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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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에 와서 드는 의문이 한 가지 있었다. 리노아를 마냥 우습게 볼 줄 알았던 귀족들이 하나같이 친절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고위층으로 갈수록 더 심할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처음 보석상과 디자이너를 접했을 때를 생각하면 리노아를 그렇게 우습게 볼 수가 없었다.
정작 걱정했었던 귀족들은 그런 티를 하나도 내지 않았다. 도리어 과한 친근감을 표시했다. 오죽했으면 친하게 지내고 싶다며 그들이 보낸 초대장이 하루에도 수십 장씩 날아왔다. 연회 때 뵈었던 아무개인데 티타임에 부디 와 달라는 초대이거나, 초대받고 싶어 하는 내용이었다. 요즘 리노아 예법을 배우고 있는데 나한테 봐줄 수 있는지 묻는 것도 가끔 있었다.
“고위층일수록 교육을 더 철저하게 받고 사교계에서도 위신 떨어질 만한 일은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냥감이 눈앞에 던져지면 해체하는 건 한순간이죠. 리노아는 그렇지 않나요?”
제국의 사교계에 대해 나디에게 묻자 돌아온 대답이었다. 기억 상실이라 하고 공부만 하며 사교계와는 담을 쌓고 지냈으니 리노아가 어떤지는 나도 몰랐다. 연회라도 한번 열렸으면 분위기라도 익히고 올 수 있었을 텐데.
“좋게 말하면 감추는 것에 능하고, 반대로 언제든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거네요.”
“사실 공주님은 승전 연회에서 꽤 성공적으로 제국의 사교계에 들어가셨어요. 이 초대장들만 봐도 알 수 있죠. 하지만 아직은 탐색 기간이라고 해야 할지, 여전히 경계해야 하는 건 맞아요.”
사냥감을 물어뜯는 건 이전 승전 연회에서 날 오해했던 영애를 보며 확실히 체감했다. 겉으로는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더니 잘 못 걸리면 참 무서운 곳이로구나.
“그럼 속으로는 여전히 리노아인이라고 무시하고 있을까요?”
“제 생각인데 공주님을 리노아와 연결 지어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리노아 예법이 유행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리노아 때문이 아니라 공주님을 보고 따라 하는 거죠. 요즘 공주님 자체가 유행이거든요.”
“사교계라도 호의적이라서 다행이에요. 정계 인사들은 약혼한다니까 파혼하기 쉽다고 좋아했다던데.”
티나가 황궁에서 도는 소문을 듣고 알려준 것이었다. 약혼한다는 소리에 공주를 황후감으로 데려온 건 아닐 거라 낙관적으로 보고 있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건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입지를 다지는 건 시간이 해결해 줄 거예요.”
리노아가 투알린을 흡수하려면 꽤 시일이 걸릴 테니까,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긴 하다.
“그보다 공주님, 이럴 때 티타임 한 번 여세요.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는 곳이 사교계거든요. 아마 예법 유행도 곧 시들할 거예요. 금방금방 바뀌는 곳이라.”
“음, 나디가 괜찮은 영식이나 영애가 있으면 추천해 줘요. 나는 아직 잘 모르니까요. 아! 라이올라 영애하고 엘리제 영애는 꼭 넣어요. 저번에 요청받은 것도 있고 공작가인데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럼 그렇게 리스트를 한번 짜보겠습니다.”
“나디, 여기는 사교계 공략 특강 같은 거 없어요?”
나는 결의를 다지며 나디에게 물었다.
* * *
테너가 약혼식의 정식 일정이 나왔다며 제반 사항이 적힌 서류를 들고 왔다.
“약혼식은 간소하면서도 화려하게 할 예정입니다.”
“그게 가능한가요?”
간소한데 어떻게 화려하게 할 수 있지? 뜻이 모순되는데.
“공주님의 현재 위치를 이용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역으로 약혼을 공고히 하고 공주님의 이미지까지 올릴 수도 있지요.”
시종장 당신이라면, 왠지 저런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도 최대 효율을 뽑아낼 것 같아.
“황궁 내에서는 간소하게 올릴 겁니다. 약혼과 결혼을 각각 한 번씩, 총 두 번 하실 예정이기 때문에, 귀족들에게 약혼으로 사치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게끔 할 겁니다.”
“그건 저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약혼식 자체가 큰 효력이 없는데 그러면 하는 의미가 없지 않을까요?”
황족은 귀족들과는 달리 약혼을 생략하니 식을 올려도 큰 구속력이 없었다. 저렇게 간소화하면 뒷말은 나오지 않겠지만 약혼의 성립을 견고하게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 대신들이 옳다구나 하고 좋아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귀족들이 나를 금방 파혼시키려 들것 같은데.
