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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44화 (44/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44

“잘만 하면 친위대에 들어오실 정도는 됩니다. 어릴 때부터 배웠으면 사실 더 좋았을 텐데요. 균형감각도 있고 순간 판단력이 꽤 뛰어난 편이니까요. 솔직히 초보들은 자세가 굉장히 엉망입니다만. 샬리 정도면 충분히 재능이 있다고 볼 수 있죠.”

와, 정말로? 내가 그 정도나 재능이 있어! 입이 헤벌쭉 가로로 길어지자 헨리가 얼굴을 굳히며 한마디 더 했다.

“5년.”

“네?”

“5년간 열심히 하십시오. 그러면 신입 친위대만큼은 될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악착같이 한다면 말이죠.”

신입 친위대만큼 하려면 5년….

“한 사람 몫, 나 자신이라도 지킬 수 있으려면 얼마나 걸려요?”

“음, 확실히 그것 때문에 배우긴 하는 거지만…. 속성으로 배우길 바라십니까?”

속성이 있었어? 그러면 그것부터 알려 줘야지.

“속성으로 배우면 얼마나 걸려요?”

“1년이면 되겠지만 부작용도 아셔야지요. 마음만 급하십니다.”

“부작용은요?”

“실력은 늘겠지만, 체력 분배를 제대로 할 줄 몰라 금방 나가떨어질 겁니다. 그리고 자세도 금방 무너져 내려서 조잡해지죠. 조금만 겨뤄 보면 티가 납니다. 다만, 샬리가 원하는 대로 급습이나, 암습에 일차적으로는 본인을 지킬 수 있겠죠.”

나는 순수하게 검술을 파고들고 싶은 게 아니라 한순간이나마 위험에서 자기방어를 하기 위한 거니까 속성이 더 나을 것 같은데.

“속성으로 배울래요, 지금은 급하니까 그게 나을 것 같아요.”

“체력이 기본이 돼야 한다는 거 잊지 마시고요.”

“열심히 잘 따라가겠습니다.”

의욕 찬 내 대답에 그가 흡족한 얼굴을 했다. 나는 녹초가 되어 침대에 누워있었다. 다음번엔 다른 수업을 전부 검술 수업 전으로 잡아야겠다. 테너에게 말해서 조정해 달라고 해야지. 끔찍한 근육통이 몸에 엉겨 붙는 느낌이었다.

다리가, 팔이 안 들려…. 기초체력 올린다고 연무장 돌기에 근력 운동에 검술 수업까지…. 내가 생각해도 그걸 다 따라 하는 게 참 대견하다 싶다.

가끔 아레인은 헨리의 수업 방식이 마음에 안 드는지 티격태격하긴 하지만 정말로 요즘 체력이 붙긴 붙었다.

점점 버틸 수 있는 한계선이 쭉쭉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시 그만큼 혹사하긴 하지만 말이다. 헨리가 조만간 제대로 검술을 시작해도 될 것 같다고 했으니까.

눈을 꾹 감고 침대에 몸을 발랑 뒤집었다. 제국 역사책을 좀 보다 자려고 했더니 무리지 싶었다. 비몽사몽 하는데 내가 깨어있는지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싶었다. 무념무상하고 있는데 침대 옆이 푹 파이더니 누군가 내 허리를 쑥 끌어당겼다. 속절없이 끌려가 안긴 품에서 이제는 익숙한 머스크향이 묻어나왔다.

“샬리, 내가 죽을지도 모르겠다.”

지친 나는 꼼짝도 못 하고 안긴 그 상태 그대로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에요?”

“일이 너무 많아서 그대 보기가 하늘의 별 따는 것보다 힘들지 않나. 나보다 헨리가 그대를 더 많이 봤겠지.”

그가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자 숨이 턱 막히기 시작했다.

“숨…. 못 쉬어요. 카샤.”

그제야 조금 느슨해진 팔 사이로 숨을 내뱉는데 그가 나를 제 얼굴 높이로 불쑥 끌어올렸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카샤는 가끔 나를 관찰하듯이 볼 때가 있었다. 정확히는 내 눈동자를, 지금도 그랬다. 관찰하는 것인지 아니면 감상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가 내 눈동자를 좋아한다는 건 확실하다.

