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54
똑똑.
“폐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들어와.”
시종이 베드트레이에 간단한 아침 식사를 들였다. 그가 젖은 냅킨으로 손을 닦더니 고소한 향내를 풍기는 곡물 빵을 나이프로 잘게 자르기 시작했다.
왜 저렇게 작게 썰지? 저러면 먹기 더 불편할 것 같은데. 의문을 뒤로한 채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한입 크기의 빵을 집어 들더니 무화과 잼을 듬뿍 떠 발랐다. 그리고는 내게 내밀었다. 정확히는 내 입술 바로 앞으로. 이거 입으로 받아먹으라는 건 아니겠지. 내가 손으로 받아들려고 하자 그가 내 손을 옆으로 피했다.
“왜…. 왜 그래요?”
“안 먹나?”
그가 다시 내 입술 바로 앞에 빵을 내밀었다. 너무 듬뿍 뜬 나머지 잼 한 덩어리가 베드트레이 위로 뚝 떨어졌다.
“제가 알아서 먹을 수 있는데….”
말을 꺼내 보았지만, 눈앞의 빵 조각은 미동이 없었다. 두 번째 잼 덩어리가 떨어지기 전에 입을 벌리자 빵 조각이 입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가 흡족한 얼굴로 눈웃음을 치며 잼이 묻은 손가락을 혀로 핥아 올렸다.
“달아.”
자연스럽게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과 상의를 풀어헤친 모습은 그의 행동과 더불어 자극적이었다. 그럼 잼이 달지, 짤까요. …이거 먹으라는 건지, 먹고 체하라는 건지. 너무 치명적인 모습이라 바르게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알고 하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저런 것도 타고 나는 건가. 무슨 화학물질을 시도 때도 없이 뿜어내고 그러지.
그가 다시 빵 조각에 손을 뻗기에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빵에 잼을 바르고 넣고를 몇 번 반복하자 입 안이 가득 찼다. 양 볼이 빵빵해진 모습을 일부러 그에게 보이며 빵을 우물우물 씹었다. 그 모습을 본 카샤가 갑자기 상체를 숙이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어깨를 들썩였다.
웃음 참고 있는 거 같은데.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먹고 있는데. 저 어깨를 한 대 치고 싶어졌다. 아니다. 때리다가 내 손목이 나갈지도 모른다.
“그만 웃어요.”
내가 푸딩으로 손을 뻗자 그가 그제야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정말 큰일이군. 어쩌지, 그대는 정말….”
그가 말꼬리를 흐리더니 내 디저트를 빼앗아 들었다.
내 푸딩을,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카샤가 내게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나는 디저트 도둑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그가 빼앗은 푸딩을 한 스푼 뜨더니 다시 내 앞으로 내밀었다.
이것도 또 먹여 준다고? 나는 심각한 얼굴로 디저트를 노려보았다. 양이 적으니깐 몇 번 눈 딱 감고 먹으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문제의 잼도 없고, 스푼으로 떠서 주니깐 그의 손가락에 묻을 일도 없을 것이다. 입을 벌리자 그가 부지런히 스푼을 놀려 입 안으로 떠 넣었다. 한 스푼, 두 스푼 떠 넣을 때마다 행복한 표정인데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꼭 먹여 주고 싶었어.”
그러셨군요. 민망해서 그렇지, 먹여 주니 편하긴 합니다. 참새처럼 마지막 한입을 찹 받아먹으며 이제 다 끝났나 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데 그가 제 몫의 디저트를 또 드는 게 아닌가!
설마, 아닐 거야. 본인이 먹으려고 하는 거겠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보는데 결국 스푼이 내 앞으로 당도했다.
“카샤. 그만 먹을래요.”
“왜? 디저트 좋아하지 않나.”
“배가 너무 불러요. 이제 더는 못 먹어요.”
“고작 그만큼 먹고?”
눈썹이 아래로 쳐지며 크게 실망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사람의 호구본능을 자극했다.
“지금은 배부르니까…. 다음에.”
그가 그제야 만족한 모습으로 디저트를 내려놓았다. 즐거워야 할 식사시간이 요망해지고 있었다.
