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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57화 (57/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57

우리 둘이 몽롱해진 얼굴로 한참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테너가 우리 주의를 끌며 한 곳을 가리켰다.

“사절단과 귀족들이 덕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그렇지. 사절단. 우리는 상석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사절단들이 각종 귀한 선물들을 단상으로 올리기 시작했다. 테일러 오라버니가 리노아에서 가져온 선물은 최상급의 캐시미어 원단이었다. 리노아는 모직물이 꽤 발달하여 여러 나라로 수출하고 있었고 그중 최고로 치는 것이 캐시미어였다.

그리고 그 캐시미어 중에서도 가장 질 좋은 상등품을 선물해 준 것이다. 동대륙의 고급옷감이 비단이라면 서대륙은 캐시미어였다.

다만 비단은 그 쓰임과 가공 방법이 다양하면서 내구성도 좋았지만, 캐시미어는 내구성이 크게 떨어졌다. 하지만 귀족에게 내구성이 떨어진다는 건 큰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그들은 같은 옷을 몇 번 입지 않기 때문에 내구성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 사용을 다 한다.

“오라버니, 귀한 선물 고마워요.”

그가 웃으며 윙크했다.

“귀한 분이 되실 텐데 당연한 것을요.”

그의 말에 제국의 귀족들이 불편한 듯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도 거리에서 약혼식 행진이 있을 예정이라는 것을 뒤늦게 전해 들었다.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우리를 축복하고 있지만 아마 지금 그들은 심기가 매우 불편할 것이다.

“공주가 귀한 사람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

황제가 귀족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오라버니의 말을 받았다. 귀족들이 고개를 돌리거나 숙이며 황제의 눈을 피해 버렸다. 사절단으로 온 레이시즈 왕세자도 선물을 올렸다. 그가 가져온 것은 포르토 왕국의 특산품인 푸른 진주였다. 다른 진주와 다르게 오묘한 푸른빛을 띠는 귀한 보석 중의 하나였다.

“귀한 선물을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우리 포르토의 보석이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았습니다.”

그가 내 손등에 입 맞추려 하자 옆에 있던 카샤가 내 손을 제 쪽으로 당겼다. 허공에 손을 짚은 레이시즈 왕세자가 얼떨떨한 얼굴로 카샤를 바라보았다. 아마 예의상 하는 인사에 과민 반응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내가 질투가 심해서 말이지. 잠시라도 내 여자에게 다른 남자의 손이 닿는 것을 못 본다.”

황제가 레이시즈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깜짝 놀라 카샤를 바라보았다. 둘러치는 화법에 익숙한 귀족들과 왕족들에게 방금 그의 직설적인 발언은 너무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소탈하기로 치자면 잠깐 보았던 레이시즈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황제를 잠시 황당하게 쳐다보더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알고 있었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실례했습니다. 폐하.”

레이시즈는 실실 웃더니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는 물러났다.

“마음에 안 들어.”

카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전쟁은 안 돼요. 약속했어요.”

“알아,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마지막 사절단은 크리하엘로 신성 제국이었다. 참석국의 명단을 보긴 했지만, 실제 마주하니 심란한 마음이었다. 신탁을 받을 수 있는 자는 성녀뿐이라지만 괜히 꺼려졌다.

“그렇게 털을 세우지 않아도 좋다. 그들과 접촉만 하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하니까.”

내가 경계하는 모양을 보고 카샤가 귓속말을 했다. 아마 내 몸속의 응축된 신력을 보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것도 문제였지만, 크리하엘 자체가 내게는 위협적이었다.

사절단으로 온 사람이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놀랍게도 교황 후보자, 즉 다음 대의 교황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눈을 굴려 라이올라를 찾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그녀가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나는 라이올라의 미래의 남편이 될지 모르는 이를 관찰했다. 그는 준수한 외모에 차분하고 영명한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이 사람이 라이올라가 원하는 크리하엘로 제국의 미혼, 교황 후보자란 말이지.

