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55
그가 아레인과 루이를 보내고 내 얼굴을 찬찬히 살피더니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는 괜찮나? 겁을 상실한 인간이 아직도 있을 줄은 몰랐군.”
“제가 한 마리 죽였어요.”
“뭐?”
“칼립타 말이에요. 아레인이 들어오기 전에 제가 단도로 찔렀….”
그가 갑자기 내 어깨를 강한 힘으로 틀어쥐었다.
“절대로, 절대로 그런 위험한 짓 하지 마.”
그의 짙푸른 눈동자가 형형한 빛을 뿜어내며 답을 재촉하듯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헨리한테 검술을….”
“그건 그대를 방어하기 위해 배우란 말이었지, 나서라는 말이 아니었다. 곧 약혼식이야. 이제 그대는 황족이나 다름없어. 귀히 여겨야 하는 몸이란 말이다.”
“다칠까 봐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우리는 칼립타가 있는 침대 바로 근처에 있었어요. 먼저 대비하고 움직이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
그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시중인들은 지키라고 있는 자들이다. 그렇게 교육받아 왔으니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야.”
“칼립타를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그들을 나 대신 희생하라는 말이에요?”
“그래.”
“다른 사람의 생명도 소중한 법이에요. 굳이 나 대신 엄한 목숨을 버릴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다른 이의 생명이 하찮다는 게 아니다. 그대가 더 소중할 뿐이지.”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못 본 척하는 건 말도 안 돼요. 그러면 누가 나서서 나를 지켜주려고 하겠어요? 아랫사람을 지켜주는 것도 윗사람의 몫이잖아요.”
당신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으면서 나보고는 하지 말라니 모순이잖아. 물론 그가 나를 아껴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이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남을 지키는 건 본인을 지키는 힘 이상을 갖춰야 가능한 법이지. 그대는 지금 제 목숨 하나 지키기 버거울 텐데.”
그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물론 내가 나서기 힘든 상황이라면 카샤 말대로 했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 상황은 충분히 내가 막을 수 있었어요.”
“칼립타가 얼마나 빠른데, 위험한 상황이 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야.”
“루카가 날리는 단도보다 훨씬 느리던데요.”
방심하면 저승길이던 그 단도에 비하면 어린애 코 풀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카샤의 눈썹 한쪽이 위로 올라갔다.
“루카가 그대에게 단도를 날리다니?”
아, 헨리가 수업 진행 상황은 자신이 말할 테니 수업받은 내용은 되도록 카샤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단도를 빠르게 날리는 연습이요! 루카가 매번 시범을 보여 주는데 정말 빠르더라구요.”
그가 코웃음을 쳤다.
“그놈이 빨라 봤자지.”
카샤가 나를 뚫어지게 보더니 한 자 한 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보다 샬리, 약속해. 이제 나서지 않겠다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요? 카샤, 내가 나서지 않았으면 상황이 더 안 좋았을 거예요.”
내가 넋 놓고 있었으면 침대 근처에 있던 시녀나 하녀 여러 명이 칼립타에게 물릴 수도 있었다.
“그대가 이렇게 고집이 센 줄 몰랐군.”
“제가 할 수 있는 걸 못 하게 막으니 그래요.”
그가 한숨을 내쉬더니 나를 끌어안았다. 묵묵하게 안고 있으니 그의 불안한 마음이 내게 전해져왔다.
“그럼 조금이라도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면 절대 나서지 않는 걸로 하지.”
그가 마지못해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렇게 할게요.”
불안감을 줄여 주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끌어안았다. 그가 나지막한 웃음을 흘리며 내 팔을 풀더니 눈을 맞추었다. 꿀이 떨어질 정도로 다정한 얼굴이었다. 카샤의 짙푸른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쳤다.
“요즘 그대는 정말….”
왜 말을 하다 말고 그래.
“이번 일로 짐작 가는 이는 없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적대적으로 굴거나 미묘한 태도를 보여 준 사람이 없었다. 진심은 알 수 없겠지만 겉으로 보인 모습들은 대부분 충실했었다. 내가 고개를 젓자 그가 걱정 어린 얼굴을 하고서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암영조를 방안으로 들일 수도 없고 정말 곤란한데.”
