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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40화 (40/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40

* * *

제국은 발코니까지 넓었다. 다 수용 가능한 인원이었지만 왜 굳이 여기로 들어온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저희도 대화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한 영애가 블레인을 보며 수줍게 말했다. 그러자 다른 영애들도 내 옆의 남자 셋을 보며 저마다 양 볼을 붉히기 시작했다. 아하, 그러고 보니 미혼 공작 두 명이 전부 여기에 다 있었지. 내가 그들이 하는 양을 즐겁게 구경하기 시작하려는데 블레인이 미간을 모으더니 발코니를 나가 버렸다.

이런, 뭔가 시작되기도 전에 나가 버리다니? 블레인이 나가 버리자 헨리가 멀뚱대며 나와 영애들을 번갈아 보았다. 이제 영애들의 시선이 저에게 다 꽂히자 헨리도 서둘러 발코니를 벗어났다.

“샬리, 나중에 봅시다.”

둘 다 저래서 결혼은 언제 하려고 그러지? 블레인은 그렇다 해도, 헨리는 수다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내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이번에는 영애들의 시선이 나와 아레인에게로 향했다.

이런…. 헨리, 블레인. 이 미운 사람들아. 이제 보니 커튼도 제대로 안 닫고 갔네? 지금은 한창 수여식 중이건만, 내 또래 귀족 자녀들이 전부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어찌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는데 이번에는 영식들이 한 무리 들어오기 시작했다. 잘 되었네. 다들 짝을 찾는 모양인데 타이밍 보다가 나는 빠지면 되겠다. 그런데 영애 한 명이 내게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설마, 공작님들까지 애인으로 두시는 건 아니죠?”

무슨, 이런 황당한 소리가 다 있어? 다들 황제와 내 관계를 알고 있는 거 아니었나.

“샬리오니 롯트 리노아입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영애?”

내게 이름을 밝히지 않은 영애가 나를 쏘아보았다. 다들 한 발짝 떨어져서 우리가 대치하는 장면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원래 내가 구경하는 입장이어야 하는데.

“제국에 온 지 꽤 되었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제국 예법을 못 익히신 건가요?”

“스토니 자작 부인에게 제국 예법을 가르침 받았고 리노아 예법을 그대로 유지하라는 말씀을 들었답니다. 예법은 영애께서 더 익히지 못한 건 아닌가요? 아직도 이름을 밝히지 않으셨어요.”

내가 웃으며 말하자 아직 이름을 밝히지 않은 영애가 콧방귀를 꼈다. 네 마음에 안 들면 어찌할 거야, 나는 바꿀 생각이…. 아니, 바꾸고 싶어도 금지령이 내려 못하고 있는 사람인데. 그때 우리를 구경하던 영식들 쪽에서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베쉬 자작가의 차남 로니시입니다. 저는 리노아 예법이 훨씬 샬리오니 공주님에게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만, 스토니 자작 부인이라면 예법에 일가견이 있으신 분인데 그분 말씀이 맞겠지요.”

이에 대부분 영식과 영애들이 그 말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나를 노려보던 영애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리노아에선 어땠을지 모르나 여기서도 그런 문란한 행동을 하시면 안 됩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아까부터 얘는 왜 엉뚱한 소리만 한담?

“저는 그런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영애.”

“현장에서 들키고도 발뺌하시는 건가요?”

그 영애는 다른 이들의 동조를 구하듯 뒤에 있는 영애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전부 반응들이 냉담했다.

“사교계가 처음이라더니, 이거 보는 내가 촌스러워서 어쩌죠?”

“어머, 시골 영지에서 올라오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어요? 유행도 모르고 가치도 좇을 줄 모르니 말이에요.”

“주제를 알아야지, 제 형편에 무슨 공작님이람?”

“예법은 누가 못하고 있는데? 저 영애와 같은 취급을 당할까 불쾌해요.”

이 정도면 공개 처형인데, 내가 다 얼굴이 화끈거리네. 들으라고 수군거리는 게 맞는데 이 상황이 영 꺼림칙했다. 나를 저격하는 건 아니지만 그 중심에 내가 있다는 것이 말이다. 저 영애는 평소 행실이 뭘 어쨌기에 아무도 방어벽을 안 쳐주나 그래. 이쯤에서 빠져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그 영애가 내게 빠른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무식한 건 당신들이야!”

아,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든다 싶은 순간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와인을 들쳐 올렸다. 내 얼굴 앞에서 멈추어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촤락-.

음료가 앞으로 쏟아지는 소리가 났는데 어째 내 얼굴에는 아무 일도 없어 눈을 뜨자 의외의 상황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져만 갔다. 분명 음료를 내 얼굴에 쏟은 건 그녀일 텐데, 내가 아닌 그녀가 와인을 얼굴에 뒤집어쓴 채로 넋이 나가 있었다. 언제 옆에 왔었는지 아레인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죄송합니다, 영애. 음료가 쏟아지는 걸 막으려다 보니, 제 실력이 모자라 방향이 그쪽으로 튀고 말았군요.”

누가 실력이 모자라…? 그가 태연한 얼굴로 영애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이건….”

영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더니 아레인의 손수건을 잡아채고 울먹이며 연회장 쪽으로 사라졌다.

