러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것을 온전히 얻을 것 같다. 이래서야 참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전에 그녀를 방에서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놔야 하나. 극에 달한 위태한 내 모습은, 샬리의 말 한마디에 한순간 꺼졌다.
“목숨…. 흐…. 누가 내 목숨 노리면, 어쩌냐는… 말…. 읏….”
내 착각이었다. 어떻게 그걸 저렇게 해석했지. 정신이 들자 후회가, 허탈함이 물밀 듯이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그 자리에 불안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식의 반복이 지속할까 봐 나 자신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두 가지만 약속해 주면, 난 당신 거예요.”
그런 나에게 그녀가 확신을 주었다. 두 가지만 지키면 내 것이 되어 주겠다고 했다. 내 것. 입안에 감도는 말이 기분 좋았다. 그녀는 언제쯤 나를 원할까. 아마 그런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정도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
“당신을 좋아하고 있어요. 말하고 있는 지금은 그전보다 더 좋아요.”
그녀는 내가 그렇게 듣고 싶어 하던 말을 해 주었다. 빈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맑고 사랑스러운 눈동자가 내게 진심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원할 때면 항상 곁에 있었지만, 줄곧 벽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그 벽을 결코 넘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깨졌다. 넘어와도 된다고 손짓하고 있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했던가. 샬리의 마음을 얻고 나면 안정을 되찾을 줄 알았다. 한 번 맞본 달콤한 과실은 내 마음을 흐물흐물 녹아내리게 했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싶었다.
“적어도 공주님처럼 문란한 이에게 충고받고 싶지 않습니다.”
행사가 있을 제도 거리에 말썽이 생겨 잠시 나갔다가 왔더니, 웬 여자가 불쾌한 언동으로 샬리를 모욕하고 있었다.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상황을 물었더니 그 여자였다. 투알린 승전 연회에서 샬리에게 함부로 지껄이며 과하게 집적거렸다던 그….
그녀는 내가 나서기 전에 내칠 생각인 모양이었다. 강경하게 아이비를 나무랐지만, 그녀의 의도와 달리 아이비는 도통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계속 샬리 옆에서 질척대는 것이 영 마음에 안 든다. 당장에 목을 치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사람들은 내가 황족 모욕죄로 아이비를 처넣은 거라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와 달랐다. 샬리 곁을 맴돌며 달라붙는 것이 내 심기를 매우 거슬렀기 때문이다.
샬리에게 붙는 것들은 남녀 할 것 없이 내게 전부 똑같이 불쾌했다. 사절단으로 왔던 포르토 왕세자가 아이비처럼 저렇게 샬리에게 들러붙었다면 똑같은 꼴이 났을 것이다. 특히나 그녀의 감정을 크게 자극하는 것들, 그런 놈들은 더 오래도록 샬리의 머릿속 한쪽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라이올라처럼 샬리가 무난하게 대하는 이라면 참고 넘길 수 있을지 몰라도, 저렇게 뇌리에 깊이 박힐 행동을 한다는 것은 내게 죽여 달라고 목을 길게 드리운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녀는 아이비를 죽이지 말라 했지만, 이미 내 마음속에선 자비가 없었다.
* * *
맹세의 서약서. 샬리에게 돌아갈 생각에 들떠 있던 나를 구덩이 밑으로 끌어내린 종이였다. 날 믿지 못하는 건가. 역시, 나 혼자 설레발을 치고 있었군그래. 사랑스러운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을 때는 정말 진심이 느껴졌었다. 그래서 마음을 놓고 있었나. 맹세의 서약서를 준비한 그녀를 이해했다.
샬리의 입장에서는 제국에 덜컥 시집가게 되었으니 그럴 만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나 자신에게 되뇌는데도 가슴이 욱신거렸다. 이 서약서 한 장이 마치 나를 밀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장 찢어 버리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그녀에게 갔다.