“부디 크리하엘로의 선물이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뒤에서 커다란 조각상을 신관들이 밀며 들어왔다. 조각상은 연인이 마주 보고 손을 잡은 모습이었는데 반투명한 아름다운 형상이었다.

“축복의 신력이 깃든 수정으로 만들었습니다. 크리하엘로에서도 매우 귀하게 취급하는 것이지요.”

“받은 선물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군.”

카샤가 흡족한 얼굴로 턱을 쓸었다.

“무척 아름다워요. 멋진 선물을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신력이 깃든 조각상이 귀한 모양이었다. 뭘 봐도 시큰둥하던 카샤가 마음에 들어 하는 걸 보니 말이다. 그 후 몇 마디 말을 섞어 본 교황 후보자 알렉의 첫인상은 매우 겸손하고 점잖은 사람이었다. 첫인상이 끝까지 이어져야 할 텐데. 크리하엘로 신성 제국 사절단이 물러나자 카샤가 내 손에 깍지를 끼우며 주의를 끌었다.

“나한테만 관심 둬.”

“네?”

“방금 저놈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던데.”

라이올라의 목표가 되는 사람이라서 잠시 흥미를 두고 본 것이었지만 현재 그에게는 불안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이성으로서의 관심이 아니었어요. 크리하엘로의 교황 후보라고 하니까 신기해서 본 거예요.”

저 불안 증세를 완치하려면 시일이 오래 걸리려나. 이상하게 고백하고 난 뒤 독점욕이 더 심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절단들이 전해 주는 선물을 모두 받고 난 후 황실기사단장이 카샤에게 다가왔다.

“보고할 것이 있습니다.”

그가 나를 한 번 보더니 잠시 갔다 온다며 자리를 옮겼다. 나 혼자 상석에 앉아 있으니 귀족들이 한 명씩 축하하는 말을 건네었다. 그들의 태도는 전과 확연히 달랐다. 약혼한 나를 준 황족으로 대우하는 것이었다. 이름 모를 귀족이 내게 덕담을 건네고 물러났다.

카샤가 올 때까지 혼자서 축하 인사를 다 받아야 하나. 헨리와 블레인은 재빠르게 인사하고 총알처럼 사라져 버렸다. 왜 그렇게 연회를 싫어한담. 단상 위로 올라온 그다음 귀족은 낯이 익었다. 투알린 승전 연회에서 내게 와인을 끼얹으려다 본인이 뒤집어쓴 이름 모를 귀족 영애였다.

“이제 이름을 알려 주시겠군요.”

웃으며 그 영애를 맞이했다. 축하 인사를 건네는 자리에 온 걸 보니 내게 전의 일을 사과하러 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낯빛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공주님 때문에 사교계에서 내 입지가 형편이 없어졌어요.”

트집 잡으러 온 거야? 입가에 걸려있던 웃음을 거두었다.

“영애의 말대로 사교계는 냉정한 곳이지요. 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영애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그 상태 그대로일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 제가 잘못하고 있다는 건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화가 깃들어 있었다. 나한테 성낸다고 사교계가 손에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본인이 어찌하고 있는지 먼저 돌아보는 게 어떨까요. 사교계에 속하고 싶은 것 같은데 현재 기본도 갖추어져 있지 않군요.”

“난 한심한 사교계에 속하고 싶은 것이 아니에요. 제 가치를 모르는 곳에 발을 담글 필요가 없지요.”

“그럼 영애가 원하는 게 대체 뭐기에 내게 와서 하소연하는 건가요?”

“공주님이 제 혼삿길을 다 망치셨습니다. 책임져 주세요. 그저 충고 한마디 한 거 가지고 제게 망신을 주셨지요. 그 때문에 저는 지금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본인이 자초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왜 그걸 나보고 책임지라고 하지. 망신을 준 것도 내가 아닌 거 같은데, 흠…. 아이비의 말대로 그 당시 그녀가 꽤 큰 타격을 입었다 싶어 그냥 넘어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다시 와서 내게 책임을 떠넘기려고 하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영애, 그날 일은 나를 비난하고 망신 주려고 한 것밖에 없는 걸로 보였는데 대체 뭘 충고하려고 하셨다는 거죠? 충고의 의미도 제대로 알아 두셔야겠습니다.”