“물론 보통의 경우엔 그렇지요. 사치는 없어도 반대로 공주님을 낮잡아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겠죠, 그래서 보통의 경우가 아니면요?”
“첫 번째 방법으로는 전에 말한 사절단들을 부르는 것도 약혼식을 공식화하는 하나의 방법이지요.”
“그리고요?”
테너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왜 이렇게 뜸을 들이시나요. 첫 번째가 있으면 두 번째 방법도 있겠지. 얼른얼른 말해 주세요.
“이게 제일 중요한 거지요. 제국민들을 상대로 약혼 행진을 할 겁니다.”
“네? 약혼 행진이요?”
“공주님의 인기가 제국민들에게 얼마나 높은지 들어보셨을 겁니다.”
“듣긴 들었지만, 행진은 비용이 많이 나오지 않나요?”
“귀족들을 충족시킬 만큼 화려한 약혼식보다는 훨씬 비용이 절감되지요. 비교 불가입니다.”
확실히 그렇긴 하네. 귀족들 입맛 맞추려고 조각상이나 미술품 등을 도배했던 일전의 승전 연회를 상기했다.
일회성 장식에도 그들의 눈높이에 맞춘 화려하고 고급 물품들로만 주문해야 하니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야 할 것이다.
결혼식도 아닌 약혼식에 그런 사치를 했다간 입방아에 오르는 건 당연지사. 행진은…. 내 머리가 뱅글뱅글 돌아가며 빠르게 계산하고 있는데 시종장이 말을 이었다.
“거기다 제국은 오랫동안 황후 자리가 비어있었으니 크게 기뻐할 일이지요. 제국민들은 지금 들떠 있습니다. 소문으로 약혼 소식을 듣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것이 훨씬 파급력이 클 겁니다.”
제국민들에게 나를 각인시킨다는 거구나. 약혼식을 우습게 봤던 귀족들에게 보란 듯이 알 박고 굳히기까지 한다는 거지.
“폐하와의 약혼성립을 행진으로 공공연하게 알리시면 약혼이라 할지라도 제국민들을 통해 공식화되었기 때문에 함부로 무를 수가 없고 쉽사리 파혼을 입에 담을 수 없게 됩니다.”
최소한의 가치로 최대 효율 뽑아내기가 주특기인 테너의 완벽한 계획이었다. 그는 현재 황궁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그 모든 걸 혼자서 처리하고 있었다.
황제에게는 가족이자 충신이자 참모, 그리고 현재 비어있는 내궁의 살림과 본 직업인 시종장까지 그의 일이었다.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오는 사람이었다. 황제 곁에 있는 최고 조력자는 테너가 아닐까. 어릴 적의 참극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테너 덕분이라 했으니 지금까지 그의 공이 매우 컸을 것이다. 저런 사람이 옆에 있으면 참 든든하겠다고 생각하는 참이었다.
- 콜록, 콜록….
그가 크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테너, 무슨 일이에요? 어디 아픈 건가요?”
나는 벌떡 일어나 그를 살폈다.
“요즘 날이 추워 좀 독한 감기에 걸린 것 같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종장의 연령대를 생각하면 독감도 쉬이 넘길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최근 들어 날씨가 매섭긴 했지. 테너도 참 쉬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저렇게 기침이 심한데. 이곳은 대부분의 외상은 신전에서 치료받았고, 식중독 같은 중독 증상은 마법으로 해독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바이러스성 질환이나 기타 질병은 의사들에게 진료를 받았다.
다만 의술이나 약초학이 크게 뛰어나지 않은 편이었고 진단하기가 쉽지 않다 보니 궁의가 아니면 돌팔이 취급받기가 쉬웠다. 사람들은 감기나 다른 질병에 걸려도 신관에게서 치료받기를 원했다. 의존하는 곳이 신전이다 보니 자연히 의술이 크게 발달하지 못한 것이다.
“치료는 받으셨나요?”
“얼마 전에 신관에게서 치료를 받았는데 다시 걸린 것 같습니다. 어차피 신력으로 받은 치료는 일회성이니까요. 조만간 다시 받아야겠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금방 회복한다지만, 아무래도 테너는 회복되기도 전에 다시 독감 바이러스가 침투한 모양이었다.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라 치료받아도 바이러스가 제대로 제거되지 않거나 다시 활개 치게 되는 상태인 것 같은데….
“내가 도와줄 일은 없어요? 테너가 쉬었으면 좋겠어요. 무리해서 그런 거 같은데….”
