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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52화 (52/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52

* * *

아레인과 헨리의 말에 따르면 친위대는 아주 흔쾌히 약혼식 행진에 참여한다 했다. 내가 친위대에게 참여 여부를 묻기도 전이었다.

좀 미심쩍었다. 그들은 과거에 친위대에서 각자 암영조 조장, 친위대장이었다. 혹시라도 강제로 참여하라고 윽박지르면 모를 일이 아닌가. 이번 일로 황제에 대한 충성도가 떨어질까 봐 걱정되었다. 그러나 루카가 당연하다는 듯 내게 그 이유를 일러주었다.

“폐하께서는 친위대 본연의 임무만 내리시죠, 그 외에는 딱히 간섭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약혼식 행렬은 억지로 할 필요 없어요. 내키지 않으면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친위대장에게 전해 주세요.”

나는 지금 친위대장과 딱히 친분이 없어서 루카에게 대신 말을 전했다.

“임무인데요. 뭘, 우리는 황제 부부를 지킬 의무가 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도 행진에 참여하면 경호와 더불어 행진 자세나 나아가는 방향 같은 예행연습이 필요했다. 그걸 꽤 귀찮게 여기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들은 그것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쨌든 나는 루카한테 친위대장에게 꼭 말을 전해 달라 당부했다. 체력 훈련을 끝내고 기본 검술에 들어가기 전 잠시 쉬고 있었다. 헨리가 내게 딸기잼이 든 머핀을 건네었다. 한창 혹사한 몸은 입맛을 잃어 고개를 젓게 했다.

“샬리가 만든 건 다 맛있네요. 천하의 아레인까지 먹게 했으니까 아주 훌륭합니다.”

나는 대답할 힘도 없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본격적으로 속성 검술을 익힐 건데, 특히 샬리가 원하는 대로 암습 방어 목적으로 연습할 겁니다.”

“좋아요.”

“연습하다가 단도에 잘못 맞아서 허망하게 죽지 않도록 합시다.”

“뭐요?”

헨리가 씩 웃으며 농담이었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얄미워서 꿀밤을 때리고 싶었지만, 선생님이라서 참았다.

“샬리 혼자 방어하는 방법과 아레인과 합동으로 방어하는 방법 두 가지를 나눠서 배울 겁니다. 아레인이 호위기사니까 같이 호흡을 맞춰서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이 타이밍이 안 맞으면 혼자서 방어하는 것보다 못하니까요.”

“알겠어요.”

“어디 보자, 내가 나쁜 놈 역할을 해야 하나? 나는 기습 이런 건 영 젬병이라서요. 아, 이런 건 아레인이 잘하는데 저 녀석은 샬리랑 합을 맞춰야 하니 뺄 수도 없고, 아레인, 루이한테서 밑에 놈 한 명만 빌려 달라고 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냐?”

“지금 폐하께서 내린 명령으로 전부 정보취합 중이라 힘들 텐데.”

“그럼….”

헨리가 친위대를 매서운 눈으로 훑었다.

“아하, 저놈이 있었지. 투알린까지 갔다 온 놈인데 깜박했네.”

헨리가 루카를 큰 소리로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너 자객 역할 좀 해라. 이 중에선 네가 제일 낫잖냐.”

저렇게 덩치 크고 순박해 보이는 루카가 자객 역할이라니 정말 안 어울린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루카가 내 검술 수업을 도와주게 되었다.

헉….

어어….

악!

한 시간 전에 했던 내 생각을 철회한다. 루카는 진짜 암살자처럼 신명 나게 나를 몰아갔다. 그가 매섭게 날리는 단도 덕분에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헨리가 했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나마 살기가 없어서 다행이지. 그는 쉴 새 없이 내게 단도를 날리며 사람을 바짝 긴장하게 했다. 내가 쳐내지 못하는 것은 옆에 있던 아레인이 봐주며 다른 곳으로 쳐내었다.

“역시 속성엔 실전처럼 감각 익히는 게 최곱니다. 샬리, 지금 쭉쭉 늘고 있어요.”

