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48
“치료받았는데 제대로 낫지 않아서 다시 앓았어요. 몸의 면역력을 올려줘서 제국민들도 독감을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예방도 가능하니 감염 가능성이 큰 환자 주변인들에게 미리 섭취하도록 하는 것도 좋구요.”
“나는 처음 듣는데, 그대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의사들도 모르는 걸 말이야.”
그가 나를 빤히 응시했다. 예의 그 관찰하는 눈이었다.
“내가…. 관심이 많아서 그래요. 나무나 식물, 약초 뭐 그런 것들에요.”
사실 아무 관심도 없다. 내 관심은 오로지 내 몸 건강, 미용뿐이었다. 엘더베리도 그중에 알게 된 것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래, 테너에게 물어보도록 하지. 만약 그렇다면 굉장히 큰 도움이 될 거다.”
그는 다행히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저런 걸 알고 있는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할까?
“그래서?”
“네?”
“그것 말고 다른 것은 관심 없나?”
다른 거 뭐 있지? 으음….
“그대 눈앞의 사람한테도 관심이 갈 만하지 않나.”
눈앞의 사람은 관심 이상인데…. 그에게 황비를 들이지 않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나는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그전엔 내게 기대했다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이었지만, 지금이라면….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카샤…. 저기 할 말이 있어요.”
그는 경청하듯이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침 한 번 삼키고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카샤를….”
결국, 목소리는 떨려 나왔지만 그래도 덤덤히 이어나가려는데 누군가 응접실의 문을 두드렸다.
“폐하. 죄송합니다만, 긴급 상황입니다.”
문 너머에서 말을 전하는 이의 어투가 꽤 다급해 보였다. 카샤가 내 손등에 짧게 키스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샬리, 다음에 얘기해 줘.”
긴급하다는데 고백하겠다고 붙잡을 수도 없고 분위기도, 타이밍도 영 아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먼저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언제 날을 잡고 제대로 말해야지. 그의 뒤를 따라 나오는데 들리는 소리는 정말 시급해 보였다.
“제도 외곽 일부분만 진행되던 독감이 현재 외곽 절반 가까이 퍼졌습니다. 치료를 제때에 받지 못한 사람들의 사망자 수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독감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여기서는 유행성 독감이 신종 플루처럼 위험했다.
“샬리, 그대가 말해 준 엘더베리의 효능은 얼마나 빠르지? 너는 지금 테너를 불러와라.”
그가 내게 질문을 하고 시종에게 일러 테너를 불러오게 했다. 내 이름이 불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향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보통 젊은 사람들은 회복력이 좋아서 하루에서 삼 일 정도면 병세가 빠르게 완화되는 것 같아요. 연령대가 높거나, 면역력이 약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더 걸릴 거예요.”
그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보좌관들에게 지시했다.
“일단 엘더베리를 되는대로 빠르게 구해라. 신전에도…. 다시 연락을 넣어.”
그 말에 보좌관 한 명이 눈치 보며 입을 열었다.
“신전에는…. 이미 연락을 넣었습니다만, 아직 답이 없습니다.”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제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신전의 행태에 나도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신성 제국 크리하엘로. 그들은 동대륙을 제외하고서 서대륙 전체에 그 교세를 떨치고 있었다. 서대륙 사람들이 모두 믿고 있으니 함부로 내치면 오히려 제국민들의 원성을 듣게 될 것이었다. 분위기가 험악한 가운데 테너가 도착했다.
“폐하, 찾으셨습니까.”
“테너, 엘더베리를 섭취하고 독감을 치료했다고 들었다.”
테너가 내게 한 번 눈인사를 한 후 카샤의 질문에 답을 했다.
“그렇습니다. 신관에게 한 번 치료를 받았으나 낫지 않아 고생하던 중에 샬리오니 공주님께서 주신 엘더베리로 이번에 완치하였습니다. 첫날부터 병세가 크게 경감하였고 그 상태로 일주일 동안 서서히 낫기 시작했습니다. 제 나이대를 참작해서 봐주십시오.”