곤란한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 아닌가요.
“좋은 방법이 생각났어.”
“뭔데요?”
“내가 옆에 있으면 해결되는 일이지. 오늘부터 여기서 자야겠어. 내가 지켜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놀란 내 입이 벌어지든 말든 그는 흡족해 보였다.
* * *
칼립타의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에 놀란 오라버니가 달려왔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해도 그는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내가 칼립타 한 마리를 찔러 죽였다고 하며 별거 아니라 허풍을 떨었다. 그의 걱정을 불식시키느라 갖은 상황설명을 하며 진땀을 뺐다. 카샤는 정말로 그날 밤부터 달리아궁에서 잠을 청했다. 명목은 내 안전을 위한 보호였다.
그 며칠 동안 나는 그의 팔에 꽁꽁 싸 매인 채 잠에서 깨어나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는 내 이마에 굿나잇 키스와 모닝 키스를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끌어안고 잠만 청했다.
매번 키스 세례를 퍼붓던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기에 의아할 정도였다. 어스름한 새벽녘에 눈이 떠졌다. 오늘은 대망의 약혼식이 있는 날이었다.
자다가 눈을 뜨면 어느새 내 눈앞에 보이는 건 그의 단단한 가슴이었다. 내가 깨어난 걸 알아챈 카샤가 안고 있던 팔을 허리에 둘러 나를 제 얼굴 높이로 끌어올렸다.
“기분은 어떻지?”
그의 얼굴이 새벽부터 들떠 있는 듯했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아요.”
내 대답에 그가 만족했는지 매혹적인 눈웃음을 지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기분 좋은 날이야.”
“나도 그래요.”
나 역시 여기 와서 가장 좋은 날을 꼽는다면 오늘이다. 결혼이 아닌 약혼식이지만, 그와 내가 공식적으로 맺어진다는 사실이 좋았다. 오늘 약혼식이 시작되는 날이니 지금 말할까. 원래 약혼식이 끝난 직후 내 마음을 고백할 참이었는데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아마 우리 둘 다 종일 행복할 것이다.
“할 말 있어요.”
“응.”
막상 하려니 심장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난리였다. 심호흡을 몇 번 하는데 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폐하, 죄송하지만 약혼식을 준비하려면 지금부터 해도 시간이 모자라서….”
티나 목소리였다. 그가 내게 속삭였다.
“듣고 갈게.”
“그냥 나중에 얘기할게요.”
이렇게 후다닥 해치우듯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말았다. 카샤가 내 이마에 키스하며 일어났다. 그 또한 약혼식 준비를 하러 황제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우선하여 조사를 받은 티나와, 나디, 그리고 보니외 시녀들은 다음 날 돌아왔다. 강압적인 조사는 아니었으나 집요했다고 다들 혀를 내둘렀다.
시녀 중에 의심이 가는 사람들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들은 약혼식에 쏟을 시간이 대폭 줄었다며 울상을 했다. 카샤가 나간 뒤 티나가 완성된 드레스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 뒤로 나디와 시중인들이 줄줄이 들어와 바쁘게 움직였다. 향유를 끼얹은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그들이 이끄는 곳으로 가 보니 어느새 티나의 앞이었다.
티나의 의견을 따라 동대륙 비단으로 만든 드레스는 내 마음에 꼭 들었다. 동서양이 섞이며 조화로운 느낌의 새로운 드레스였다.
허리를 코르셋으로 조여 밑으로 풍성하게 퍼지는 기존의 드레스와는 달랐다. 허리선에서부터 늘씬하게 라인이 쭉 빠졌다. 흰색 비단 위로 우아하고 매력적인 디자인의 레이스를 겹쳐 보석이 많이 없음에도 화려하면서 기품이 넘치는 드레스가 만들어졌다.
분홍색과 보라색 수국 생화에 진주가 방울방울 달린 코르사주가 가슴 부분에서 드레스 밑단까지 크기를 달리하며 둘레를 돌아 장식하고 있었다.