“얼굴 보니까 살 거 같군. 그대도 꽤 피곤해 보이는데, 헨리가 괴롭힌 건 아니지?”

“정말 열심히 가르쳐 줘요. 제 체력이 못 따라가서 그렇죠.”

그가 진한 미소를 머금더니 내 얼굴에 키스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거 가만 놔두면 큰일 나는데…. 거절하려다 오늘은 그냥 포기했다. 너무 힘들어서 팔에 힘도 안 들어갔다. 그가 입술을 쪼듯이 여러 번 짧게 키스했다.

“이 상태 그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는데.”

카샤가 입술을 맞댄 채로 말을 꺼냈다. 맞부딪히는 부드러운 입술이 간지러워서 웃음을 터트렸다.

“듣기 좋아.”

웃음이 퍼지며 피로가 쌓여 경직되었던 몸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의 혀가 천천히 입술을 가르고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따뜻한 그의 품 안에서 체온이 올라가며 나른해지고 있었다. 그가 가볍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수마에 천천히 빠져든 나는 그에 반응하지 못했다.

“샬리, 왜 그래, 졸린 건가.”

그게…. 내가 대답을 했나? 점점 의식이 흐려지며 꿈속으로 말려 들어갔다. 카샤의 한숨 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것 같기도 하고.

* * *

몸이 꽉 조인 것처럼 너무 답답했다. 발버둥을 치려는데 사방이 막혀서 불가능했다. 가위라도 눌린 것 같았다. 천천히 풀리길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가위에 눌린 몸은 풀릴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더 옥죄는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답답했다. 몸을 조금이라도 뒤척거려 움직이며 가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일어났나.”

멈칫한 나는 머리 위에서 들리면 안 되는 목소리를 들었다.

“카샤…?”

그가 왜 여기에 있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아직 덜 깬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그의 나른하고 잠긴 목소리가 연속해서 머리 위로 쏟아졌다.

“결혼할 때까지 어떻게 참지, 이렇게 좋은데.”

그가 다시 나를 힘주어 꽉 끌어안았다. 잠깐만. 지금 내 볼에 닿는 따끈따끈한 거 이거 맨가슴 아니야? 완전히 잠에서 깬 내 눈이 번쩍 뜨였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올려 그를 바라보자 그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 숙여 내 이마에 키스했다. 그의 품 안에서 빠져나오려 버둥거리자 그가 힘을 풀었다. 겨우 빠져나와 지금 이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카샤가 왜 여기…. 설마, 어젯밤에 안 돌아간 거예요?”

그는 누워서 쭉 뻗은 몸을 옆으로 돌려 턱을 괴고 나른한 자세로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앞섬을 절반은 풀어헤친 모습에 단단해 보이는 가슴팍이 한눈에 들어왔다.

방금 일어났는데도 뭐 저렇게 퇴폐미를 발산하면서 화학 호르몬을 뿌려 대고 그러지. 홀리지 않기 위해 나는 눈을 도르르 굴려 시선을 위로 올렸다.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머리칼은 그를 훨씬 어려 보이게 했다.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제한 내가 다시 물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계속 여기 있었던 거예요?”

일부러 눈을 매섭게 뜨고 쳐다보자 그가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는 내 손을 잡아 쭉 끌어당겼다. 다시 침대에 엎어지자 그의 품 안이었다. 바로 앞에 당도한 그의 매끈하고 단단한 가슴팍에 깜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가 나를 향해 아찔한 눈웃음을 흘리며 내 등을 쓸어내렸다.

“어땠을 거 같은데?”

아… 아침부터 갑자기 분위기가 왜 이러지. 이런 치명적인 모습으로 그러면.

“그래도 우리 아직 약혼도 하기 전인데….”

“나랑 약혼 안 할 건가.”

“할 거예요.”

“약혼한 뒤엔 결혼도 할 거고.”

“그렇죠.”

왜 갑자기 당연한 말들을 늘어놓는 거지. 그가 어젯밤처럼 제 얼굴 앞으로 나를 끌어올리며 마주 보게 했다. 커다란 손이 내 볼을 감싸 안으며 천천히 쓰다듬어 내렸다.

