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59
티나가 나를 방으로 안내하며 그런 말을 했다.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니야? 그냥 자고 간다는 말인 것 같은데, 전처럼….”
말을 하다 보니 정말 티나 말대로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나를 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어떡하지, 티나…?”
그녀가 침실 근처에 있던 협탁을 가리켰다.
“공주님, 만약 폐하와 밤을 보낼 것 같으면 저걸 꼭 드세요.”
“저게 뭔데?”
그녀가 가리키는 것은 아주 작은 호리병처럼 생긴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었다. 내가 그것을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피자 티나가 그 용도를 말해 주었다.
“그거 마법 피임약이에요.”
“아….”
“공주님, 결혼 전에는 절대 아기가 들어서면 안 되니까요. 아셨죠?”
약혼 중이라고는 하나 관련 법률이 없어서 임신하게 되면 내 아이는 사생아가 될 확률이 높았다.
“그래, 알고 있어. 그런데 이거 얼마나 효과 있어?”
“한 병만 마시면 그날은 괜찮다고 했어요. 하루 종일 하실 건 아니니까 충분하죠.”
“그러네. 부작용은 없는 거야?”
“네. 제가 아주 귀한 거로 얻어왔다구요. 무려 에이솔표 피임약이에요.”
“에이솔이 만들었어?”
내가 깜짝 놀라 묻자 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님을 생각해서 최상의! 하자 없는 거로 만들어 달라 했으니 충분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런데 정말 이걸 쓸 일이 있을까. 여전히 잠만 잘 것 같기도 하고, 또 아닐 것 같기도 하고. 약혼식을 했으니 그도 오늘을 특별하게 생각해서 나를 안으려고 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시녀 한 명이 급하게 들어왔다.
“폐하께서 오셨어요.”
뭐, 벌써? 간지 얼마나 되었다고. 급한 일만 처리하고 온다고 하긴 했지만, 그는 항상 일이 많았다. 그래서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내가 그를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께서 보고 싶으셔서 바로 오신 거 아닐까요?”
티나가 활짝 웃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건 아닐….”
말이 씨가 되었는지 정말로 아니었다. 문이 벌컥 열리고 들어오는 카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 기세에 나와 티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가 내뿜는 싸늘한 기운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는 무언가를 속에 꾹 참고 있는 사람 같았다.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게 아니었다. 안 되겠다 싶어서 티나의 등을 두드려 방을 나가게 했다. 그녀가 나가고 방문이 닫히며 우리 둘만 남게 되었다. 그의 머리칼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화가 나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너무나 우울해 보였다. 오늘 약혼식을 한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조금이라도 내보였던 그의 표정이 점차 무감하게 변했다. 천천히 내게 다가온 그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뭐예….”
금테가 둘린 그것은 맹세의 서약서였다. 혹시 그가 내게 서약했으면 하는 게 있는 건가. 심란해진 내가 그에게서 빳빳한 종이를 건네받았다. 무슨 내용인지 일단 살펴보자 싶어서 보던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것은 카샤가 내게 원하는 바를 적은 서약서가 아니었다.
나는 믿을 수 없어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쭉 살펴보았다. 글자는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벽난로에 집어넣어 태워 버렸던 맹세의 서약서였다. 라이올라와 주고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내 화장대에 한동안 잠들어 있었던 카샤에게 주려고 했었던 그것이었다. 그것은 한 치의 틀림도 없이 내 필체였다.
이게, 대체….
“내가 맹세를 해 주길 바라면 지금 같이 서명하도록 하지.”
그의 음성은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다. 없애 버렸던 것이 다시 나타나고 그것도 카샤에 손에 있다니.
“이게 어디서 났어요?”
“그대가 시녀를 시켜 내 집무실 책상에 놓고 간 거 아닌가?”
“전혀 아니에요. 그런 적 없어요. 이건 제가 이미 없애 버린 거예요. 그러니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돼요. 누군가….”
