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45
“신탁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가요?”
“내가 바라는 걸 주겠다고 했으니 할 수밖에.”
그가 바라는 것? 아이 때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그가 바라왔던 것. 그게 뭐길래 전쟁까지 한단 말인가. 모든 것을 다 가진 그가 보물 따위를 바랄 것 같지는 않았다.
“바라는 그것을 얻지 못하면 안 될 정도로 당신은 절박한 거예요? 전쟁을 벌여야 할 정도로 그게 필요한 거냐구요.”
내 말에 그의 동공이 두 배로 커지기 시작했다.
“아….”
그가 손으로 턱을 쓸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더는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될지도 모르지. 그대 말대로 지금 나는 그게 없어도 만족하니까. 그래도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어, 불안하다.”
크리하엘이 요술 구슬이라도 준다고 했나.
“어떤 상황인 거예요?”
내가 조심스레 물어보자 그가 침음을 삼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이것만 바라보고 달려왔어. 나 자신을 세뇌하듯이…. 처음엔 무시하려고도 했지만…. 결국엔 그것을 얻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지. 그리고 실제로도 신탁의 말처럼 꽤 이룬 상태고….”
물건이 아니라 소원 풀인가 보네.
“지금은 만족한다 했으니까 되었잖아요.”
“언제 손안에서 빠져나갈지 모르니 불안하다.”
나를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더 불안한 게 생길 수도 있잖아요. 당신 손안에 있는 것부터 지켜주세요.”
“무엇을?”
“카샤가 없을 때, 당신 약혼녀를 누군가가 노리면 어떻게 해요. 한밤중에 소리 소문도 없이….”
나는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의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몸이 찌릿한 게 은은한 살기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당신보고 암살자가 되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무섭게 구는 거야. 실제로 일어난 일도 아니고 그냥 가정만 하는 건데. 그가 한 손으로 내 턱을 붙잡고 비릿하게 웃었다.
“…넘어갈 건가?”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나도 모르게 말이 조심스럽게 나왔다.
“넘어가다뇨…?”
“당신을 노리는 남자가 유혹하면 넘어갈 거냐고. 그것도 한밤중에…?”
숫제 으르렁거리듯 내 양어깨를 꽉 틀어지고 묻고 있었다.
“카샤, 아파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지난번 연회에서 마음에 든 남자는 없다 하지 않았나. 그런데 염두에 둔 남자가 있었던 거군….”
그가 위협적인 모습으로 나를 침대로 밀어 넘어뜨렸다. 연회에서 분명히 없다고 말했는데, 그 이야기를 왜 꺼내지, 카샤가 거친 행동과 달리 내 목을 부드럽게 만지나 싶더니 순간 그 자리를 콱 깨물었다.
읏…. 이 사람, 자기가 뱀파이어인 줄 아나.
“그 남자 누구지.”
“아파…. 그 말이 아니라니까!”
그는 노린다는 말을 크게 오해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내 말도 아예 듣지 않고 있다. 그가 없는 사이 암살자가 내 목숨을 노리면 어쩌냐는 말이었는데…. 어째서 노린다는 말이 내가 염두에 둔 남자가 노린다는 생각으로 이어지지.
이제 목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는 그를 향해 손을 둥글게 말고 등을 힘껏 내려쳤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의 성만 돋운 것 같았다. 돌같이 딱딱한 등에 내 손만 얼얼했다.
“어서, 대답해야지, 샬리.”
그가 한 손으로 내 손을 결박하고 다른 손으로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인내심 시험하지 말고.”
“목숨…. 흐…. 누가 내 목숨 노리면, 어쩌냐는… 말… 읏….”
깨문 곳을 세게 핥아 내리던 그가 동작을 멈추었다.
“그대의 목숨 말인가….”
그가 나를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긴장했던 몸이 천천히 풀어졌다.
“목이 너무 아파요, 카샤.”