테너는 카샤가 궁금해하는 것을 빠르게 파악하고 묻지 않은 완치 과정까지 덧붙여 설명했다. 카샤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예방이 가능하다 했으니, 엘더베리를 제도 외곽에 전부 풀어라. 아직 감염되지 않은 구역까지 전부다.”
“카샤, 일단 제가 가지고 있는 엘더베리즙과 잼이 꽤 있어요. 아직 가공하지 않고 보관 중인 엘더베리도 있구요. 급한 사람들에게 먼저 사용하게 하세요.”
내게는 꽤 많은 양의 엘더베리들이 있었다. 달리아궁의 요리장과 파티시에와 함께 엘더베리로 만들 수 있는 디저트나 요리에 적용할 방법이라든지 궁리하느라 많이 사들여 놓은 참이었다.
엘더베리는 가격이 낮게 형성되어 있었다. 귀족들은 테너처럼 새 모이나 관상용 열매라고 생각하는 게 대부분이었고, 평민 중 달콤한 과일들을 즐길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비되는 과일이었다.
문제는 겨울이라 엘더베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황궁 정원은 마법으로 온도가 일정했으니 엘더베리가 꾸준히 계속 열렸으나 사실 엘더베리는 아직 열리는 시기가 아니었다. 최근에 엘더베리 나무가 귀족들의 관상용 나무로 많이 쓰인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 구하려면 귀족들에게 협조를 구해야 할 것 같은데….
“폐하, 아마 지금 계절 때문에 엘더베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열리는 시기가 아니에요. 저도 황궁 정원에서 대부분 구했고, 다른 곳에서는 건조된 엘더베리를 구할 수 있었어요.”
건조된 엘더베리는 소량이었다. 상품성이 거의 없어서 시장에서도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내 말에 카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귀족들에게 협조를 구하면 어떨까요? 아마 대부분 관상용으로 정원에 많이 심겨 있을 텐데….”
황궁 정원만 해도 길을 내듯 두 줄로 쭉 늘어서 있었으니 귀족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 양이 꽤 될 것이다. 카샤가 나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놈들이 드디어 제 밥값을 할 때가 온 것 같군.”
* * *
황제가 귀족들을 일시에 불러 긴급 정무 회의를 여는 동안, 나는 남은 간식을 들고 마법 부서와 친위대를 방문했다. 마법 부서에서는 꽤 많은 사람이 간식을 크게 반겼다. 그 선두에 선 사람은 당연히 에이솔이었다.
“공주님, 이게 바나나 푸딩이라구요? 기존 푸딩과 정말 다르네요. 세상에, 리노아에서는 전부 이런 것들만 먹나요?”
그녀가 바나나 푸딩을 한입 떠먹더니 행복한 얼굴을 하고 내게 물었다.
“에이솔이 좋아할 것 같아서 챙겨왔어요. 다들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안 좋아하는 사람은 제 앞으로 데려오세요.”
그녀가 매의 눈으로 마법 부서를 둘러보았다. 그렇게 안 해도 많이 챙겨 왔는데.
“에이솔, 미스릴 발찌는 주문을 넣어놨어요. 받으면 바로 전달할게요.”
“미스릴로 결정하셨나 보군요. 저도 나머지 재료를 구해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그녀가 동료가 먹고 있는 바나나 푸딩을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는 에이솔의 손에 바나나 푸딩을 하나 더 쥐여 주고 친위대로 이동했다.
“루카.”
나는 친위대중 유일하게 알고 있는 루카를 불렀다. 다행히 그는 근처에서 훈련 중이었다.
“어? 공주님 아닙니까? 오늘은 훈련이 없는데 오셨네요.”
루카가 나와 아레인에게 인사를 하고 물었다.
“제가 친위대들이 훈련하는 곳에 끼어서 수업을 받고 있잖아요. 불편한 점들이 많을 것 같아서 고마운 마음에 간식거리들을 좀 준비했어요. 좋아할지 모르겠네요.”
“다들 없어서 못 먹습니다. 우리가 먹성이 좀 좋아야지요. 어디 있습니까?”
