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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56화 (56/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56

마차 문이 열렸다. 식장에 도착한 것이다. 문이 열리고 밝은 빛이 쏟아졌다. 아레인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티나가 다급히 내게 다가왔다.

“공주님, 장갑이요.”

그녀가 속삭이더니 내 발치에 떨어진 장갑을 주웠다.

아, 약혼식. 그 소리 한 번 들었다고 지금 내가 이렇게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거야? 돌아갈 방법이 있었다면 목소리가 진작 몇 번이나 나와서 얘기해 줬겠지. 진짜 내가 환청을 들었나 보다. 애써 마음을 추스른 뒤 장갑을 손에 끼워 맞추기 시작했다.

“공주님, 제가 넣을게요. 그렇게 떨리세요?”

티나가 장갑의 입구를 제대로 맞춰 내 손에 끼워 넣었다.

“난 지금 행복해.”

뜬금없는 내 말에 티나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저도 그래요. 공주님이 행복하시다면 저는 더 행복해요.”

“응, 고마워. 티나 덕분에 여기까지 왔어.”

티나와 말을 주고받으며 마차에서 느꼈던 소름 끼치는 기분을 빨리 털어 냈다. 오늘 나는 행복해야 할 주인공이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은 하지 말자.

이제 와서 뭘 어떻게.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카샤가 있었다.

할 수도….

화려하고 멋진 예장 차림이 잘 어울렸다.

없는데.

그가 나를 보고 몽롱한 눈을 했다. 그를 향해 나아갔다. 지금 그의 손을 얼른 잡지 않으면 무언가에 떠내려갈 것 같았다. 그의 앞에 당도한 내가 그의 손을 맞잡기도 전에 그가 먼저 내 손을 꽉 잡았다.

“샬리, 이제 더는 내가 원하는 것이 없다.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이 완벽하군.”

카샤의 얼굴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몸짓에 기쁨과 행복감이 넘쳐흘렀다. 그의 말이 맞았다. 모든 것이 완벽한 날이다.

나만 환청을 무시하면 되는 것이다. 떠내려가는 나의 손을 잡아준 그가 고마웠다. 식장 안에는 수많은 귀족이 우리를 축하하기 위해 여기저기 모여 있었다.

그들이 우리를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식장의 예단 앞으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는 황실 기사들이 두 줄로 늘어서 있었다.

금장 예복을 입은 채 날이 없는 화려한 의전용 검을 비스듬히 들어 예를 표했다. 그 사이를 지나가며 생각했다.

다 잊자고. 이제 그전의 생은 점점 잊혀 가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가족 구성원은 어땠는지도 가끔 헷갈렸다. 모습이 흐릿하며 기억나지 않을 때는 심장이 덜컹했다. 기사단 사이를 걸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마지막이야. 더는 기억하지 말자.’

[잘 생각했어.]

“샬리?”

우뚝 멈추어 선 나를 카샤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주변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걸음을 마저 옮겨야 하는데 다리가 굳어 버렸다. 왜 자꾸 들려.

“아….”

그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일이야.”

“다리가…안 움직여요. 너무 긴장했나 봐요.”

“어디 아픈 건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는데.”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서서히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몇 번 그렇게 하는 동안 반대로 카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이제 괜찮아요. 다시 가요.”

“정말 괜찮은 것…맞지?”

그의 표정이 흐려지며 불안이 얼굴에 떠올랐다.

“빨리 당신과 약혼하고 싶어요.”

그의 불안을 일축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웃었다. 그래도 그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귀족들의 수군거림이 갈수록 더해가고 있었다.

“카샤가 이마에 키스해 주면 긴장이 풀릴 거 같아요.”

내가 조르듯 그의 손을 잡고 약하게 흔들었다. 그제야 그의 굳은 입매가 풀리기 시작했다. 그가 허리를 숙이고는 이마를 지나 내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잠시 주변이 정적이더니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주변에서 호들갑 떠는 귀부인들의 소리와 헛기침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마보다 입술이 더 효과 있을 거 같아서.”

“그런 거 같아요. 긴장이 모조리 다 풀려 버렸어요.”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왠지 모르게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다시 그와 함께 이동했다. 예단 앞에는 대신관이 서 있었다. 겉으로는 별일이 없었는데도 마치 무사히 도착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약혼식을 진행했는지도 몰랐다.

“…프레타스 제국과 리노아 왕국의…. 이로써….”

대신관이 한참을 떠들고 나서야 정신이 제대로 들었다. 카샤와 나는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언뜻 침착해 보였지만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 두 사람은 약혼반지를 나눠 끼시지요.”

대신관이 드디어 길고 긴 축사를 끝맺었다. 가까이 있던 테너가 보석함을 가져왔다. 그것을 열어젖히자 두 개의 반지가 나왔다.

반지는 그 넓이가 일반적인 반지보다 세배 이상 넓었다. 마법 처리된 것인지 고대어가 희미하게 음각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카샤가 그중 작은 반지를 내 약지에 끼워주었다. 나도 보석함에서 반지를 꺼내 마찬가지로 그의 약지에 끼웠다. 그러자 반지 두 개가 선명한 빛을 발했다가 사그라들었다. 카샤가 허리를 숙여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신 크리하엘의 성스러운 축복으로 두 사람의 인연이 맺어졌음을 선포합니다.”

대신관은 그렇게 말하고는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귀족들도 술렁이고 대신관도 크게 당황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크흠…. 이상하군.”