“그런데 뭐가 문제지? 우린 이미 결혼 한 사이나 다름없는데.”

뺨을 쓰다듬던 엄지로 느릿하게 입술을 문지르더니 천천히 목선을 따라 훑으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저지해야 하는데 그에게 사로잡힌 눈이 몽롱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손가락이 내 쇄골을 어루만지며 야릇하게 눈을 휘었다. 그가 자세를 바꿔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샬리.”

한참을 내 눈을 바라보며 머리칼을 쓸어내리던 그가 고개를 내려 내 귓가에 속삭였다.

“좋아한다.”

그리고는 내 귓불에 입 맞추며 끓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미쳐 버릴 만큼.”

귓가에 울리는 한없이 낮은 저음과 달콤한 숨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쭈뼛 돋아났다. 내 몸이 바짝 움츠러들어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꼭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데, 겁먹은 내 아기 사슴. 언제쯤이면 그대가 완전히 경계를 풀까.”

이번엔 손 대신 그의 입술이 귓불에서 목선을 따라 천천히 입을 맞추며 내려오더니 쇄골에 키스했다.

“아….”

“같이 있을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오늘은 봐줘.”

그가 나지막이 웃으며 말하는데 쉬이 넘길 수 없는 말이 귀에 잡혔다. 흐려지는 의식을 다잡으며 물었다.

“같이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가 잠시 멈추더니 짧게 내 입술에 키스했다.

“음…. 일단 그대만 알고 있어. 약혼식 후에 포르토를 칠 생각이다. 결혼 전에 완전히 끝내고 정리하고 싶으니까.”

어디를 친다고…? 전쟁은 이제 안 하는 거 아니었나. 여전히 진행 중이었던 모양이다. 왜 안심하고 있었을까. 리노아를 치지 않겠다고 했지, 전쟁을 그만두겠다고 한 건 아니었다. 그럼, 전쟁을 계속할 참이란 말인가. 내가 침대에서 내려와 가운을 챙겨 입자 그가 못마땅한 표정을 했다.

“카샤, 포르토는 왜요?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요?”

“있어.”

그가 표정을 지우며 대답했다.

“무슨 이윤데요…. 꼭 전쟁해야만 하나요?”

안 해도 된다고 해 줘. 내가 간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한참 나를 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어릴 때 받은 신탁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신탁? 크리하엘이 안배했다는 게 이거였나.

“무슨 신탁인데요, 꼭 지켜야 하는 건가요?”

“그건 알려줄 수 없어. 내게 신탁을 알려준 성녀와 대신관도 죽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이제 나밖에 없다.”

“테너도 몰라요?”

“몰라.”

가족 같은 테너도 모른다니 어째서 알려 주지 않았을까.

“알리면 안 되는 내용이에요?”

보통 이쯤 하면 수긍하던 내가 계속 캐묻자 그가 묘한 얼굴로 나를 살폈다. 카샤를 움직이려면 어떤 신탁을 내렸을까. 어렸을 때 받았다 했으니 아이를 현혹할 만한 무언가일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성인인데도 신탁을 지키려 한다는 건, 제약이라도 걸린 건가.

“신탁 안 지키면 신벌이라도 받는 거예요?”

“아니.”

“그럼 굳이 안 지켜도 되잖아요.”

“그대가 관심을 두니 기분은 좋지만, 이건….”

지금 관심이 문제가 아닌데, 크리하엘이 당신을 장기 말처럼 쓰려 한다고요.

“포르토가서 잘못되면 어떻게 해요?”

“내가?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은데.”

물론 당신을 우습게 볼 리가 없지. 당신은 포르토까지 집어삼켰으니까. 하지만 이제 내용이 다르게 흘러가는데 다른 변수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신탁 때문에 지금까지 전쟁을 벌여왔던 거라면 그저 크리하엘의 유희에 놀아난 것뿐이지 않나. 그 신이라는 작자가 변덕을 부리면 앞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내게 전쟁을 막지 말라고 했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 눈에는 광기와 따분함, 싫증이 공존해 있었다. 그런 미친 신에게 카샤를 맡긴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아무리 날고 기는 그라고 해도 변수가 많은 전쟁터에 보내는 건 절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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