헨리 선생님, 까딱했다간 제가 요단강을 건너게 생겼습니다. 농담이었다는 양, 손사래를 친 건 뭐였나요. 아무리 아레인이 옆에서 막아준다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였다. 하나라도 제대로 못 막아내었다가는 몸에 정말로 박혀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검술을 늘리는 데 한몫했으리라. 나는 기습방어훈련을 마치고 바닥에 대자로 뻗어 버렸다.

와, 장난 아니네. 이거. 아슬아슬하게 귓가를 스치며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흩날리기도 했고, 쳐내다가 손가락에 닿으며 살갗이 베여 따끔하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을 생사를 오가는 위험 속에서 훈련하다 보니 어느새 내 실력이 부쩍 늘어 있었다. 그렇게 무섭고 살 떨리던 훈련이 헛되지는 않았다. 일주일 뒤 황궁에서 처음으로 목숨의 위협을 받고부터는.

* * *

“샬리, 오늘 정말 청초하고 사랑스럽네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아요.”

“오늘 힘 좀 줬는데요? 제국민들이 순백의 천사님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어요.”

엘리제와 라이가 각각 한 말이었고, 그 말들은 타나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티나가 잡았던 콘셉트가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에. 보석장식 하나 없이 새하얗고 활동하기 편한 간결한 드레스였으나, 중간중간 우아한 모양의 레이스들이 밋밋한 부분을 지우고 고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제도 외곽지역을 도는 것에는 테너도 찬성했다.

“라이올라 영애와 많이 친해지셨나 보군요. 좋은 일입니다. 대외활동도 같이 행동한다는 건 그만큼 각별하게 보일 것이고요.”

내 곁에 사교계의 꽃이 서는 것은, 나를 지지하는 구도로 보여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해가 될 일은 없다고 했다.

“그럼 출발할까요?”

우리는 황궁 마차를 타고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제도 외곽 길로 들어섰다. 내가 온다는 소식이 미리 돌았는지 제국민들이 모두 나와서 손을 흔들며 거창하게 우리를 맞이했다. 너도나도 공주님을 외치자 그 환영 인사에 파묻혀 버릴 정도였다. 그들에게 엘더베리를 조금씩 나눠주는데 라이가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말로만 들었지, 직접 체험하니까 장난이 아니군요. 공주님의 인기를 크게 실감했습니다.”

라이가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환자가 있어 나오지 못하는 집에도 들러 엘더베리를 나눠주었다. 제국민들은 가는 곳마다 졸졸 따라와서 우리를 관찰했다.

그 꼬리는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해서 환자를 살폈다. 환자는 어린아이였는데 막 고비를 넘긴 것인지 고생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이의 어머니가 내 손을 꼭 잡고 연신 고맙다며 눈물을 흘렸다.

“정말 아이를 이대로 보내야 하나 싶었어요. 신전 갈 돈도 없고 막막했었는데….”

“도움이 되어서 정말 기뻐요. 아이는 이제 괜찮은가요? 엘더베리를 소량 가져왔는데 이른 시일 안에 완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엘더베리를 나눠주고 아이의 집을 막 나오는데 우리 앞에 큰 그림자가 졌다. 올려다보자 웬 훤칠한 청년이 나를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곱슬기가 있는 진한 금발에 눈동자는 녹안이었다. 단정하고 자연스럽게 귀태가 흘러나왔으며 아이돌 가수처럼 꽤 귀여운 상을 하고 있었다.

“내가 본 초상화가 공주의 아름다움을 다 담지 못한 것 같군요. 소문은 잘 믿지 않는 편인데 오히려 축소된 것 같습니다.”

훤칠한 청년이 내게 말을 건네자 황실 기사가 그를 막아섰다.

“신원을 먼저 밝히십시오.”

“이런, 실례했습니다. 나는 이미 초상화로 안면이 있다 보니”

그가 멋쩍게 웃으며 소매에 손을 넣더니 무언가를 내밀었다.

“레이시즈 데크람 포르토 입니다. 레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청년이 신원을 밝히며 소매에서 화려한 패를 내보이자 기사가 물러났다.

포르토면, 왕족이 아닌가. 이름도 낯익은데…. 왕족 계보에서 본 기억이 난다.

“포르토 왕국의 왕세자십니까?”

그러자 그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지며 환한 웃음을 흩뿌렸다. 눈웃음이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타국의 왕세자가 여기엔 왜 온 거지.

