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42
라이올라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현재 서대륙과 동대륙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대륙 간 단교 중이었다. 근 100년이나 되었는데 그 이유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여기 와서야 존재하는지 알았던 동대륙은 그 당시 관심 밖이라 곁가지로 대충 배운 거였다.
예전엔 사람조차 오갈 수 없었는데 현재는 좀 느슨해진 편이라 들었다. 사람은 오갈 수 있어도 물품은 모조리 반입 금지였다.
단교 후에는 남아 있던 동대륙 물건을 사재기까지 했다는 건 들었는데…. 그런데 이게 동대륙 거였어? 다들 나를 주시하는 분위기가 묘했다.
사교계의 사냥감 탐색 망에 걸린 거 같다. 여기서 말 한 번 잘못하면 밀반입했다고 물어뜯기는 건가. 루이보스가 동대륙 건지 내가 알았나. 모르면 역으로 물어봐야지.
“라이올라 영애는 루이보스를 어떻게 구하신 건가요? 대륙 간 단교 중이라 구하기 어려울 텐데요.”
동대륙에서 건너오는 건 동식물, 가공된 상품까지 가리지 않고 모두 반입 금지로 알고 있다. 단교 후로 얻을 수 있는 루트는 두 가지뿐이었다. 서로 단교를 풀었거나 밀반입을 했거나.
“저는 친척 중에 동대륙을 자주 들리는 이가 있습니다. 그분이 이번에 양국에 임시로 허가를 받으셨답니다. 그래서 귀한 루이보스를 얻을 수 있었지요.”
동대륙의 어느 나라인지는 몰라도 우리 쪽이라면 제냐크 공작이 허가했단 말인가? 현재 외교 결정권자는 외무대신직을 겸하고 있는 제냐크 공작인데, 황제한테 결재가 나서 허가받은 거겠지…? 양쪽에서 임시로 허가가 났다는 건 대륙 간의 단교가 서서히 풀리고 있다는 조짐인데. 아무래도 동대륙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다.
“제냐크 공작님이 대륙 간 외교 관계 개선에 힘쓰시나 봐요. 임시 허가도 나서서 받으시고요.”
공작이 독단으로 결정한 것인지 둘러서 물어봤다.
“아버지는 그저 폐하의 명을 따를 뿐이랍니다. 그보다 공주님은 어떻게 루이보스를 알고 계시는지 못 들었군요.”
황제의 명이라면 동대륙과의 관계 개선은 그의 뜻이라는 이야기였다. 들을 건 다 들은 것 같네.
“저는 단교 전 리노아 왕국에서 다량 보관 중이었던 걸 자주 접해서 알고 있답니다. 왕국의 보물고에 보존마법이 걸려서 아직도 그 맛을 유지 중이지요.”
대부분의 왕국이 단교 후 동대륙의 물건들을 사들였다고 알고 있다. 리노아가 동대륙의 물품을 다수 보관하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안에 루이보스까지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왕족들만 드나들 수 있는 리노아 왕국의 보물고를 이 사람들이 확인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말을 맞추면 되겠지.
“그렇군요, 각 나라에서 단교 전 동대륙 물품을 많이 보관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계속 캐물을 줄 알고 방어 자세를 하고 있었는데 라이올라는 내 말에 동조하며 다시 유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탐색 망에서 살아남은 건가.
“루이보스가 노화 방지에도, 피부에도 좋아서 자주 마셨답니다.”
내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꾸역꾸역 참고 마셨는데. 그 뒤로는 때려치웠지만….
“피부에요? 그건 전혀 모르던 사실인데 자주 마셔야겠어요. 공주님이 차에 조예가 깊으시군요.”
피부에 좋다는 말에 후작가의 영애가 눈을 반짝 빛내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한 영식이 스콘 옆에 있는 클로티드 크림을 가리켰다.
“그런데 공주님, 이건 오늘 처음 보는데 뭔가요? 버터도, 생크림도 아닌 것 같아요.”
“저도 궁금했습니다. 질감이 땅콩 잼과 비슷한 편인데 맛을 보니 아주 훌륭해서 깜짝 놀랐어요.”
“묵직한 우유 맛이 농축되어 풍부한 감칠맛이 나는 게 정말 제 취향이에요.”
