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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58화 (58/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58

카샤가 부드러운 연회용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아이비의 표정이 다소곳이 바뀌었다.

“약혼을 축하드립니다. 폐하. 데스티안의 아이비가 인사드립니다.”

“내 피앙세에게 축하 인사 외에 할 말이 더 있는가?”

“샬리오니 공주님께 제 혼처를 부탁드리던 참이었습니다.”

“그걸 왜 샬리에게 부탁하지?”

그가 아이비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보기 시작했다.

“공주님이 제게 빚이 있어….”

“없어요. 아이비. 당신과 나는 이번이 두 번째 대면하는 사이이고, 이름도 몰랐으며, 몇 마디 말도 나누지도 않았는데 무슨 빚이 있다는 거예요.”

아이비가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하지만 공주님이 제 혼삿길을 막으셨잖아요.”

“처신 잘못하여 혼삿길이 막힌 건 순전히 본인의 잘못이에요. 남에게 책임 전가하는 모습은 다 큰 성인으로서 지탄받아야 할 일이구요. 자칫하다간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소문이 돌 수 있으니 이쯤 하고 물러나세요.”

너 그만하고 그냥 가라. 이건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정말 내가 다 조마조마하다. 나는 힐끗 카샤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싸늘해지고 있었다. 아…. 아이비, 이 이상은 나도 모르겠다.

“저는 교육을, 충분히….”

그녀가 입을 뻐끔거리더니 꾹 다물었다. 점점 눈가에 물이 차오르더니 그렁그렁하였다.

“그렇군, 샬리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한 이가 너였나.”

그의 냉담했던 분위기가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카샤에게 그날 일은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있지? 내가 아레인을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저…공주님에게 제국이 리노아와 다르다는 충고를….”

“데스티안이 속해 있는 곳이 어디지?”

나는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아이비만 혼낼 것이지, 다른 가문은 또 왜?

“펠리드 후작가 입니다.”

아이비가 겁먹은 모양새로 대답했다.

“그래, 펠리드는 제 봉신 가문 하나 제대로 챙기지도 못했단 말이지. 펠리드 가주를 데려와.”

약혼식장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멀리 있던 오라버니가 다가오려 하길래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제국 문제에 타국이 끼어들어서는 안 되었다. 모두 이 영애가 어떻게 될지 주목하고 있었다. 가끔 아이비가 훌쩍이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사절단들이 흥미진진한 듯 우리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비, 너 어쩔 거니. 이게 웬 국제적 망신이람. 사절단들과 얘기 중이었는지 그 사이로 한 중년 귀족이 혼비백산하여 튀어나왔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데스티안이 네 가신인가.”

“데스티안…. 그렇습니다. 남부의 작은 영지에 있는 남작가입니다만.”

펠리드 가주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멀리 있었다면 이야기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저 분위기에 편승해서 조용히 있었겠지.

“데스티안의 여식이 샬리오니 공주에게 모욕하고 제 주제를 모르고 날뛰고 있는데 어찌하는 것이 좋겠나, 후작.”

“예? 정말입니까?”

펠리드 후작이 화들짝 놀라 아이비를 쳐다보았다.

“오늘을 기점으로 황족이나 다름없는 이에게 그랬단 말이야.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니 가감 없이 말해 봐.”

카샤의 원하는 대답이 아닐 시에 후작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었다.

“데스티안을 파면하겠습니다. 봉신 가문의 불찰은 제 소관이니 귀족 계보에서 빼도록 하겠습니다. 허락하여 주십시오.”

귀족 직위를 박탈하겠다는 소리인가. 아이비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펠리드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카샤가 성에 차지 않는지 다시 물었다.

“아…. 가주에게 책임을 물어….”

“저 원인 제공자는 어찌할 건가.”

카샤가 턱짓으로 아이비를 가리켰다. 펠리드 후작이 눈을 데구루루 굴리더니 조심스럽게 한마디 했다.