3. 약혼식
티나는 약혼 드레스에, 나디는 머리 모양에 칼을 갈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예행연습에 몸이 천근만근 녹초가 다 될 지경이었지만 나를 포함한 달리아궁 사람들은 비장한 마음으로 약혼식을 준비했다.
아침 식사를 입 안에 밀어 넣고 아무 생각 없이 오물거렸다. 식사시간만이라도 뇌를 순수하게 비우고 싶었다.
뒤에서는 나디가 머리 모양을 봐주고 있었고 앞에서는 티나가 보석을 내 얼굴과 매치시켜 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보니가 티나 옆에 앉아 다른 보석들을 건네주었다.
스륵-
멍하니 식사를 계속하는데 귀에 이상한 소리가 잡혔다. 다른 사람들은 지금 하는 일에 열중하느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검술 훈련을 하며 루카의 무시무시한 단도를 피하다 보니 주변 소리나 움직임에 꽤 민감해진 상태였다.
스르륵-
이게 뭐지. 양쪽에서 들리는데? 방안을 살피려고 고개를 돌리자 나디가 타박했다.
“공주님, 흐트러져요. 움직이면 안 돼요.”
기분이 이상하다. 침실 안이라 아레인은 문밖에 대기 중이었다. 침의 차림이라 들어오라고 할 수도 없고.
“나디, 잠시만.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요.”
방안에는 둘 말고도 하녀와 시녀들이 약혼식 준비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들 멈춰 봐요.”
내 말에 모두 그 자리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일시 정지가 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모두 기막힐 정도로 교육을 잘 받았구나.
스스-
스르륵-
양옆에서 무언가 기어 다니는 소리가 났다. 누구도 미동 없이 조용한 가운데 나는 종아리에 항시 매달아 두었던 포켓에서 단검들을 빼내 양손에 쥐었다. 먼저 가까이에 소리가 들리는 왼쪽으로 다가가자 침대 밑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재빠르게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 손에 잡힐 정도로 크기가 작고 얇은 뱀이었다.
작아서 그런 것인지 머리를 이리저리 기울이며 다가오는 속도가 무척이나 빨라 순식간에 뱀이 내 발 앞으로 다가왔다.
뱀이 왜 여기에? 라는 의문은 둘째치고 그 크기에 안심한 나는 내 앞으로 이리저리 기어오는 뱀의 머리 뒷부분을 조준한 뒤 단검으로 세게 찔러 넣었다. 누군가 뱀을 보더니 헛숨을 들이켰다. 언제 멈춰있었냐는 듯 사람들이 전부 내 앞으로 와 나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공주님, 그거 맹독으로 유명한 칼립타잖아요! 조심해야 해요!”
“한 마리가 더 있는 거 같은데.”
단검에 찔린 뱀은 미약하게 몇 번 꿈틀거리더니 축 늘어졌다. 왠지 자신감이 생긴 내가 나머지를 죽이려고 하자 사람들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 공주님은 나서지 마세요. 자네 가서 아레인 경을 불러오게.”
나디가 하녀를 시켜 아레인을 불러오게 했다.
“무슨 일이….”
아레인이 들어오더니 나를 보고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참, 나는 아직도 침의 차림이었다. 옆에 있던 티나가 나를 침대 속으로 밀어 넣었다. 가운이 저 멀리 떨어져 있던 탓이다.
“아레인경, 칼립타가 있습니다. 여기 한 마리는 공주님이 죽이셨어요. 다른 한 마리가 더 있습니다.”
그가 오른쪽으로 뚜렷한 구둣발 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기다란 수납장 아래에 있었는지 발소리를 듣고 칼립타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크기가 작고 얄팍해서 그런지 움직임이 빨랐다. 아레인의 앞으로 기어온 칼립타의 머리 부분을 그가 구두코로 찍어 내렸다.
꼬리가 맹렬히 움직였지만, 머리 부분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가 손으로 머리 부분을 꾹 누른 채로 들어 올렸다. 꼬리가 아레인의 팔목을 감으며 몸부림을 쳤다.
“칼립타라니…. 내부 보안에 문제가 있군요. 여기 있는 시녀와 하녀들을 전부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샬리.”
