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53
“테일러 오라버니?!”
“샬리, 잘 지내고 있었어?”
그가 잘생긴 얼굴로 씩 웃자 모든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고작 몇 개월이었는데도 다시 만나니 너무 반가웠다. 나는 교양도 품위도 다 내버리고 달려가 그에게 안겼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 오랜만에 네 어리광을 보니 다시 왕국으로 데려가고 싶구나.”
“사절단으로 오신 거예요?”
“그래. 어마마마도 오고 싶어 하셨는데 발목을 다치셨어. 아, 이건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깜짝 놀라자 오라버니가 깜박했다는 듯 난감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로요? 얼마나 다치셨는데요?”
“정원에서 산책하시다가 땅 위로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셨어. 잘못 헛디뎌서 발목을 크게 삐었거든.”
안 그래도 요즘 테너 관절염 신경 쓰느라 보스웰리아를 많이 구해두었는데 오라버니 편에 어머니 것을 챙겨 보내야겠다.
“요즘 네 소문이 리노아까지 전해져오는 거 알고 있어?”
“무슨 소식이요?”
“독감 말이다. 네가 편지로 알려 줘서 우리도 엘더베리로 독감을 막기는 했다. 예방 격이었으니 거의 피해가 없었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야. 매번 겨울마다 독감 같은 질병으로 병사하는 왕국민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리노아는 거의 피해가 없었다는 소리에 안심이 되었다. 제국이 본격적으로 엘더베리를 모을 때 혹시 몰라 리노아에도 엘더베리의 효능을 적은 편지를 보냈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네가 그런 지식이 있는지 몰랐구나. 언제 알았던 거야?”
“이것저것 공부하고 어쩌다 보니 알게 되었어요.”
내가 얼버무리자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겠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제국은 지낼 만한 거지? 괴롭히는 사람은 없고?”
“다들 친절하고 잘해 줘요. 제국민들도 저를 좋아하구요.”
“들었다. 조금 전에도 제국민들 살피러 갔다 왔다던데. 우리 샬리가 다 컸네.”
그가 나를 대견하다는 듯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참. 오라버니, 곧 레이시즈 왕세자와 티타임이 있는데 함께 하실 거죠?”
“포르토의 그 녀석? 벌써 왔나 보네. 그런데 너랑 티타임은 왜.”
그가 삐뚜름한 미소로 응답했다. 어라, 레이시즈는 테일러 오라버니와 친한 듯이 얘기하더니, 이 반응은 영 아닌데?
“사이좋은 거 아니었어요?”
하긴, 왕세자들끼리 사절단이나 특정한 일 아니면 몇 번 만나지도 않는데 친해 봤자 얼마나 친하겠는가. 과거에 친했다던 페리안과의 사이만 봐도 친한 비즈니스 관계 이상은 아니었다.
“내가, 그 녀석이랑?”
“그럼요? 왜 그렇게 싫어하시는 거 같죠.”
“싫어하는 거 맞다.”
그가 내키지 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
“둘이 무슨 일 있었어요?”
“그놈이 내 꽃사슴을 죽여 버렸어.”
네? 설명이 더 필요한데요. 오라버니.
“넌 기억 안 나겠지만 2년 전까지만 해도 매년 왕국들끼리 사냥대회를 열었거든.”
제국이 왕국에 이간질하기 전을 말하는 건가.
“그래서요?”
“2년 전 사냥대회에서 그놈이 내 꽃사슴을 죽여 버렸어. 그건 네 선물이었는데 말이다. 내가 생포해서 너 주려고 했는데 그놈이 다 망쳐버렸지.”
“이제는 용서해 주세요. 시일이 많이 지났잖아요.”
“그뿐이 아냐. 그렇게 네 선물을 망쳐놓고 네게 청혼서를 넣으려고 하니까 내가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겠느냔 말이다.”
레이시즈가 했던 말이 이거였구나.
“청혼도 넣지 않았고 아무 일 없었으니 이제 괜찮지 않아요?”