“엘더베리의 효능을 살피러 들렸습니다만 공주님이 방문하셨다길래 물어볼 것도 있고 인사할 겸 공주님을 찾았습니다.”

그가 내 손등에 정중히 입을 맞추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다른 이들을 둘러보았다.

“이분들은 제국의 아름다운 영애분들로 보이는군요.”

왕세자가 시선을 주자 라이와 엘리제가 그에게 인사했다.

“제냐크 공작가의 장녀 라이올라 입니다….”

“루스타인 백작가의 차녀 엘리제입니다.”

“미인들을 이렇게 한 번에 만나다니 제가 오늘 운이 좋군요. 사석에서는 레이라고 편하게 불러 주십시오.”

그가 소탈하게 굴며 화답했다.

“포르토 왕세자께서 제국까지는 어쩐 일이신가요?”

“지금쯤이면 다들 도착했을 텐데요. 공주님의 약혼식의 사절단으로 왔습니다.”

아, 깜박하고 있었다. 곧 약혼식이니 사절단들이 도착할 때가 되긴 했다.

“그렇군요.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곳엔 엘더베리의 효능을 살피러 오셨다구요.”

“제국이 엘더베리로 독감을 단시일에 잡았다는 얘기가 돌아서 말이죠. 지금 포르토도 그 때문에 골치입니다. 신전이야 실컷 퍼져야 나서는 이들이 아닙니까.”

여기나 거기나 신전의 행태는 똑같구나. 당연히 그 꼴을 지켜볼 수는 없지.

“제게 물을 일이 있다 하셨는데 궁금한 점이 있으시다면 아는 선에서 전부 답해드리겠습니다.”

“그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서서 얘기할 것이 아니니 돌아가서 마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떻습니까. 저도 어차피 황궁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으니까요.”

“약혼을 축하하러 오신 귀빈의 대접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즉석에서 티타임이 결정되었다. 참여 여부를 묻기 위해 라이와 엘리제를 돌아보자 라이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말씀들 나누세요.”

왕세자가 어색해서 그런가. 내가 의문을 띄자 그녀가 내게 귓속말을 했다.

“모르는 주제를 이야기하는데 인형처럼 가만히 있을 바에야 자리를 피하는 게 낫답니다.”

라이가 웃으며 물러났다. 그녀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마차를 나눠 탔다. 황궁에서 올 때 한 마차를 이용했기 때문에 황궁 마차를 그녀들에게 내어주고 나는 레이시즈의 마차를 얻어 탔다.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 전에 들었던 것과 많이 다르군요.”

“그 얘기는 아까도 하셨어요.”

“아, 외양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듣기론 공부보다 놀기를 좋아하고 남자들도 자주 바꾼다고 들었는데 어쩌다 황제한테 갈 생각을 했습니까?”

콜… 콜록…. 사레가 들려 주먹으로 가슴을 내려쳤다.

“어디서 그런 얘기를….”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테일러가 그러더군요. 이 정도도 감당 못 할 거면 청혼서 넣지 말라고요. 페리안 왕자가 거절당했다길래 슬쩍 물어봤더니 그리 대답하지 뭡니까.”

테일러 오라버니…. 왜 저렇게 샬리오니의 행실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셨어요. 솔직해도 너무 솔직하잖아!

“그러셨군요.”

그 말이 맞다고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분위기가 제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릅니다. 전혀 아닌 것처럼 보이니 테일러가 동생을 내어 주기 싫었나 봅니다. 너무 아쉬운데요. 그냥 그때 청혼서를 보낼 걸 그랬습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농담이라도 황제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말기를, 본인 목숨이…. 아니 본인 왕국이 아깝지 않다면 말이다.

“뭐, 지금은 한참 늦었지요. 기회는 있을 때 잡아야지. 황제가 괜히 황제가 아닌가 봅니다.”

그렇게 몇 번 대화 해 본 왕세자는 시원시원하고 왕족답지 않게 소탈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황궁에 도착한 우리는 잠시 시간을 갖은 뒤 티타임을 갖기로 했다. 달리아궁에 도착하자 의외의, 그리고 매우 반가운 사람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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