스콘에는 무조건 딸기잼에 질척한 클로티드 크림인데 여기에는 그것이 없었다. 그래서 이것도 파티시에를 달달 볶아 만들었다.
그는 맛을 보더니 감탄을 하며 이것을 어떻게 알고 있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나는 리노아에 있을 때 즐겨 먹던 거라 했다.
사실 리노아에서도 책에서 봤다며 어영부영 둘러대며 공주궁 파티시에를 꾀어서 만들었었는데 어마마마와 왕세자도 좋아했었다.
그 뒤로 달리아궁 파티시에가 리노아로 유학을 가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엘더베리 잼과 레몬청, 오렌지청을 만들라고 지시한 뒤로 그는 리노아의 제과에 대해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스콘에 딸기잼과 같이 얹어 먹으면 맛이 더 훌륭하답니다. 제가 리노아에서 종종 즐겨 먹었던 것이에요.”
엘리제가 내 말대로 스콘에 클로티드 크림은 얹히고 그 위에 딸기잼을 덧발랐다. 그녀가 스콘을 한 입 베어 물고는 눈을 댕그라니 뜨고 깜빡깜빡했다. 나는 그들이 먹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루이보스 차와도 잘 어울리는군요.”
라이올라도 꽤 마음에 드는 듯했다. 그 뒤로는 평탄한 티타임 시간이었다. 중간중간 다시 탐색전이 펼쳐졌지만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을 보내며 각자의 손에 약소한 선물들을 쥐여 주었다. 내가 사람들과 합심해서 만든 엘더베리 잼과 숙성이 끝난 레몬청, 그리고 내가 아끼는 클로티드 크림을 예쁘게 포장해서 준비했다. 그들은 포장된 선물을 받아들며 기뻐하더니 내용물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선물을 받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요. 공주님의 마음 씀씀이에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뭔지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잼처럼 보이긴 하는데….”
“엘더베리 잼과 레몬청이에요. 엘더베리는 꾸준히 드시면 면역력에도 좋고 기관지에 좋은 열매예요. 레몬청은 피로할 때 티처럼 타서 드세요. 피부미용에도 좋답니다.”
내 말을 듣고 가장 좋아한 사람은 엘리제와 후작가의 영애였다.
“오늘은 정말 유용하고 알찬 티타임이었어요. 공주님, 화장품 말고 먹는 것으로도 피부미용에 좋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어요. 우유와 오렌지즙을 섞어 얼굴에 바르는 건 알았는데….”
“그러게요, 특히나 클로티드 크림은 사실 어떻게 만드는지 꼭 물어보고 싶었는데, 선물로 주시니 너무 기뻐요.”
“엘더베리 잼은 처음 들어봐요. 제 동생에게 줘야겠어요. 허약해서 감기를 달고 살거든요. 다음에도 꼭 초대해 주세요. 공주님.”
한 영식이 레몬청을 보며 흥미로운 눈을 했다.
“피로 해소에 좋다면 운동 후에 먹어도 되겠군요. 근육이 크게 피로해지니까요.”
귀족들은 설탕을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쓴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잼으로 만드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당도가 높은 딸기나 포도, 복숭아를 사용하는 잼은 많았다.
들어가는 설탕량이 적기 때문이었다. 새콤하거나 시큼한 과일들은 귀족들이 즐겨 찾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 가격이 저렴한 편이었으나 레몬 같은 경우는 고급 요리에 쓰이는 용도가 많아 가격이 꽤 높게 형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들 엘더베리는 뭔지 모르는 눈치였다. 지금 황궁 정원에 주렁주렁 달렸던 엘더베리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모조리 따서 잼과 즙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중 절반 이상이 테너에게 넘어갔다. 아마 지금 열심히 마시고 있지 않을까? 다들 크게 만족한 것 같아 즐겁게 배웅하는데 라이올라가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옆에 있던 엘리제도 의문을 띈 채 그녀를 보았다.
“라이, 안 가?”
“엘리제, 공주님께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어. 먼저 돌아갈래?”
“샬리오니 공주님, 정말 오랜만에 즐거운 티타임이었어요. 다음에도 꼭 초대해 주세요.”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제게 어떤 할 말이 있으신가요?”
