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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50화 (50/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50

‘자격만 갖추어지면 그 뒤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샬리는 제가 후보로 올릴 수 있도록 도움만 주세요.’

‘그 뒤를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서 어떻게 할 셈인가요? 나 또한 폐하의 도움이 없었다면 제국에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을 거예요.’

혈혈단신 타국인으로 혼자서 제국에 세력을 갖추기란 상당히 어려운 문제였다.

‘샬리의 말대로 저는 이름뿐인 황후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우선 차기 교황의 마음을 사로잡아야겠지요. 저는 황후가 되기 위한 준비를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야망이 큰 사람이었다. 그녀는 목표를 위해서 어떤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맹세의 서약서에 거리낌 없이 서명하는 것만 보아도….

‘제냐크 공작님도 알고 계신가요?’

‘아버지는 제가 정도에 어긋나지만 않으면 무얼 하든 관여치 않으십니다. 항상 제 의견을 존중해 주시는 분이세요.’

내게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 서약서였다. 오로지 그녀에게만 위협적이었으며 내가 서명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와주신다니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라이, 다만….”

나는 그녀가 내밀었던 맹세의 서약서를 집어 들고 반으로 죽 찢어 버렸다. 라이가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만에 하나의 경우가 있는데, 의도하지 않아도 잘못되면 정말로 서약서에 목소리가 묶여 버릴 수가 있어요.”

그 외에도 이런 문서가 남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녀를 족쇄로 채울 수도 있지만 반대로 내가 그녀를 협박한 것처럼도 보인다. 저 문서에는 오로지 나에게만 이득인 항목들이 넘쳐나는 불공정계약이기 때문이다.

다시 여러 갈래로 찢은 나는 우리가 적었던 종이 역시 같이 찢었다. 벽난로에 던져 넣으며 깨달았다. 나는 이제 나 스스로 설 수 있었다. 더는 화장대의 서랍 속에 잠자고 있는 맹세의 서약서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었다. 라이의 도움은 흔쾌히 받기로 했다. 서로 상부상조하자는 마음이었다.

“라이, 앞으로 잘 부탁해요.”

내가 거절하는 줄 알았는지, 긍정의 말에 그제야 라이의 굳었던 표정이 풀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제 같은 배를 탄 거예요.”

라이가 꽃처럼 활짝 웃었다. 라이올라를 보내고 화려한 장식의 화장대로 다가갔다. 서랍을 열어 카샤에게 주려 했던 맹세의 서약서를 꺼내었다. 그리고는 좍좍 찢어 버렸다. 오늘로만 두 번째로 종이를 거침없이 찢어 버리자 시녀 하녀 할 것 없이 일시에 쳐다보았다.

“하던 일들이나 마저 해요.”

종잇조각들을 벽난로에 집어넣었다. 활활 타는 그것을 보니 왠지 모르게 뻥 뚫린 것처럼 속이 시원했다.

* * *

테너와 약혼식을 같이 논의했다.

“대충 이 정도의 비용이 나옵니다. 본래 진행했던 행사와 비교하면 현격한 차이가 있지요.”

“정말 그렇네요. 욕은 안 먹겠어요. 그런데 테너, 색종이 가루나 꽃을 뿌리면 거리가 더러워지니 그것을 치우는데도 또 비용이 들잖아요.”

“더 좋은 방법이 있으십니까? 축제 분위기나 흥을 돋울 때는 필요한 법이지요.”

나는 투알린에서 황제가 빛 가루에 둘러싸인 모습을 보았었다. 그 모습이 참 팅커벨이 요술 가루를 뿌린 것 같아서….

“마법사들에게 부탁하는 건 어떤가요? 더 멋진 연출이 가능할 것 같은데.”

“좋은 방법입니다만, 마법사들이 선뜻 나서줄지 모르겠군요. 본인들 연구가 더 바쁜 사람들이라서 폐하가 명령을 내리신다면 가능할 것 같긴 합니다만, 폐하는 업무로 필요할 때 외에는 부르시는 분이 아니라….”

그렇게 억지로 할 필요는 없지. 요즘 마법 부서와 친위대에서 나를 크게 반기고 있었다. 다름 아닌 디저트와 요리들 덕분이었다. 가져다주면 잘 먹어 주니 기분 좋아서 자주 먹을거리를 배달했었다. 그랬더니 나도 모르는 사이 먹을 것으로 그들의 환심을 톡톡히 사고 있었다. 행진용 오픈 마차는 이미 갖춰져 있을 테고, 행진하는 사람들은 친위대로 메꾸면….