나디는 고심하더니 잘게 옆머리를 땋아 반 묶음 하여 오팔 장식이 된 비단 끈으로 고정하고 나머지는 길게 늘어뜨렸다.
보석은 물방울 모양의 핑크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귀걸이와 목걸이를 착용했다. 마지막으로 머리 위에 작은 다이아몬드 보석들이 무수히 박힌 티아라를 올리고 거울을 보았다. 그 속에는 정말로 동화 속의 공주님 같은 사랑스러운 여인이 서 있었다.
“세상에, 요정이 있다면 아마 그건 공주님일 거예요.”
티나가 나를 보고 감격하며 손바닥을 마주쳤다.
“티나, 우리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랑스러운 천사를 탄생시킨 거예요.”
나디가 이마에서 구슬땀을 훔치며 성취감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샬리 언니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보니가 볼을 붉히며 몽롱한 얼굴을 했다. 거울을 보며 미소를 짓자 나부터도 그 모습에 홀랑 반해 버릴 것 같았다. 이러다 나르시시스트가 되어 버릴지도 모르겠군. 거울에서 눈을 떼고 넋이 나간 사람들을 손뼉을 치며 정신을 차리게 했다.
“여러분, 정말 고마워요. 오늘부터 달리아궁 창고 개방입니다. 약혼식이 무사히 끝나면 같이 먹고 마시고 즐겨요.”
며칠 내도록 달리아궁 파티를 여는 건 어떨까.
“공주님, 다 되었어요. 식장으로 가야 할 시간이에요.”
시중인들의 도움을 받아 달리아 궁을 나오자 평소보다 배는 큰 아주 화려한 의전용 마차가 앞에 당도해 있었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아레인이 에스코트를 위해 다가와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눈동자는 넋이 나가기 직전이었다. 나 자신조차 놀랄 정도였으니 멍한 상태가 이해는 간다. 불현듯 그가 이전의 샬리를 이성으로 대한 적이 있어서 기분이 묘해졌다. 또 샬리한테 반하면 안 되는 일이지. 그 앞에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보다가 반합니다. 유부녀한테 반해 버리면 큰일 나요. 아레인 경.”
내가 웃으며 농담을 건네자 아레인이 묘한 표정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재밌다고 생각해서 한 말이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농담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다만 반하기 한참 전에 이미 사로잡힌 상태니 그 농담은 별 소용이 없게 되었군요.”
그가 눈을 휘며 미소 지었다. 농담에 농담으로 받아친 건가?
“그건 농담으로 칠 수가 없겠는데요. 너무 슬픈 말이에요. 아레인은 농담하면 안 되겠어요.”
“다음에는 재밌는 농담을 가져오겠습니다.”
“농담은 헨리가 잘하니깐 옆에서 배워 봐요.”
“…….”
그는 말없이 나를 마차로 에스코트했다. 마차 안에는 휘황찬란한 금장식이 내부를 채우고 있었다. 식장으로 이동하는 마차 안에서 심호흡을 했다. 손에 땀이 배기 시작했다. 잠시 장갑을 벗었다.
[축하해]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뭐지, 어디서 들려온 소리지? 마차 안을 두리번거리는데 당연히 나 말고는 없었다. 루이 같은 사람이 또 있나? 있었으면 아레인이 벌써 알아챘을 것이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내가 처음 이곳에서 깨어났을 때 들었던 환청이라고 생각했던 소리였다.
손이, 몸 전체가 떨리기 시작했다. 샬리오니일까? 그녀가 돌아온 것인지, 무슨 뜻으로 말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왜 이제야 이런 소리가 들리는 거지. 아예 잊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깨어난 첫날 들었던 이후로 한 번도 듣지 못했으니 말이다.
“샬리오니?”
소리 내어 말해 보았지만, 그 환청 같은 목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귀신 곡할 노릇인데. 이게 무슨 일이지, 나를 축하한다니. 대체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속이 답답했다.
정말 샬리오니라면, 나…. 혹시 나, 돌아갈 수 있나….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심장이 크게 요동치며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환희에 참과 동시에 기분이 급격히 땅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