이번엔 위험 스위치가 순식간에 켜져서 대응할 새도 없었다. 저거 어떻게 할 방법 없을까. 날이 갈수록 더한 것 같은데. 그가 불안해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를 거부하지도 않고 잘 맞춰왔다고 생각했는데. 충분히 약혼자로서 할 만큼 잘해온 것 같은데. 마음에 든 사람이 없다고 했는데도 믿지 않고 있다.
불완전한 마음을 건네줘서 그런 걸까. 겉으로는 잘한다고 해도 결핍된 것이 느껴지는지. 그는 내가 싫어하지만 않으면 되었다고 했었다. 하지만 역시 보답 받지 못하는 일방적인 마음은 힘든 거겠지. 웃는 얼굴 뒤로 그어놓은 선을, 겉만 그럴듯한 약혼자에게 카샤는 이제 한계를 느끼는 것 같다.
평소에는 내색하지 않아서 못 느끼고 있었는데…. 그가 쌓아 왔던 위태한 모습이 이번에 일시에 터진 것 같았다. 그러니 참고 있던 불안함이 저런 식의 오해를 불러왔겠지. 멍하니 생각하는데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방을 나가 버렸다. 목을 눌러 보니 따끔했다. 어지간히도 세게 깨물었나 보다.
나가서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던 그가 손에 무언가를 잔뜩 들고 다시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들고 왔던 꾸러미를 침대에 우르르 쏟아 내더니 상자 안에 있던 솜을 골라 집어 들었다.
침대 위에는 증류주와 연고, 솜, 무명천, 그 외에 용도를 알 수 없는 것들이 잔뜩 늘어져 있었다. 그냥 연고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그가 솜에 증류주를 적셔 내 목에 가져다 댔다. 따끔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솜으로 닦아낸 후 연고를 바르더니 무명천으로 목을 감으려 했다.
저거 둘둘 말고 있으라고? 내가 고개를 젓자 그가 침대 위에 늘어져 있던 것들을 전부 쓸어내렸다.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지는 물건들이 내 마음을 대변했다. 그가 나를 침대에 눕히더니 조심스럽게 당겨 안았다.
“미안하다. 많이 아픈가.”
내뱉는 그의 숨소리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불안해 보였다.
“그대는, 내 거야.”
그가 무심하게, 그러나 한 자씩 힘주어 말했다.
“샬리….”
하지만 곧 들끓는 목소리로 애원하듯 속삭였다.
“내 거라고 말해 줘. 제발.”
그가 으스러뜨릴 것처럼 강하게 힘주어 끌어안았다. 내 마음을 가다듬는 동안 그에게 피해는 주지 않으려 했는데, 이건 마치 내가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았다. 버티기가 힘들었다. 이러든 저러든 어차피 그는 상처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상태에서 말을 꺼내는 건 그 말이 무엇이든, 오히려 그의 불안을 더 부추길 수도 있었다.
평소라면 그에 대한 내 마음 한 자락 섞인 말 한마디라도, 쉽게 꺼내지 않고 신중했을 것이다. 마음 가는 대로 말했다가 뒤에 그가 상처받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이미 그는 힘들어 보이는데 몸을 사려서 뭐 하나 싶다. 계속 만지고 싶었던, 그의 결 좋은 붉은 머리칼에 손가락을 얽자 사락거리며 부드럽게 감겨들었다.
그가 내게 자주 해 왔던 것처럼 나 또한 그의 등을 어르듯 천천히 쓸어내렸다. 지금 이 상태에서 말로만 당신 거라고 하면 여전히 빈말처럼 여기며 불안하겠지. 그에게 확신을 줄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럼 주고받을 걸 만들면 되지. 우리가 서로에게 원하는 것으로.
“두 가지만 약속해 주면, 난 당신 거예요.”
나를 꼭 끌어안고 있던 그가 힘을 조금 풀었다. 그리고는 곧 실소했다.
“누리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 전부 그대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것을 잊은 모양이군.”
청혼할 때 했던 말은 보통, 손에 물 안 묻히며 살게 해 주겠다는 말이랑 일맥상통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니었다.
“꼭 필요한 전쟁이 아니면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가 잠시 표정을 굳히며 고민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리고 싶은 것도, 가지고 싶은 것도 아니군. 알겠다. 그리고?”