“행진하는 사람들을 친위대로 바꾸면 어떨까요? 호위도 더 가까이서 밀착하게 되지 않을까요?”

내 말에 테너가 애매한 얼굴을 했다.

“마법사와 친위대라니 비용경감뿐만 아니라 효율성도, 행진의 질도 훨씬 좋아질 겁니다. 다만 그들의 본래 업무가 아니라서 참여하려 할지 알 수가 없군요. 폐하께서는 중요한 국가 대사가 걸린 일이 아니면 이런 것들에 강요하는 편이 아니라서요.”

팅커벨은 그럼 뭐였지. 업무에 관계된 뭔가 전투능력을 올려 주는 마법이었을까?

“그럼 내가 마법 부서와 친위대를 설득해 볼게요. 안 되면 할 수 없구요.”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내 약혼식인데 테너가 감사할 일은 아니건만, 아무래도 자기 일처럼 여겨줘서 그런 거겠지.

“테너, 제도 외곽에 퍼졌던 독감은 어떻게 되었나요?”

“거의 다 잡혔습니다. 전부 엘더베리를 섭취 중이지요. 엘더베리 물량도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만 그전에 정리가 될 것 같습니다. 신전에서도 적극적으로 돕고 있고 말이지요.”

“다행이군요.”

엘더베리의 효능이 유행처럼 번져서 이제 일반인들도 엘더베리를 구하기 위해 기를 쓰고 있다 들었다. 그래서 엘더베리의 가격도 급상승하고 있었다.

효능에 비하면 그 가치가 현저히 낮은 것은 맞았지만 또 너무 올라버리는 것도 문제였다. 제국에서는 엘더베리의 다음 수확 시기까지 당분간 판매가격에 상한 제한을 걸었다.

아마 이후로 엘더베리 나무를 심는 농장들이 너도나도 늘어날 것이다. 수요가 많아지면 공급도 많아지는 법이니, 그때까지 널뛰는 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제한을 둔 것이다.

“그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공주님이 제도 외곽을 한 번 방문하셔서 그들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거 그건가. 민생 살피기 같은 거.

“좋아요. 내가 가서 기운이 난다면 가야죠.”

* * *

“샬리, 저도 데려가요.”

라이는 그 뒤로 엘리제를 데리고 종종 달리아 궁을 방문해 같이 티타임을 가졌다. 제도 외곽을 살피러 간다는 말에 라이가 한 대답이었다.

“독감이 옮을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해요.”

“신관에게 치료받으면 되는걸요. 일단 사교계부터 휘어잡으려면 내가 샬리 곁에 있다는 걸 주지시켜줄 필요가 있어요. 그날부터 우리는 이제 친우예요.”

라이의 말에 엘리제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한마디 했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떠오르는 별과 제국의 꽃이 만나다니, 둘이 함께면 사교계가 한 손안에 들어오겠는데요.”

엘리제는 티타임에 같이 참여하면서 우리 사이에 모종의 이야기가 오간 것을 눈치챈듯했지만, 따로 묻지는 않았다. 라이가 목표달성까지 다른 사람에게 일절 말하지 않는 다 했으니 엘리제는 모를 것이다. 나 같으면 섭섭할 것도 같은데, 그냥 사교계를 휘어잡는다고만 짐작하고 있는 건가.

“샬리, 검술 수업을 받고 있다고 들었는데 저도 구경 가도 되나요?”

엘리제가 흥미로운 눈으로 나와 아레인을 번갈아 보았다.

“초보라서 볼 게 없을 텐데…. 검술에 관심이 있어요?”

“아주 많아요. 보통 여자들은 가르쳐 주지 않으니까요. 오빠들은 다 배웠는데 저는 못 배웠어요.”

“친위대에 물어볼게요. 저도 연무장을 빌려 수업받는 처지라 확답을 못 드리겠어요.”

내 말에 엘리제가 시무룩해졌다.

“꼭 허락해 주면 좋겠네요.”