“그, 천인공노할 죄를 지었으니 노역을 시키는 것이 어떠할지….”

“알 만하군. 펠리드 후작은 아주 관대한 사람이었어. 그래. 말 그대로 천인공노할 죄인데 노역으로 끝낸단 말인가.”

후작이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어리석은 신에게 고견을 내려 주십시오. 폐하.”

“처형시켜라.”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처형이라니. 물론 한마디만 잘못한 것 아니었으나 그래도. 황족 모욕죄가 적용되면 그 죄의 처벌은 무조건 황족에게 처결권이 넘어갔다. 살리든 죽이든 황족 마음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황족이 아니었다. 준 황족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건 관습적인 예우였고 황족이 아닌 귀족들에게만 해당 사항이 있었다.

약혼식이 없다시피 한 황족이기 때문에 그에 관련된 명확한 법률이 없어 현재 나는 어정쩡한 신분이 맞다. 황족도 아니고 공주도 아닌. 그는 예전의 피를 부르는 군주처럼 그저 밀어붙이고 있었다. 아이비는 거의 실신하기 전이었다. 큰일이었다.

“왜, 못하겠나?”

“그, 그것이….”

후작의 머릿속이 어떠할지 짐작이 갔다. 내가 아직 황족이 아닌데 그걸 또 사실대로 얘기하자니 자신의 목도 떨어질 것 같을 것이다.

지금 카샤는 서슬 퍼런 기세를 사방으로 흘리고 있었다.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귀족들을 전부 목을 쳐낸다는 것은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황궁으로 온 뒤로는 전혀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소문이 과장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정말이었나 보다.

여기서 아이비를 처형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약혼자 때문에 귀족 영애를 죽인다니 이게 무슨 말이야. 그것도 약혼식 날에. 내가 테너를 돌아보자 그가 무언의 눈빛을 내게 강렬하게 보내고 있었다.

저거 말려달라는 눈빛 맞지? 확인을 위해 카샤 쪽으로 눈동자를 힐끔 돌렸다가 다시 테너를 보자 그가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였다.

“동의한 것으로 알겠네. 펠리드 후작. 이 여자를 끌고 가라.”

“폐하, 부… 부디 용서를…. 잘… 몰라서….”

아이비가 몸을 벌벌 떨며 카샤에게 용서를 구했으나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내가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카샤, 오늘은 우리 약혼식이잖아요.”

“걱정 마라. 그대가 피를 볼 일은 없을 테니.”

“이 좋은 날에 사람이 죽다니 말도 안 돼요. 선처해 주세요. 가문이 파면당했잖아요. 처형 대신 다른 벌도 많이 있으니까요. 네?”

잔인하고 피밖에 모르는 군주는 이제 그만 청산합시다. 아이비가 괘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두 손으로 그의 손을 꾹 잡고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테너처럼 강렬하게 보냈으니 알아듣겠지? 그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내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렇게 쳐다봤자 안 돼. 그대가 처벌하고 싶은 모양인데 뭘 하려고?”

그가 대답을 재촉하는 눈빛을 보냈다. 내가 처벌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차라리 이게 나으려나?

“안 되겠어. 그대는 고작 사과 받는 것으로 대신하려고 하겠지.”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공주님!!”

카샤의 말에 졸도 직전이던 아이비가 나를 붙들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가라고 할 때 가면 좋았지 않았냐고. 카샤 이미지까지 나빠지고 있으니 아이비가 참 원망스러웠다.

“아레인.”

카샤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흉흉했다. 아레인이 다가와서 아이비를 내게서 떼어놓았다.

“일단 죄인이니 황실기사단으로 넘기겠습니다.”

아레인의 말에 카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에요! 저는 죄인이 아니에요…. 억울합니다. 말도 안 돼…. 살려 주세요…. 제발!!”

아레인이 그녀를 끌고 가 기사 중 한 명에게 아이비를 넘겼다.