내가 벽난로에 넣기 전에 누군가 내 화장대를 들여다봤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똑같은 걸 카샤의 집무실에 가져다 놓았다. 그가 내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방문을 열고 나가 입구에서 루이를 불렀다.
“루이, 암영조를 모조리 동원해서 오늘 내 집무실에 들렀던 이들을 전부 추적해라. 그리고 달리아궁 시중인들 중에서 내 집무실에 왔었던 이도 심문해. 이 일을 최우선으로 조사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루이가 조사를 위해 가버리자 그가 다시 되돌아왔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우선, 서명부터 하도록 하지.”
그가 무감한 목소리로 맹세의 서약서를 가리켰다.
“이건, 이제 필요 없어요. 없애 버렸다고 했잖아요.”
“왜?”
그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그대의 뜻이 아닌가. 빨리 서명하고 끝내지. 다시 일하러 돌아가야 돼.”
잘못하면 저주에 걸릴지도 모르는 이 서약서에 서명하겠다고? 그것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나도 모르게 멍한 상태를 그를 바라보자 그가 내 손에서 맹세의 서약서를 빼앗아갔다. 정신 차린 내가 다급하게 그를 말렸다.
“카샤,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하지 말아요.”
“이상하군. 이걸로 그대가 나를 믿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 주겠다는데 왜 거부하지? 나 또한 이게 더 편하니깐 그렇게 하자는 거야.”
그는 내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왜 하지 말라는 데도 부득불 서명하겠다니 오히려 내가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잘못하면 저주에 걸릴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더 편하다고 말해요.”
“걸릴 일 없어. 그대가 적어놓은 그대로 평생 따를 테니까.”
답답해서 명치끝이 꽉 막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거의 비는 심정으로 말했다.
“내가 싫다고 하잖아요. 카샤, 하지 말아요.”
내뱉은 목소리에 절박하게 응어리진 감정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그런 내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맹세의 서약서를 들고 테이블로 향하더니 깃펜에 잉크를 묻혀 서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기가 막혀 멍청하게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마치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서명을 다 한 그가 나를 돌아보며 맹세의 서약서를 내 쪽으로 밀었다. 그는 아주 담담한 모습이었다. 업무 보던 서류 하나에 결재하고 내게 내미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말없이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가 내게 깃펜을 건네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자 그가 깃펜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정말 내가 여기 서명하길 바라고 이러는 거예요?”
그가 그제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 그래야 우리 둘 다 편할 것 같으니까.”
연회용 미소가 아니라 진짜 미소였다. 정말 진심으로 내가 맹세의 서약서에 서명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이 이해가 가지 않아요. 이제 우리 사이에 이런 건 필요 없어요.”
그는 다시 미소를 거두었다.
“그대가 바라던 것을 해 주겠다는 거니 부담스러워 하지 마라. 내가 지금 기만하는 것처럼 보이나.”
진심인 것 같으니 하는 소리가 아닌가.
“난 못해요.”
내가 깃펜을 내려놓자 그가 다시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뭐 하는 거예요?”
“해. 서명.”
“내가 처음에 카샤를 믿지 못했어요. 그래서 이런 맹세의 서약서를 들고 온 것 때문에 당신 마음이 상했다면 미안해요.”
그전의 내 심정을 솔직히 토로했다. 이제는 아닌 마음을 그가 알아주길 바라면서.
“나는 당신이 서명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군.”
하지만 그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지 그저 나를 바라보며 서명을 재촉하고 있었다. 입술을 사려 물었다. 참을 인(忍)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데 왜 나는 속이 이렇게 부글부글 끓는지 모르겠다.
“안 한다고 했잖아.”
튀어나온 목소리가 한없이 낮게 깔렸다.
“뭐?”
“안 한다고 했잖아요. 이딴 거 안 한다고!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으란 말이야!”