왕세자가 청혼서를 보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내 말에 그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 이제 풀 때도 되었지. 티타임에 참여하마.”
* * *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둘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티타임은 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혼자 심기가 상해 있는 줄 알았는데 레이시즈를 보니 딱히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샬리오니 공주가 남자를 밥 먹듯이 바꾼다고 하지 않았었나.”
정말 저렇게 말했어?
“평범한 남자들은 성에 안 차니까 당연한 거 아닐까? 그 뜻으로 이야기한 거다.”
오라버니, 샬리오니 마음을 넘겨짚는 거 문제 있습니다. 그보다 저렇게 말하면 레이시즈한테 평범한 남자라고 돌려 까는 거랑 뭐가 달라. 역시나 그의 눈썹 한쪽이 꿈틀거렸다.
“그렇다면 나는 상관이 없었을 거 같은데.”
“그건 두고 볼 일이지. 아, 이제 상관없나?”
아니, 둘이 왜 그러세요. 이럴 거면 왜 티타임에 참여한다고 한 거야. 나는 화제전환을 시도했다.
“레이시즈, 제게 물을 것이 있다 하셨지요.”
“레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저도 샬리라고 부르고 싶군요.”
“그렇게 해요. 레이.”
오라버니가 코웃음을 쳤다.
“엘더베리를 독감에 걸리지 않은 사람도 섭취하던데 그 이유가 있습니까.”
“엘더베리가 면역력을 올려 주기 때문에 예방 효과가 있어요. 독감 균이 몸속에 포진해도 쉽게 이겨낼 수 있어요. 그래서 환자 주변인들은 꼭 섭취하게 하고 있고요.”
“그런 이유였군요. 정말 놀랍습니다. 값도 상당히 저렴한 편이니 신전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소식이죠. 여러모로 좋은 열매로군요.”
“포르토도 얼른 독감을 이겨냈으면 좋겠습니다. 신전이 나서기 전에요.”
“리노아도 이번에 신전에 휘둘리지 않아서 좋았다. 아예 신전이 나설 기회가 없었지.”
오라버니가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각 나라는 크리하엘을 믿는 백성들 덕분에 종교와 뗄 수 없는 관계였으며. 종교에 제 나라의 권력이 조금이라도 넘어가지 않게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건 루이보스가 아닙니까. 제국이 동대륙의 피오신나 왕국과 임시로 거래를 틔웠다더니 그중에 하나인가 보죠?”
티타임을 즐기는 영애들도 잘 모르던데 왕세자가 루이보스에 대해서 꽤 잘 알고 있었다.
“루이보스를 잘 알고 계시는군요.”
“아무래도 포르토는 바다와 인접해 있으니까요. 단교 중이라도 이리저리 흘러들어오는 동대륙 물품들이 꽤 많습니다.”
음, 아무래도 바다를 끼고 있어 밀수업자들을 많이 접할 테니 그럴 만도 했다.
“그 머리 장식도 동대륙 것처럼 보이는군요. 처음 보는 디자인인데.”
그가 내 머리 모양을 장식하고 있는 비녀를 보고 흥미로운 눈을 했다.
“맞아요. 폐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오라버니가 나를 오묘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제야 실감이 나는 것 같다. 정말 영영 떠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렇게 사절단으로 자주 오시면 되잖아요.”
“사절단 행사가 얼마나 된다고, 더군다나 왕세자일 때나 이렇게 움직일 수 있지.”
그건 그랬다. 왕들은 이동이 극히 드무니 말이다.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는 건 어떻습니까. 리노아에서 포르토가 훨씬 가까운데 말이죠.”
레이가 웃으며 농담처럼 건네는데 나는 괜히 섬뜩해져서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그때 아레인이랑 눈이 마주쳤다. 그가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다시 테이블 위로 시선을 돌리자 오라버니와 레이가 다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 사람들 다시는 마주치게 하면 안 되겠다.