“말해 봐. 그녀를 살려둬야 할 이유.”

“오늘은 약혼식….”

“그럼 약혼식 후에는 내가 처리해도 되겠지?”

내가 입을 다물고 말이 없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가 이 자리에 없었다면 진즉에 목을 쳤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운이 좋았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사절단과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할 건 아니었다. 어차피 지금 처리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나중에 말이 나올 때 다시 이야기하자 싶었다.

“제도에 약혼 행사를 할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테너가 우리 앞으로 나서 분위기를 전환 시키며 행사 준비를 알렸다. 그 말에 귀족들이 너도나도 안도의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 * *

우리는 지붕이 없는 오픈된 화려한 장식의 의전용 마차에 올라탔다. 하루 종일 손을 흔들어야 하는데 새삼 검술을 배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워낙 고된 체력훈련을 많이 받아서 아마 행사를 다 마치고 나서도 내 팔은 끄떡도 하지 않을 것 같다.

- 우와아아아!

우리가 나오자 제국민들의 큰 환호성에 귀가 멀 것 같았다. 마차가 궁을 나서자 황궁의 입구에서부터 두 줄로 친위대들이 죽 도열 해 있었다. 그리고 카샤와 나처럼 오픈형 마차에 마법사들이 짝을 지어 앉아 있었다.

와, 뭔가 제대로 할 모양이었다. 특히나 마법사들이 내게 약혼선물을 주기로 하였으므로 나는 꽤 기대가 되었다. 제국민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우리는 웃으며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앙!

-팡! 팡!

갑자기 하늘에서 크게 터지는 소리가 나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세상에, 하늘에서 뭉게구름 같은 몽실몽실하고 두터워 보이는 흰 연기가 하트 모양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팡 소리를 내며 웨딩 케이크 모양, 반지 두 개가 엇갈린 모양, 여자와 남자가 마주 보고 뽀뽀하는 얼굴 모양 같은 것들이 연달아 튀어나왔다.

“꽤 애를 썼는데? 상여금이라도 줘야 하나?”

카샤가 하늘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하늘에서 뭔가 터지는 소리에 잠시간 조용하다 싶었던 제국민들의 환호성이, 마법을 보고 더 커졌다. 너무 멋있는 선물이라 나는 마법사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환하게 웃어 주며 감사의 뜻으로 마주 손을 흔들었다.

카샤가 내 손을 잡으며 무어라 말을 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하늘에서 펑펑 터지는 소리와 제국민들의 환호 소리 때문이었다. 그가 내 허리를 한 손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제국민들이 우리 근처로 꽃을 던져 올렸다. 다들 웃으며 우리를 축하해 주고 있었다.

행렬 주위로 빛 가루가 흩날렸다. 이거, 그거다. 카샤에게 뿌렸던 팅커벨 가루. 슬그머니 빛 가루를 맞아보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체 그날 이 빛 가루는 왜 뿌린 거야? 내가 빛 가루를 맞으며 카샤를 빤히 보자 그의 고개가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 한 바퀴를 돌고 돌아오는 길에는 마법을 이용한 쌍무지개가 떴다. 마차가 쌍무지개를 지나 황궁으로 들어가자 드디어 오늘의 행사가 마무리되었다.

“급한 일만 처리하고 조금 있다가 방으로 갈 테니 기다려 줘.”

카샤가 꿀이 떨어질 것처럼 다정한 얼굴로 말했다.

“알았어요. 기다릴게요.”

그가 말없이 한참 내 손을 만지작거리다 이마에 키스하고 뒤 돌았다. 근처에 있던 티나가 다가왔다. 그녀는 무언가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걱정 마세요. 공주님. 제가 준비를 다 해 두었어요.”

“무슨 준비?”

“오늘 약혼식 하셨잖아요. 방금도 폐하께서 들를 거라 하셨고요. 그 말은 같이 밤을 지새울 거라는 말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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