“오히려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더 드러누울지도 모릅니다.”
워크홀릭한테 일감을 빼앗는 것만큼 잔인한 건 없다고 듣긴 했지만.
“면역력이 떨어졌나 봐요, 그럼 엘더베리라도 꾸준히 드세요.”
사절단으로 왔을 때 황궁 정원에 많이 심겨 있던 엘더베리 나무들을 보고 한 소리였다.
“공주님, 엘더베리가 뭐지요?”
여기선 엘더베리를 모르나?
“면역력을 크게 올려 주는 열매예요. 황궁 정원에 있는 걸 저번에 본 적이 있어요. 나무들이 꽤 많이 있던데요?”
엘더베리로 감기몸살을 여러 번 넘긴 나로서는 그가 꼭 먹었으면 싶었다. 시종장은 뭐든지 다 알 거라고 생각해 버렸네. 식물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를 만도 하다. 나는 건강 챙긴다고 알았던 거지만.
“많이 심겨 있는 것…. 혹시 까만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요, 그거 감기나 천식에 효과 좋으니까 꼭 챙겨 드세요.”
내 말에 그의 표정이 모호하게 변했다.
“그건 관상용 열매가 아닙니까. 새들이 자주 먹으러 오지요.”
음? 내가 본 건 분명 엘더베리가 맞는데….
“그럼 아무도 안 먹나요?”
“음, 글쎄요. 맛이 시큼하니 잘 찾는 열매는 아니지요. 새들이 좋아합니다.”
새콤하면 잼으로 만들지 않나 싶었지만, 이곳은 설탕이 꽤 귀한 편이라는 걸 상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설탕으로 엘더베리 잼을 만들 바에야 다른 맛있는 걸 만들겠지.
“으깨서 즙으로 만들어 꾸준히 드세요. 효과 좋아요. 아니다, 내가 만들어 줄게요.”
“예?”
“지금까지 신경 써준 거 보답하고 싶어서 그래요. 사양하지 마세요.”
테너는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관상용 열매를 먹으라고 하니 이상한 모양이다. 엘더베리로 즙도 만들고 잼도 만들어야지. 내가 테너를 괴롭히려고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줘야 할 텐데.
* * *
이번 티타임에 초대한 귀족 자녀들은 영애 셋과 영식 둘을 포함해 다섯이었다. 처음 여는 거라 나디의 조언에 따라 간소한 인원으로 시작했다. 우리는 달리아 궁 외부의 따뜻한 온실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졌다. 각양각색의 달리아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어 눈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공주님,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라이올라가 애교 있는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그 뒤로 다른 이들도 줄줄이 감사 인사를 늘어놓았다. 라이올라와 그녀의 친우인 엘리제, 후작가의 영애와 백작가 영식 두 명. 겉으로는 순한 양의 탈을 쓴 이들을 나는 반갑게 맞이했다. 다들 테이블에 둘러앉아 티타임을 시작하려는데 라이올라가 내게 양해를 구하며 시녀를 불렀다.
“저번에 말씀드린 귀한 차랍니다. 공주님께 꼭 선물해 드리고 싶었어요.”
“그렇다면 바로 마셔보도록 하지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 것 같군요.”
라이올라가 선물한 차를 내오는 동안 다과가 먼저 나왔다.
“샬리오니 공주님, 제가 요즘 리노아 예법을 배우고 있는데 좀처럼 따라 하기가 어려워요. 제국과 많이 달라서요, 제가 잘 따라 하고 있나요?”
후작가의 영애가 어설프게 리노아 예법을 따라 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아무래도 하던 습관이 있으니 따라 하기가 쉽지 않겠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실컷 해 줘야지.
“배운 기간이 짧은데도 잘하고 계시네요. 조금만 다듬으시면 훌륭한 품이 나올 것 같아요.”
우리가 소소한 담소를 나누는 사이 라이올라가 가져온 그 귀하다는 차를 내왔다. 차는 반투명한 색이 고운 루비 빛깔이었다. 가만, 이거 어디선가 많이 맡아본 향인데…. 나는 확인을 위해 한 모금 마셨다.
“루이보스네요. 귀한 선물을 주셔서 고마워요. 라이올라 영애.”
여기서는 루이보스가 귀하나 보네.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효능 때문에 억지로 마셨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다시 가라앉았다. 요즘 자주 이런다. 예전의 정보를 떠올리는 것까진 괜찮은데 조금이라도 그에 관한 내 일상이나 추억 같은 연관된 것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면 무언가에 차단되는 듯한 느낌.
“루이보스를 어떻게 알고 계시나요? 동대륙에서 건너온 거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