루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두리번거렸다. 다행이다 싶어 기사들을 모아 친위대 건물의 너른 응접실로 이동했다. 시녀들과 하녀들에게 지시해 간식들을 나눠주었다. 그들이 간식을 받는 걸 지켜보다가 돌아서서 아레인에게 질문했다.
“아레인, 단 거 싫어하면 뭐 좋아해요? 디저트류는 아예 못 먹어요?”
그 혼자만 아무것도 못 먹고 있으니 괜히 마음이 쓰였다.
“초콜릿만 아니면 괜찮습니다.”
“단 건 다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건 초콜릿 때문이었나? 내가 넘겨짚었나 보네.
“좋아하는 편은 아니나 샬리가 만든 건 맛있을 것 같습니다.”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다른 사람들 다 먹는데 아레인만 빼고 준 격이었다. 나는 근처의 하녀를 불러 녹차 카스텔라와 오트밀 쿠키를 가져오게 했다.
아무래도 단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카샤와 입맛이 비슷하리라 싶었다. 하녀가 은쟁반에 예쁘게 담아 간식을 내왔다. 그가 오트밀 쿠키부터 한입에 털어 넣었다. 입속에서 쿠키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맛있는데요. 이런 거라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가 다시 쿠키 하나를 입안으로 넣었다. 다행이었다. 단 거 싫어하는 사람들은 저걸 기준으로 삼아야지. 그는 녹차 카스텔라와 쿠키를 남김없이 다 먹었다.
“샬리, 정말 맛있습니다. 다음에도 주십시오.”
“물론이에요.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워요.”
그렇게 잘 먹어 주면 나야 기쁘지.
“그런데 샬리, 리노아에선 디저트를 이렇게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음…?
“제가 디저트를 좋아하지 않았다구요?”
“제게 디저트는 의무적으로 먹는다고 하셨습니다. 티타임에서 항상 디저트에 대해 평가를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단 걸 싫어하는 저와 입맛이 맞아 좋다고 하셨는데….”
이제 아레인과 이런 얘기를 해도 꽤 덤덤한 나 자신에 놀라곤 한다. 리노아에서 있었던 일이라든지, 과거의 샬리오니의 이야기라든지….
“기억을 잃고 나서 입맛이 바뀌었나 봐요.”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얼렁뚱땅 그렇게 넘어갔다. 전의 샬리오니는 단 걸 별로 안 좋아했었나 보네. 티나는 모르고 아레인은 아는 걸 보니 연인이어서 알려준 걸까. 아니면 같은 입맛을 가지고 있어서 기쁜 마음에?
“실은 지금 샬리의 모습이 훨씬 보기 좋습니다.”
그가 웃으며 말하는데 빈말이 아닌 진심이 느껴졌다.
“고마워요, 아레인.”
그 말은 마치 나를 인정해 주는 것 같았다.
* * *
엘더베리로 독감에 걸렸던 제국민들의 병세가 나아지고 퍼지는 속도도 안정세로 접어들었다. 이번에 귀족들은 제값을 톡톡히 했다. 어찌 된 일인지 너도나도 엘더베리를 수확해 내어놓고 수소문에 건조된 엘더베리까지 일부러 찾아 가져다 바치기까지 했다.
이번 독감으로 인한 최대 수혜자는 귀족들이라 할 수 있었다. 제국민들에게 귀족들에 대한 좋은 인상을 남긴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가문 내에 있던 엘더베리가 돈이 드는 것도 아니며, 내놓기만 하면 제국민들을 살리는 데 크게 공헌할 수 있고, 더불어 황제에게도 잘 보일 수 있는 1석 3조의 기회였으니 말이다.
신전에서는 뒤늦게 치료를 돕겠다고 나섰다고 한다. 카샤가 웃으며 흔쾌히 허락했다고 하는데,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는 시점에서 그들의 활약은 아주 미비했다. 이미 독감의 전염성은 다 잡힌 상태였고 환자들도 큰 고비를 넘긴지라 그들이 끼친 영향력은 쥐꼬리만 하다고 할 수 있었다.
“샬리 공주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기세예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공주님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