대신관이 다시 허공에다 손을 휘둘렀으나 역시 아무것도 변화가 없었다. 카샤의 눈썹 한쪽이 올라갔다. 나 혼자만 이 상황이 뭔지 모르는 것 같다.

“대신관, 많이 피곤한 듯 보이니 그 정도만 하는 게 좋겠군. 무리하지 마라.”

“이게…. 그럴 리가 없는데 이상하군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는데.”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는 법이지.”

대신관이 억울한 듯 입을 열었다가 카샤의 얼굴을 보고 다시 다물었다. 그의 기세가 자못 흉흉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대신관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간 그의 분노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것 같았다.

“완벽하게 끝맺지 못하여 송구합니다. 폐하.”

“어찌 사람이 실수 한번 없을 수가 있겠는가. 너그러이 넘어갈 테니 심려치 마라.”

대신관은 억울해 보였으나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귀족들 사이에서 도는 잔인한 군주라는 그의 악명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대신관은 카샤의 기세에 눌려 겁먹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대신관이 마지막으로 축복의 말을 한 후 쏜살같이 사라졌다.

마지막 행사가 대신관의 실수로 마무리되면서 약혼식장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귀족들이 어색하게 손뼉을 치며 축하해 주었다.

시종장 테너가 손짓하자 식장의 연주자들이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첫 춤은 약혼식의 주인공들인 우리였다. 카샤가 내미는 손을 잡자 그가 나머지 손으로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경직되어 있었다.

“대신관은 왜 그런 거예요?”

“아무래도 크리하엘이 우리를 축복하지 않을 모양이야. 나 때문인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마지막 축복은 대신관이 크리하엘을 대신해 내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데 그 축복이 신력으로 나오지 않았어.”

그러면 크리하엘이 축복을 내리지 않았던 것을 대신관의 실수로 몰아간 것인가? 우리가 축복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귀족들이나 사절단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 한 것인가 보다. 그런데 대신관이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간 것이 이상했다.

“그런데 왜 저렇게 순순히 수긍한 건가요? 대신관이 실수했다는 건 자존심이 크게 상할 일일 것 같은데.”

“독감 문제로 내가 꽤 유감을 표했거든. 한 번쯤은 이런 일이 있더라도 넘어가야지.”

뭔가 둘 사이에 더 있는 것 같은데 더는 묻지 않았다. 다른 일에 더 관심이 쏠려서다. 크리하엘이 축복을 내리는 걸 거부했다는 건 나 때문인 것 같은데 카샤는 왜 자신 때문이라고 하지.

“왜 축복을 못 받은 게 당신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더 이상 신탁을 지키지 않으니까.”

아, 불필요한 전쟁은 하지 않기로 나와 약속했으니까. 역시 나 때문이구나. 그는 본인 때문이라고 하지만 내가 전쟁을 막아서일 것이다. 크리하엘이 내게 경고하는 건가. 그냥 행복한 약혼식이 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여러모로 생각할 일이 많았다. 환청 같은 목소리 하며 크리하엘까지.

“그대는 약혼식 내내 집중하지 못하더군.”

그의 물음에 깜짝 놀라 발을 밟고 말았다.

“앗, 미안해요. 괜찮아요?”

하지만 카샤는 그에 대해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약혼한 거 후회하는 건 아니지?”

“제가 후회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글쎄.”

“카샤가 약혼 무르자고 해도 이제 못 물러 줘요.”

“그래.”

대답하는 모습이 전혀 내 말을 믿고 있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저 기계적으로 끄덕이는 것처럼 감흥이 없었다. 약혼자가 약혼식 내내 불안정한 모습으로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러니 그가 조마조마하며 믿지 않는 상황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크게 내색하지 않을 뿐이지 그는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 그에게 내 마음을 고백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우리 사이엔 믿음이나 결속력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니 다른 외부요인에도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더는 나로 인해 불안해하거나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카샤, 저 이제 여기서 완전히 살려구요.”

“당연한 소릴. 이제 어디에도 못 가.”

“후회하지 마세요. 나중에 가라고 해도 붙잡고 안 떨어질 거예요.”

그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대는 바보 같아. 오히려 내가 붙잡고 안 놓아줄 건데.”

춤곡은 이제 막바지로 향하고 있었다.

“바보 맞아요.”

마지막 스텝을 밟고 나서 귀족들이 축하하는 박수 소리를 들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바보가 되는 거라고 했어요.”

“…뭐라고?”

박수 소리가 완전히 끝나고 다음 곡이 이어졌다. 귀족들이 짝을 이루며 우리 곁을 지나쳐 무대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내가 박수 소리 때문에 잘못들은 모양이야.”

그가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카샤의 소매를 잡아당기자 그가 허리를 숙였다. 귓가에 나팔을 만들어 속삭였다.

“당신을 좋아하고 있어요. 말하고 있는 지금은 그전보다 더 좋아요.”

그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나 또한 다르지 않으리라. 우리는 춤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어깨에 둘렀던 팔을 내리며 그가 내 손을 맞잡았다.

“날 놀리려는 건 아니겠지.”

“제국의 황제를요?”

“너라면 가능해.”

그의 눈과 입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나도 덩달아 기분 좋게 웃었다.

“정말이군.”

“정말이에요.”

“이제 그대는 정말로 내 거야.”

“카샤도 이제 내 거예요. 계속 나만 봐야 해요.”

그가 소리 내 경쾌하게 웃었다.

“몰랐나 본데 난 항상 그대의 것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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