“저 말고 단 한 명의 황비도 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대 말고는 아무도 내 곁에 들일 생각이 없다.”
“제국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준다면요?”
그가 잠시 고민하더니 내게 물었다.
“대체 얼마나 막대한 이익이길래, 왕국 세 개쯤 되나? 그 정도라면 종이 인형처럼 생각하면 어떤가.”
“당신 옆에 있는 건 종이 인형도 싫어요. 그리고 들어오는 황비한테도 못 할 짓이에요.”
내가 정색하자 그가 슬며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내 옆에 다른 여자가 있으면 싫은가.”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나는 웃으며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내 감정을 여과 없이 풀어냈다.
“생각만 해도 싫어요. 그런 일이 있으면 이 약속은 없었던 일이 되는 거예요. 캬샤.”
* * *
티나가 나를 보자마자 눈썹을 씰룩였다. 그녀가 액세서리 칸으로 가더니 꽤 높이가 있는 레이스로 된 목 장신구를 들고 왔다. 중앙에 물방울 모양의 다이아몬드가 진주와 함께 부착된 장신구였다. 처음엔 어리둥절했으나 곧 알아차렸다. 목에 남은 자국 때문인 모양이었다.
얼굴이 열이 올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티나도 말은 없었지만,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리고 오늘 착용할 보석과 드레스들을 선별하고 내 머리 모양을 만지기 시작했다.
“공주님, 시종장님이 무언가를 가득 싣고 오고 계시는데요? 줄이 행렬처럼 길어요.”
티나가 옆 머리카락을 땋고 있는데 다른 시녀가 창밖을 내다보며 내게 테너의 방문을 알렸다.
“가득 싣고 오다니?”
티나가 내 머리 모양을 마무리 지은 후 그 시녀와 함께 창문 밖으로 고개를 뺐다.
“어머, 공주님. 저게 다 뭐죠?”
그녀를 따라 창밖을 본 나는 속으로 기함을 했다. 나보고 약혼 행진을 하라고 하더니 예행연습이라도 하시나…. 짐을 가득 실은 짐 마차 몇 대 분과 함께 시종장이 궁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테너, 무슨 일이에요?”
시종장의 뒤로 양손 가득 무언가를 한 꾸러미 들고 있는 시종과 짐을 가득 안은 하인들이 줄을 서 있었다.
“폐하께서 동대륙의 귀한 차를 선물하고자 하십니다.”
시종이 들고 있는 저 꾸러미 사이로 루이보스 냄새가 솔솔 올라오고 있는데….
“루이보스 차로 보이네요.”
내 말에 테너가 드물게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루이보스를 알고 계십니까?”
“얼마 전 티타임에 있었던 일을 보고 받지 않았어요?”
“아, 공주님 건은 나디에게 전부 일임해 놓은 상태라서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녀를 시녀장으로 키울 생각입니다만 공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미 시녀장의 일을 하는 사람한테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저한테 의견을 묻는 거라면 오늘부터라도 찬성이에요.”
나는 웃으며 테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 있었던 티타임에서 라이올라 영애가 루이보스를 선물로 가져다주었어요. 그전에도 알고 있긴 했지요.”
“흠, 그랬습니까. 이거 라이올라 영애에게 선수를 빼앗겼군요. 물건이 많아 검수 작업에 시일이 지체되었더니, 그 사이 공주님께 선물할 줄이야. 역시 외무대신의 딸이군요. 폐하께서 꽤 실망하시겠는데요. 이번에 동대륙과의 단교도 완화할 겸 공주님 선물로 준비한 것인데요.”
하필이면, 루이보스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귀한 거라고 하니 눈물을 머금고 마셔야 하나.
“저걸 다 마시면 제 피부가 얼마나 좋아질지 상상이 안 가는군요.”
“효능까지 알고 계십니까. 첫 번째 선물은 실패로군요.”
첫 번째 선물은 양손 가득 들고 있는 저게 다인 모양이다. 다행이었다. 테너가 끌고 온 마차 몇 대 분이 전부 루이보스였으면 큰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