* * *
아침 해가 눈이 부셔서 눈 사이로 힘이 들어갔다. 남향도 이런 남향이 없어요. 일어날까 싶어 기지개를 피려는데 몸이 어딘가에 꽁꽁 묶인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위에 눌린 것인가 생각하다가 이런 비슷한 일이 일 전에 한 번 있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감겨 있던 눈을 부스스 뜨니 역시나 단단한 두 팔에 몸이 감겨 있었다. 다만, 저번과 달리 카샤가 뒤에서 껴안고 있었다.
따끈한 체온이 등 전체를 데우고 있었다. 방금 일어났는데 다시 노곤해지기 시작했다. 멍한 눈을 깜박거리다가 그의 자는 얼굴이 보고 싶어 조심스레 몸을 틀었다. 몸을 한 바퀴 돌렸는데 그는 다행히 깰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가 눈 감은 모습은 처음 본다. 기다란 속눈썹이 음영이 져 너무 예뻤다.
저 매끄럽고 부들부들한 머리칼을 만져보고 싶은데 팔이 갇혀 있어서 눈동자만 굴렸다. 자는 모습도 참 단정하고 금욕적으로 보인다.
다만, 저 흐트러진 머리칼 덕분에 나른하고 관능적인 분위기도 함께였다. 한참을 그 얼굴을 감상하고 있는데 그의 속눈썹이 한차례 파르르 떨더니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더니 천천히 초점을 찾으며 부드럽게 휘어지기 시작했다.
“잘 잤어요?”
“어제 너무 늦게 왔는지 그대가 이미 잠들어 있더군.”
허스키한 잠긴 목소리가 아침부터 섹시하고 난리였다.
“어떻게 또 내 침대에서 자고 있어요?”
“말 한마디 못해 보고 가려니 억울해서 자는 모습만 보고 가려 했는데….”
그대로 같이 잠들었다는 건가. 그가 나를 가만히 응시하더니 엄지로 내 뺨을 쓸었다.
“어제 테일러 왕세자가 왔더군.”
“네. 오랜만에 보니까 정말 좋았어요.”
“포르토의 레이시즈 왕세자와도 같이 티타임을 했다지?”
그는 무심한 듯 말을 넘겼지만, 말에 뼈가 있었다.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래?”
그의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카샤가 훨씬 잘났지만요.”
“흐음….”
다행히 그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당신만큼 멋진 남자는 본 적이 없어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내게 이렇게 다정하고 진심으로 위해 주는 멋진 남자가 또 누가 있을까.
“…….”
그가 대답 없이 안고 있던 팔에 힘을 주어 나를 바짝 끌어당겼다. 카샤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도 미동 없이 그 상태로 계속 있었다. 그 자세 그대로 꿈쩍도 안 하고 가만히 있고 싶었다. 안겨 있는 품은 아늑하기도 하고 갑갑하기도 하고 그랬다.
“배고프면 말해.”
“왜요?”
“그전까지 계속 이러고 있으려고.”
“좋아요.”
나도 한쪽 팔을 겨우 빼내서 그를 마주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같이 마주 닿아 있으니 그가 웃을 때마다 내 몸도 같이 울렸다.
“아기 사슴이 이제야 완전히 경계를 푼 거 같군.”
맞아요.
“그때 하려던 말이 뭐였지? 하마터면 잊을 뻔했어. 그대가 집무실로 찾아왔을 때 말이야.”
“그건…. 저도 잊어버렸어요.”
분위기가 좋은데 지금 말할까.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다. 그에게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약혼식 날 고백하고 싶어서 참고 있었다. 아마 그의 기쁨이 두 배가 되지 않을까. 얼른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 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문질렀다. 맨가슴이 아니라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 샬리…. 그만해.”
그가 멈칫하더니 경고하듯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름대로 애교 부린 건데 안 먹혔나. 소심해진 내가 그를 보려고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하아…. 정말, 미치겠군.”
그가 제 입술을 한 번 꾹 깨물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되겠다. 그냥 식사나 하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의 줄을 당겼다. 내 애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