나는 맹세의 서약서를 들고 거칠게 찢어 버렸다. 조각내듯 몇 번이나 계속해서. 눈물이 차올랐다. 슬퍼서가 아니라 너무 화가 나고 답답해서. 그를 힘껏 노려보자 카샤가 묘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짙푸른 눈동자는 그 속에서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쉽군, 난 언제든 서명해 줄 수 있으니 말만 해.”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방에서 나가버렸다. 그가 나가고도 나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잠시간 뒤 허탈해진 내가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당신이 원하는 게 대체 뭔데….”
* * *
약혼식 날, 그날 카샤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달리아궁은 우울감에 푹 잠겨 버린 것 같았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고.
“공주님, 걱정 마세요.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러셨을 거예요. 요즘 정말 바쁘다고 하더라구요.”
티나가 나를 위로했지만 전혀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우울한 얼굴을 겨우 감추며 테일러 오라버니를 배웅했다. 그래도 그다음 날 저녁은 올 줄 알았다. 서로 서운한 게 있으면 말로 풀면서 말이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는데 그는 오지 않았다.
“안 오면 자기만 손해지 뭐.”
나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아무 생각 없이 누워 있는데 갑자기 울컥하더니 눈가가 젖어 들기 시작했다.
“약혼하자마자 바람맞히는 거야? 너무하네, 진짜.”
사실은 그게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이 우울해지니 부정적인 감정만 가득했다. 맹세의 서약서를 들고 온 사실 때문에 한순간 정이 확 떨어졌나 봐. 아니면 이제 내게 관심이 없거나…. 아직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왜 이렇게 우울한 생각밖에 안 들지. 좋은 생각만 하자. 진짜로 바빠서 그렇겠지. 나는 자신을 다독이며 잠에 빠져들었다. 그가 다음 날은 와 주길 바라면서.
하지만 그건 내 헛된 바람이었다. 그는 둘째 날에도, 셋째 날에도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제가 시종장님께 물어봤는데 요즘 일이 많으셔서 새벽 늦게까지 일하신대요. 보좌관들도 죽는다고 앓는 소리를 한다 하더라구요. 제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에요.”
기운 없는 내 모습을 본 티나가 열성적으로 황제의 일상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돼. 티나. 그리고 폐하 얘기도 이제는 그만했으면 좋겠어.”
내 말에 티나가 의기소침해졌다.
“저는 폐하가 없어서 좋아요. 샬리 언니랑 많이 놀 수 있잖아요.”
보니가 내 눈치를 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맞아. 언니도 보니랑 같은 마음이야. 오늘도 동화책 읽어 줄까?”
나는 종종 여가에 보니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었다. 동화책을 가져 본 적도 없다길래 실컷 읽으라고 세트로 사주었다.
“네! 오늘은 숲속의 요정 읽어 주세요.”
보니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자 잠시나마 마음이 흐물흐물해지며 기분이 좋아졌다. 아유, 요 귀여운 거. 보니가 잠들기 전 동화책을 읽어 주고 방으로 돌아왔지만, 오늘도 카샤는 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아직 범인은 안 잡혔을까? 이 모든 게 맹세의 서약서를 복사한 악랄한 인간 때문이다. 삼 일째인데 괜히 조급해져서 얼른 잡혔으면 싶었다. 시녀들이나 하녀들이 가끔 조사에 응하러 자리를 비우곤 했다.
대체 누굴까. 독사 칼립타도 그렇고 누군가 내 주위를 맴돌며 방해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삼 일 째 밤인데도 그는 오지 않고 있었다.
침대에서 모로 누웠는데 손에 낀 약혼반지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약혼반지만 봐도 우울해져서 나는 그것을 손가락에서 빼 침대 근처의 협탁 위에 올려두었다. 내일도 안 오면 집무실에 쳐들어가야지. 대체 얼마나 바쁘길래 이렇게 비싸게 구는지 궁금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