내가 쏘아붙이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는 것이 보였다.

“우아한 척, 온화한 척은 혼자 다 하시더니 지금 이 모습이 본성이신가요?”

화제 전환하며 늘어지는 모습을 보니 급격히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그대가 사교계에서 외면당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본인 행동의 결과라는 걸 명심하라고 말해 주고 싶군요. 지금의 언행도 사교계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본인의 문제가 뭔지 아시나요?”

더 대화하고 싶지 않아 그만하자는 눈빛을 보냈으나 그녀는 못 알아들었는지 분기를 내비쳤다.

“제게 충고를 하신 건가요? 적어도 공주님처럼 문란한 이에게 받고 싶지 않습니다. 제 혼삿길을 망쳐놓으시고 책임은 지고 싶지 않으신 거군요.”

이제 이렇게 아무 의미 없는 공방이 이어지는 대화가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이해력이 심히 떨어지는 사람은 어떻게 떨쳐내야 하나. 무시하자니 계속 달라붙을 것 같고, 상대해 주자니 내 정신이 피로해졌다.

“내보낼까요?”

아레인이 내게 물었다. 약혼식장에서 내보낸다는 건 궁에서 퇴장시킨다는 말인데 엄청난 모욕이었다. 나는 어찌할 것이냐는 의미로 아이비를 바라보았으나 그녀의 시선은 아레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번의 손수건을….”

그녀가 수줍은 듯이 아레인에게 손수건 이야기를 꺼냈다.

“돌려주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공주님께 더는 무례히 굴지 마십시오. 도가 지나치면 제가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아레인의 냉담한 발언에 그녀가 다시 눈에 불을 켜고 나를 노려보았다. 아레인의 말대로 내보내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축하 인사가 길어지는군요. 뒤에 기다리는 사람도 생각해 주시겠어요?”

라이올라가 엘리제와 함께 다가와 지적하자 이름 모를 영애가 코웃음을 쳤다.

“제가 이래서 사교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공녀라는 자리에 계신 분이 이렇게 예의가 없다니요? 공녀님의 말대로 공주님과 아직 대화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차례를 지켜주세요.”

“아이비 영애, 예의도 때와 장소와 사람을 가리지요. 축하 자리에서 언성을 높이며 뒷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자리를 차지하는 무례한 사람에게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름이 아이비였구나. 영원히 비밀로 묻히는 줄 알았네. 라이올라가 질책하는 눈으로 아이비를 직시했다. 엘리제가 웃으며 말을 꺼내었다.

“뒤에서 듣고 있자니 영애는 아까부터 이상한 말을 하던데, 사교계는 그릇이 되는 자에게 스스로 찾아가는 법이랍니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말이죠. 무슨 말인지는 아시겠죠?”

“이상한 말을 하는 건 그쪽인데요? 저는 사교계라면 이제 치가 떨립니다.”

아이비가 엘리제를 돌아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참, 풀어서 얘기해 주지 않으면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은데, 당신이 원하지 않아도 그릇이 된다면 진작 그 중심이 되었을 거란 얘기예요. 지금 그 반대의 처지에 놓여 있으니 본인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똑똑히 알겠죠? 이것도 풀어서 얘기해 주지 않으면 모르려나? 바닥보다 아래. 거기가 당신이 있는 곳입니다.”

성격 좋아 보이던 엘리제가 웃으면서 뼈 있는 말로 아이비를 갈가리 해체하고 있었다. 아이비는 정말 이상한 여자였다. 왜 스스로 공개처형의 구덩이 속을 파고 들어가는 것일까. 라이올라가 손수 나서는 모습을 보니 내가 아이비를 제대로 쳐내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곤하다고 회피하려고만 했으니, 사교계를 잡으려면 역시 강단 있게 나가야겠지? 내가 마음을 다잡고 아이비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셋의 목소리가 낮은 편은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으니 빨리 끝내야겠다고 마음먹을 때였다.

“웬 소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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