빨리 서명을 하든 뭘 하든 해서 치워 버리고 싶었다. 그러면 좀 나아지겠지 싶어서. 그녀에게 맹세의 서약서를 건네는데 심장이 저릿했다. 날 거부하는 확인절차 일부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놀라지 않게 최대한 내 표정을 숨겼다. 덤덤하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그런데 그녀가 맹세의 서약서를 거부했다. 반은 안도하고 반은 실망했다. 지금은 필요 없다지만 본래 필요했으니 만들었을 것이다. 서명해 주겠다는 말에 그녀가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 좋은 방법인데. 샬리가 이 일로 내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다. 안 좋은 감정이라도 내게 얽매여 있을 수만 있다면 나는 어떤 일도 감내할 수 있다. 저주쯤이야 내가 맹세를 지키면 될 일이 아닌가. 그녀의 서약서에 쓰여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내가 하지 않을 것들이었다.
아마 평생 가도 하지 않을 것이니 서명을 하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성격상 내가 서명하는 순간부터 평생 죄책감을 느끼겠지. 그녀가 나를 좋아한다는 말이 언제까지 유효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럴 바에야 그녀의 마음 약한 모습에 기대를 거는 것이 훨씬 나았다.
나는 이런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니까,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 감정을 느꼈다면 전쟁은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피해를 최소화해도 사람은 죽어 나갔다. 그것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일이었다. 나는 그것에 죄악감을 느끼지 않는다. 얻을 수만 있다면.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샬리가 느끼는 수만 가지 감정까지 모조리 내가 가지고 싶었다.
증오, 미움, 이런 부정적인 감정의 찌꺼기 하나도 남한테 줄 수 없다. 아이비라는 남작가의 영애 목을 날리고 싶은 충동이 든 것도 그 때문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은 모조리 베어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예전의 감정 잔해들이 날뛰고 있었다.
나는 결코 이런 모습을 그녀에게 보이지 않는다. 가끔 참다못해 일부를 보일 때도 있지만, 그것조차 내 전부를 보여준 건 아니다. 늘 나를 무난하게만 대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내게 화를 냈다. 이따금 웃기만 하고 그 이상의 선을 허락하지 않고 무던하던 그녀가 말이다.
내게 크게 반응하는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물론 미친놈 보듯 할 테니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나는 급히 그 자리를 떴다. 그녀가 온종일 내 생각을 해 주길 바라면서. 그날은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벌써 내가 한 일에 후회하고 있었다. 겨우 급한 것만 처리하고 난 뒤에는 이미 새벽이었다.
그녀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약혼식이었는데, 내가 다 망쳐버렸나. 자는 얼굴만 잠시 보고 올까. 테너가 물었다.
“달리아궁에 들리지 않으십니까.”
“아니, 오늘은….”
오늘 내가 한 짓을 생각하면 그녀를 볼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그녀를 보지 못했다. 내 나름의 용서를 비는 행동이었다.
그녀의 화가 가라앉길 바라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손에 잡히지도 않는 일을 꾸역꾸역 처리했다. 테너는 일을 마치고 나면 매번 달리아궁에 가지 않느냐고 은근히 물어왔다. 그에게 말해 볼까 싶다가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녀를 못 본 지 삼 일째 날에는 속이 타올라 재만 남은 것처럼 공허해졌다. 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조회시간에는 대신들도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귀족들의 목을 잘라 대전에 피를 뿌렸던 그때처럼 말이다.
내 상태가 심각하긴 하군. 오늘 심기를 거스르는 궁내백의 목을 정말로 잘라버릴 뻔했다. 지금쯤이면 그녀도 화가 가라앉아 나를 용서해 주지 않을까. 이런 적은 처음이라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오늘은 가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공주님이 기다리고 계실 텐데요.”
“정말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나.”
“혹시 다투셨더라도 이야기로 풀어나가십시오. 이렇게 회피하는 것은 오해만 키울 뿐입니다.”
그가 진중한 모습으로 내게 조언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가지 않는 것이었는데. 어쨌든 그 말을 들으니 그녀를 보러 가도 될 것 같았다.
“그대의 말이 맞아. 보러 가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