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43
2. 거래
달갑지 않은 여자를 무감하게 응시했다.
‘폐하와 샬리 사이에 끼어들 생각은 없습니다. 믿어 주세요.’
좋아하냐고 물어봤는데 왜 다른 말을 하지. 특히나 나에겐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왜 얼렁뚱땅 넘어가고 그래.
“믿을 수 없으니 이런 장난은 그만두도록 하죠.”
나는 우리가 사용한 종이를 벽난로에 던져 넣었다. 내 태도가 차갑게 바뀌자 라이올라의 표정이 굳어졌다.
“믿을 수 없다면 맹세의 서약서를 쓰겠습니다.”
“가져오세요, 그다음에 다시 얘기합시다.”
말로는 무슨 말을 못 해. 딱히 그녀가 서약서를 가져올 거라 생각지 않았다. 아마 그녀도 내가 그냥 하는 소리라고 생각지 않을까.
맹세의 서약서는 가족끼리도 함부로 쓰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라이올라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의 서약서를 쓰겠다니 내가 뭘 요구할 줄 알고? 그녀에게 축객령을 내리고 생각에 잠겼다. 라이올라의 말은 갑작스러우면서도 당혹스러웠다. 나를 도와주는 게 대체 그녀에게 무슨 득이 있어서.
* * *
잠들기 전 침대 머리맡에 앉아 제국 역사책을 읽고 있는데 영 집중이 되질 않았다. 책을 덮고 그냥 잘까 하는데 하녀가 밖에서 황제가 왔음을 알렸다.
자리에서 막 일어나는데 어느새 곁에 그가 와 있었다. 깜짝이야, 가끔 루이처럼 신출귀몰할 때가 있다니깐. 그가 나를 다시 침대맡에 앉히곤 의자를 끌어와 내 맞은편에 앉았다. 말없이 그가 나를 조용히 응시했다. 그가 종종 하는 행동이었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관찰하는 것.
“오늘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었나?”
그리곤 가끔 내 기분이나 상태를 맞추기도 한다.
“아뇨, 없었어요.”
“티타임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를 보니 라이올라가 떠오르긴 했다.
“그냥, 제국 역사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집중이 잘 안 돼서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나 봐요.”
“그래서, 티타임은?”
그가 집요하게 묻기 시작했다. 어영부영 넘겨도 대답할 때까지 물을 것 같았다.
“아주 성공적이었어요. 다들 친절했구요. 만족해서 돌아갔어요.”
웃으며 말하자 그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살폈다.
“오늘도 많이 바빴어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잠깐 보고 갈 정도로 바쁘긴 하지.”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보자 멀리 치워두었던 라이올라가 계속 머릿속으로 둥둥 떠다녔다. 나는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을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카샤는 라이올라 영애를 어떻게 생각해요?”
“제냐크 공작가의?”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겁이 없는 녀석이지.”
“어떻게 겁이 없는데요…. 영애랑 친분이 있어요?”
이 정도면 라이올라는 카샤한테 후한 평을 들은 것 같은데. 그가 미간을 좁히더니 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친분이 있기보단,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암살자들이 있는 한복판에서도 기를 빳빳이 세우니까 웃길 노릇이었지.”
라이올라가 그와 같이 암살자들 사이에 있을 일이 있나?
“그럼 라이올라 영애랑….”
“잠시.”
그가 손을 들어 제지하며 내 말을 막았다.
“샬리, 이 짧은 시간에 고작 라이올라 얘기로 소비하고 싶지 않은데.”
“알겠어요.”
그가 내 손을 꽉 잡았다가 놓았다.
“다른 여자 얘기 말고, 지금은 서로에 관해 얘기하지.”
그가 라이올라를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속은 미적지근한 느낌이 들었다.
“샬리, 날 앞에 두고 딴생각하는 건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와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러더니 침대 맡에 앉아 있던 나를 뒤로 넘어뜨리며 그 위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황제를 앞에 두고 집중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나.”
그가 엄한 얼굴을 하며 질책하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그 후 팔을 뻗어 나를 그사이에 가두며 답을 요구하듯 응시했다.
“어떻게 되는데요…?”