“라이라고 편하게 불러 주세요. 오늘 초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정말 즐거웠답니다.”
할 말이 뭐길래 사람들을 다 보내고 혼자 남았을까.
“저도 샬리라고 불러 주세요.”
우리는 달리아궁 안의 응접실로 이동했다. 한창 추워진 날씨로 인해 벽난로가 타닥거리며 방안을 데우고 있었다.
“궁이 정말 아름다워요. 역대로 가장 아끼는 황비에게 내리는 궁이라고 들었는데 그 말이 허황된 게 아니군요.”
“라이, 제게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티타임도 끝난 마당에 나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라이올라가 눈을 사르르 접어 웃었다.
“샬리, 제게 종이와 깃펜을 주시겠어요?”
나는 티나에게 손짓해 그녀가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었다. 라이올라가 깃펜으로 짧게 적어 내리더니 내 앞으로 종이를 내밀었다.
‘샬리가 황후가 될 수 있도록 제가 힘써줄 수 있어요.’
나는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걸 말로 내뱉으면 어떻게 될지 떠올리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주위를 둘러보자 아레인과 티나, 그리고 시녀들이 보였다. 그들은 거리상 꽤 떨어져 있어 종이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는 모를 것이다. 내 반응이 탐탁지 않자 다시 종이를 가져간 라이가 무언가를 더 적더니 다시 내밀었다.
‘제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셔서 아마 당황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진심이에요. 샬리를 제가 황후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으니 종이로 쓰는 건 알겠다. 그녀의 진위를 알 수 없어 좁혀진 미간이 펴질 줄을 몰랐다. 그녀에게 깃펜을 넘겨받아 나도 이 의문 섞인 내용에 답을 했다.
‘라이를 믿는 문제에 앞서 왜 나를 황후로 만들어 주겠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그게 라이에게 어떤 득이 있지요?’
‘저는 샬리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황후의 가장 가까운 자리를 미리 선점하고픈 게 제 솔직한 심정이에요. 직설적인 말이나 제 진심을 포장하지 않는 것이 더 믿음을 줄 것 같아 그리하였으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내가 황후가 될 것이라 단정하고 도와주겠단 말인가? 도와주는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많은 건 도움이 되는 일이나 그녀가 왜 도움을 주겠다는 걸까.
확실히 그녀의 가문은 중립을 지키는 제냐크. 공작의 한마디로 바로 황후가 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공작이 아니었고 중립을 지키는 제냐크는 절대 나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시일이 걸린다 해도 시종장과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고 있는데, 라이올라 한 명이 더 도와준다고 해서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었다. 여전히 그녀의 말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자신이 있으면 라이올라 본인이 황후가 되어도 되지 않을까요?’
‘저를 떠보시는 건 이해합니다.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샬리가 오기 전엔 황후가 될 사람은 저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생각을 달리하였나요?’
‘승전 연회에서 폐하께서 샬리를 대하는 걸 보고 알았답니다. 왜 결혼이 아니라 약혼을 하시는지 모르겠으나 종국엔 황후로 만드실 거라는 건 깨달았지요.’
다른 귀족들은 약혼한다고 좋아했다는데, 얘는 왜 이런 생각을 한 거지.
‘라이가 잘못 짚었을 수도 있지요.’
‘여자의 감으로는 그게 맞다고 합니다.’
라이올라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뭐? 여자의 감이라고 하니 기분이 쌔 하다. 이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겠는데.
‘폐하를 마음에 두고 있으신가요?’
내가 적은 글을 본 라이올라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내 속도 깊이 가라앉았다. 황제라서, 그의 황비가 되고자 하는 이는 국내외로 넘쳐날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숨이 턱 막혔다. 황비가 제국에 이익을 가져다준다면, 나는 그가 황비를 받아들이는 걸 견딜 수 있을까. 나를 여전히 불안에 떨게 하고, 그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가 황비를 들이냐 마냐인데.
카샤에게 황비든 무엇이든, 다른 여자는 용납할 수 없다.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이건 안 된다. 카샤에게 품고 있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날이 갈수록 그가 좋아지고 있었다. 조금씩 나아져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여자의 등장은 내 정신 건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