그는 내가 죽인 칼립타까지 마저 수거하더니 허락을 구하듯 바라보았다. 곧 며칠 뒤면 약혼식인데 이들을 전부다? 내가 고민하는 바를 알아챘는지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녀들은 시종장이 다시 교체하는 게 좋겠군요.”
내가 나디와 티나, 그 외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좋은 사람들인데, 이 중에 독사를 풀어놓은 사람이 있다고. 시녀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티나나 나디 말고는 확실히 믿는다고 자신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 둘을 믿으니 제외해 달라고 하면 나머지는 못 믿는다고 실토하는 격이었다.
“오래 걸리는 건 아니죠. 조사만 하는 거죠? 그리고 보니는 아직 어린데….”
“우선 조사만 할 겁니다.”
“빠르게 조사받고 끝내는 게 좋겠습니다. 아레인 경. 우리부터 먼저 조사받을 수 있게 해 주세요.”
나디가 티나와 보니를 가리키며 아레인을 재촉했다.
“이제 소속이 달라져서 제 말을 들어줄지 모르겠군요. 우선 달리아궁을 임시로 봉쇄하겠습니다.”
제국에 오고부터 아레인의 오른쪽 귀에 달려있던 까만 오닉스 같은 보석을 누르자 잠시 후 황실 근위 기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저게 뭐지? 통신 마법이 걸려있는 귀걸이? 아레인이 사실 정황을 알리고 그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넌 폐하와 암영조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너는 시종장에게 가서 당장 보낼 수 있는 시녀와 하녀를 차출해 달리아궁으로 데리고 오라고 전해. 나머지는 이들을 데려가라.”
그들이 하녀와 시녀들을 한 명씩 데리고 나갔다. 당장 방에는 나와 아레인밖에 남지 않았다. 이불에 둘둘 말려있는 내 꼴이 우스웠다.
“아레인, 저기 의자에 걸쳐져 있는 가운 좀 가져다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그가 가져다준 가운을 껴입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혹시나 수상해 보이던 시중인들이 없었습니까?”
“전부 나한테 잘해 줘서,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어요.”
시녀 중에서 의심 가는 이들은 없었다. 절반이 리노아에서, 다른 절반은 황궁에서 보내 준 시녀들이었다. 나머지는 황궁의 하녀들이었는데 그녀들도 내게 하나같이 친절했었다. 암살자는 생각했어도 뱀이라니, 물리면 즉사라고 하니 뒤늦게 소름이 돋았다. 나 말고 시녀들이 물리기라도 했으면 그것 또한 화가 나는 일이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칼립타는 맹독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즉사입니다. 암살방법치곤 가능성이 적긴 합니다만 이게 어떻게 황궁 내로 들어온 것인지 모르겠군요. 검문대가 한바탕 뒤집힐 것 같습니다.”
검문대는 오가는 하녀 하인들과 황궁과 거래하는 물품거래상들을 검문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검문대를 지나지 않는다. 신분 확인만 할 뿐.
“귀족들이 들여왔을 가능성은 없나요?”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벌어질 만한 일이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잠잠해서 이상할 정도였다.
“물론 귀족 중에서 칼립타를 들여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은 여기에 내통한 자들도 있다는 얘기지요.”
벌컥-
문이 거칠게 열려 깜짝 놀랐으나 그럴 사람이 한 명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절로 힘이 들어가 있던 목과 어깨에서 긴장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카샤가 빠른 속도로 다가와 나를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뒤로는 오랜만에 보는 암영조 루이가 시립해 있었다.
“누가 칼립타를 풀었다고?”
그가 나를 이리저리 앞뒤로 둘러보며 아레인에게 물었다.
“예. 두 마리였습니다. 샬리의 시중인들을 조사를 위해 모조리 기사단에 넘겼습니다. 달리아궁은 임시봉쇄를 해놓은 상태입니다.”
“그 뱀들은 어디에 있나.”
“황실기사단에 같이 넘겼습니다.”
“알겠다. 나가봐. 루이는 조사를 시작해라.”
그는 품고 있던 노기를 한숨을 내쉬며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