“벌을 받아야 할 거 같군.”
그가 고개를 내려 내 귓가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그대가 내게 집중할 때까지 흔적을 남기는 게 좋겠어.”
“카샤, 잠시만….”
그의 입술이 귓가에서 목선을 거쳐 쇄골로 이동했다. 그리곤 약하게 그곳을 깨물었다.
아…. 내일은…, 내일은 목까지 오는 드레스를 입어야….
“아직도 집중을 못 하는 것 같은데.”
그가 나지막한 웃음을 흘리며 내 입술에 그의 입술을 포개었다.
* * *
오늘은 역사 수업이 있는 날이었지만 선생이 바쁜 관계로 시간이 비게 되었다. 이참에 생각해두었던 동대륙을 알아보기 위해 제국 도서관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샬리오니 공주님.”
도서관 사서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공부하다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자주 도서관을 찾았기 때문에 그는 나를 반갑게 맞았다. 특히 제국 역사 중에 모르는 부분은 그에게 물어본 적도 많았다. 자칭, 타칭 모르는 게 없다는 사서 데인이었다.
“데인, 동대륙에 대해서 알아보려는데 관련 책 좀 추천해 주세요.”
“벌써 진도가 거기까지 나갔습니까?”
“아니요, 제가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그래요. 폐하께서도 이번에 동대륙의 제국과의 단교를 임시로 풀었다 하시니까요.”
“열심히 공부하시니 보기 좋습니다. 몇 권 추천해 드리죠.”
데인이 가져다준 책을 연대순으로 정리하고 책을 펼쳤다. 읽다 보니 동대륙의 문화나 생활 양식이 옛 동양권과 흡사한 점이 꽤 많았다. 한참을 읽어나가던 나는 중간부터 내 눈을 의심하는 단어를 발견했다.
“이단?”
펼쳐진 책을 그대로 들고 데인 앞으로 갔다.
“데인, 이거 사실인가요? 단교의 이유가 신 크리하엘 때문이라는 거?”
“그렇습니다. 동대륙이 신 크리하엘을 부정하기 시작한 후로 그렇게 되었지요. 듣기로는 요즘 동대륙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신 크리하엘이 있는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만월의 밤도 그냥 하늘의 힘이 약해져서라고 잘못 알고 있다고 하는군요.”
심장이 크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크리하엘이 나타나지 않아서 안심하고 있었지만, 의외의 곳에서 그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동대륙에서는 크리하엘을 나처럼 파괴의 신이나 다름없이 여길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들이 크리하엘을 부정하게 된 계기가 뭔가요?”
“음, 얘기하자면 아주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요. 그래도 결과만 대충 추려보자면 그 당시 전멸 직전이던 동대륙을 살려낸 영웅이 마지막 신탁을 거부하자 성녀가 신벌을 내려 그 영웅이 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크리하엘이 동대륙 영웅을 죽였다구요?”
“죽인 게 아니라 신벌이지요. 신탁을 잘 따르다 마지막에 거부한 벌이지요.”
그게 죽인 거지 뭐야. 동대륙 일이라고 현실감이 없나 본데, 서대륙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있나.
“신탁이 뭐였는데요?”
“그건 소실되어서 알 수 없습니다. 동대륙에서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제 생각엔 저들에게 불리한 신탁이라 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그 당시 동대륙에서 영웅의 존재는 이미 신을 넘어섰습니다. 신벌을 내려 화난 사람들이 성녀들을 전부 마녀로 몰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와는 다른 의미로 쓰이죠. 우리는 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성녀를 마녀라고 부르는데 말이죠.”
설마 마녀라고 다 처형한 건 아니겠지? 성녀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분명 크리하엘이 꼭두각시처럼 조종해서 그런 것일 텐데…. 보니를 생각하자 기분이 크게 가라앉았다.
“성녀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다 처형당했지요, 그 당시 크리하엘의 힘이 약해져 만월의 밤이 열흘이 넘게 지속하였다 합니다.”
“동대륙 사람들은 크리하엘을 믿지 않는 건가요?”