그들과 담소를 나눈 뒤 나는 대량의 먹을거리를 들고 마법 부서를 방문했다. 오늘은 오동통한 육즙이 줄줄 흐르는 짭짤한 수제 소시지에 채소를 듬뿍 넣은 핫도그와 딸기 퓌레를 얹은 판나코타가 디저트였다. 에이솔이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요즘 우리 부서는 공주님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답니다. 전부 하던 연구는 뒷전이고 저한테 공주님이 언제 오는지 물어봐요.”

그녀는 나를 반기면서도 시선은 뒤쪽의 시녀와 하녀, 하인들을 향해 있었다. 그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늘은 보니도 검은 머리카락 색을 유지하기 위해 같이 방문했다. 우선 간식거리부터 돌려야지. 마법 부서 사람들이 하나같이 즐겁게 간식들을 받아 챙기기 시작했다. 나는 에이솔의 옆자리에 앉아 보니를 무릎 위로 앉아 올렸다. 이제 보니는 살이 조금 올라 꽤 무게가 느껴졌다.

“샬리 언니, 저 살쪄서 이제 무거워요.”

보니가 내 눈치를 살피며 내려가려 했다.

“힘들어도 되니까 더 무거워지렴,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살이 조금 오르긴 했지만, 여전히 빼빼 말랐다.

“에이솔. 여기, 말했던 미스릴 발찌예요.”

나는 주문이 끝나고 받은 발찌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정말 질이 좋네요. 이번에 넘어온 미스릴 광산에서 나온 거겠죠? 이 정도면 완벽해요.”

에이솔은 발찌를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자기 자리의 마법 보관함에 넣었다.

“흐음, 에이솔. 저 마법 보관함이요. 저도 하나 만들어 줄 수 있어요? 하나쯤 있어야 할 거 같아요.”

맹세의 서약서 같은 건 열쇠가 있긴 했지만, 화장대 서랍에 보관할 게 아니라 저런 곳에 보관했어야 하는 거였다. 혹시나 또 보관해야 할 물품이 생길지 모르니 미리 준비하자 싶어서 물었다. 보니에게 머리카락 색을 유지하는 마법을 걸어 주던 에이솔이 의아한 표정이었다.

“공주님, 마법 보관함이 하나도 없어요? 왕족들은 못해도 최소 여러 개는 가지고 있지 않나요?”

“지금까지 딱히 중요하게 여기는 게 없어서 장만하지 않았는데 생각해 보니 하나쯤은 필요할 것 같아요.”

내 엉뚱한 말에 갸우뚱하던 에이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알겠습니다. 보관함은 아인이 잘 만들어요. 나중에 소개해 드릴게요. 크기와 재질, 보관함의 보안 단계를 선택할 수 있으니 머릿속에 미리 구상해두세요.”

그녀는 말을 마친 후 핫도그를 한입 왕 물었다. 우아하고 다소곳한 외형과 다르게 아주 털털한 모습이었다.

“이거 한 끼 식사도 되고 간편해서 정말 좋은데요? 샌드위치랑은 또 다르네요. 빵과 소시지를 한입에 먹다니…. 우리같이 시간 아까운 마법사들한테 딱 맞아요.”

주위를 둘러보니 에이솔의 말대로 다들 먹으면서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쉬지도 않는 모습을 보니 테너가 생각나네. 저 모습을 보니 핫도그는 테너에게 보여 주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일 중독자 테너도 저렇게 먹으면서 일할 소지가 다분했다.

“에이솔, 이번에 부탁할 일이 있는데 안내키면 부담 갖지 않고 말해 줘요.”

“공주님이 제게 부탁을요? 웬만한 건 다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답니다.”

나는 에이솔에게 물었는데. 다른 마법사들이 전부 하던 일을 멈추고 이쪽을 주시했다. 왜 그러지? 저렇게 쳐다보니 부탁하기 민망하네.

“음, 그게 내 약혼식에 제도 거리에서 행진할 건데, 마법사들이 축제처럼 흥을 돋울 마법들을 써 줄 수 있을까 해서요.”

내 말에 에이솔의 표정이 울상이 되었다.

“바쁘면 거절해도 좋아요. 강요하는 게 아니니까요.”

울 정도로 연구가 바쁜가 싶어 당황한 내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몇몇 연구원이 벌떡 일어나더니 우리를 보며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마법사들에게 연구는 역시 굉장히 중요한 모양이었다. 내가 괜히 말을 꺼냈나 싶어 괜히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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