“믿지 않는다기보다는 거부하는 거죠. 신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여기 신은 내 기준으로 정상이 아니었다. 분명 그 영웅이라는 사람도 나처럼 이상한 신탁을 받은 게 분명하다. 그러니 거부하지 않았을까.
“구속구도 동대륙 사람들이 먼저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성녀가 나타나는 족족 구속구를 채웠죠. 구속구 없이는 마녀들을 처단할 수가 없었거든요. 동대륙에서는 이제 성녀들을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그럼 그전에는 마녀들을 어떻게 처단했는데요?”
“그전에는 마녀들이 없어서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동대륙 사건 이후에 가끔 통제를 벗어나는 마녀들이 종종 나타났지요.”
“동대륙의 영웅은 어떻게 만들어진 거예요?”
“이건 책이 더 자세하게 나와 있어요.”
데인이 내가 내밀었던 책을 다시 가리켰다.
“고마워요, 데인.”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 * *
동대륙에 어느 순간부터 생김을 명확히 할 수 없는 괴생물이 우후죽순으로 나타났다. 그것들은 사람들을 좀 먹으며 마을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켰다고 나와 있다.
거의 악마 같은 존재였다. 신성 제국에서 신탁으로 지명받은 동대륙의 영웅인 그는 그 뒤로 계속 신탁을 받으며 괴생물들을 처리하고 사람들의 선망과 존경을 받았다. 그랬던 그가 왜 마지막 신탁을 거부했을까. 대체 뭐였길래.
“샬리, 집중합시다. 딴생각하는 거 다 티 납니다.”
“죄송합니다. 헨리 선생님, 집중할게요.”
한창 검술 수업 중이었다. 하고 있는 건 고난이도의 근력 운동이었다. 팔 힘과 하체 힘이 약해 점차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있었다. 간간이 기초 검술도 배우고 있다. 아레인이 계속 번갈아 가며 하라고 계속 잔소리를 해서 헨리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다하고 기초 검술을 할 겁니다.”
“네.”
겨우 오늘치의 근력 운동을 다 끝내고 기초 검술을 시작했다. 자세를 잡는데 팔이 덜덜 떨렸다.
“샬리, 못하겠습니까?”
“할 수 있어요.”
한번 팔을 털어낸 후 다시 자세를 잡았다. 체력 훈련을 할 때는 설렁설렁하는 것 같은 헨리도 기초 검술 할 때는 진지해졌다. 같은 동작으로 몇 번 내려치는데 헨리가 다가와서 자세를 잡아 줬다.
“샬리, 자꾸 오른쪽으로 허리가 틀어집니다. 이것만 조심하면 완벽한데 말이죠.”
“헨리 선생님, 솔직히 말해 줘 봐요. 저 재능 없죠?”
“내 제자는 그런 거 알 필요가 없습니다. 재능이 있으면 노력을 덜 하게 되고 재능이 없으면 포기하기 때문이죠.”
“난 재능이 없는 것 같아요.”
내가 실망할까 봐 헨리가 돌려 말한다고 생각한 나는 크게 시무룩해졌다.
“그러니깐 그건….”
“샬리는 재능이 있습니다.”
아레인이 대신 대답해 줬다.
“야! 그걸 말하면 어떻게 해.”
아레인이 헨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나는 그 말에 깜짝 놀라 아레인을 보았다. 요즘 아레인과 간단한 말 몇 마디 나누는 게 부담스럽지가 않다. 시간이 지나면 예전처럼 편한 사이로 돌아가지 않을까.
“아레인, 내가 정말 재능이 있어요?”
“예, 있습니다.”
이번에는 헨리를 돌아보았다.
“아, 훈련 게을리하면 안 되는데…. 아레인, 저 입 가벼운 놈.
처음으로 신경 써서 가르치는 제자인데 아레인이 다 망쳤습니다.”
“누가 누굴 보고 입이 가볍다고?”
아레인이 기가 차는지 혀를 찼다. 그 말엔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헨리가 남한테 입 가볍다고 할 처지는 아니지.
“말이 많은 거랑 입이 가벼운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어?”
“헨리 선생님, 열심히 할 거예요. 계속!”
“대충하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내가 지금 대충할 짬밥인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대충할 리가 없지.
“그래서 제가 얼마나 재능이 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