“정말 가져갈 줄이야.”

아레인이 옆에서 무심히 중얼거렸다. 어째, 내가 알던 아레인과 다른 사람인 것 같지? 내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있는데 내 곁으로 영식과 영애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공주님 괜찮으세요?”

“본래 무식한 티를 내는 이였답니다. 공주님이 신경 쓸 주제가 못 되는 사람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데 공주님의 리노아식 예법은 정말 우아하군요. 혹시 티타임에 초대해주실 수 있나요?”

“초대장을 보내면 와 주실까요?”

갑자기 주변에서 우다다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시장통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아 머리가 댕댕 울리기 시작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정말 친절하시군요.”

이리저리 상황을 보며 빠져나가려는데 누군가가 발코니의 좁은 길을 열고 또다시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 정말 인기가 많은가 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갑자기?

“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샬리오니 공주님. 저는 제냐크 공작가의 장녀 라이올라입니다. 이쪽은 제 친우인 엘리제에요.”

“만나서 영광입니다. 저는 루스타인 백작가의 엘리제라고 합니다.”

앞서 불린 라이올라 영애는 매력적인 버건디색의 머리칼과 자안을 가진 매우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는 여인이었다. 제냐크면 또 다른 공작 가문이 아닌가. 뒤이은 엘리제영애 또한 마찬가지로 외모가 출중했다. 윤이 나는 연갈색 머리칼에 녹안을 지녔다.

주변인들은 다시 구경 모드가 되어있었다. 얘네들이 사교계에서 영향력이 있는 모양이지? 이제 절실히 카샤를 찾게 된다. 아직 수여식이 한참이겠지…. 리노아에서는 살 궁리만 한다고, 영애들과 한 번도 어울려 논 적이 없었는데 이곳의 또래들을 살피니 또 새로웠다.

“그렇군요. 이렇게 환영해주셔서 정말 기뻐요.”

적당히 인사치레하며 가려는데 그들이 계속 말을 걸며 나를 붙잡았다.

“샬리오니 공주님, 티타임에 꼭 초대받고 싶습니다. 새로 들어온 귀한 차가 있는데 선물할 기회를 주시겠어요?”

라이올라 영애가 거절할 수도 없게 치고 들어왔다.

“알겠습니다. 티타임을 열게 되면 영애를 꼭 초대하도록 할게요. 다만 제가 수업이 많아 여유가 날지 모르겠습니다.”

“언제든지 기다리고 있을게요. 공주님과 친분을 쌓고 싶습니다.”

그녀가 상큼한 미소를 짓자 주변이 다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내게 곱게 인사를 한 그녀는 엘리제와 함께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라이올라가 가버리자 다시 주변이 시장통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내 속마음도 울상이 되었다.

* * *

이제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도 힘들었다. 얘기하다 보면 어느새 얼굴이 바뀌어있었다. 그들의 말을 하나씩 받아주는 것이 점점 지칠 때쯤이었다.

“인사는 다들 적당히 나눈 것 같은데.”

카샤가 산뜻한 연회용 미소를 지으며 발코니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다들 반응이 이상했다. 영애와 영식들이 하나같이 카샤를 보고 기겁하며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신사적으로 웃고 있는데 왜 저렇게 사람을 괴물 보듯이 하지. 아레인이 마지막으로 커튼을 내리고 발코니를 빠져나갔다.

“이상하네요. 왜 다들 카샤를 무서워하는 것 같죠?”

“글쎄, 지은 죄라도 있나 보지.”

무슨 죄를 지으면 저렇게 함마음 한뜻으로 무서워할까.

“아까 소란이 있는 것 같던데?”

그가 나를 발코니 끝 쪽으로 이끌며 물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워낙 많은 일이 있어서…. 그래도 소란이라 하면 역시 그 영애 일밖에 없겠지?

“음…. 크게 소란이랄 건 없었구요.”

이름 모를 영애는 이미 망신이란 망신은 다 당한 것 같은데 굳이 들추어낼 필요가 있을까 싶어 말을 말았다. 그 영애가 했던 오해도 썩 기분 좋은 내용은 아니었고. 괜히 듣고 기분 나쁠 필요는 없었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었다거나….”

그가 나지막이 흘려보내듯 무심한 말투로 말을 꺼냈다. 제일가는 남자가 눈앞에 있는데 그럴 일이 있을까.

“없었어요. 나중엔 누가 누군지도 분간이 안 가던 걸요.”

“정말 없었나.”

그가 한 번 더 확인하듯 내게 물었다.

“남녀 할 것 없이 저와 대화 하고 싶어 하길래 제가 인기가 참 많은가보다 싶긴 했죠.”

“그래, 지금 그게 내가 걱정하는 부분이지. 이럴 땐 우리 둘 외에 전부 내보내고 싶거든.”

“지금 이 넓은 발코니에 우리 둘밖에 없는데 굳이 내보낼 필요 있나요?”

여기는 첨탑이 없어서 참 다행이었다.

“그대와 춤추고 싶은데 다른 이들이 볼까 봐 고민 중이라서 그래.”

춤이요…. 그러고 보니 지금 연회장에서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실 리노아에서는 교양 수업을 듣다가 모조리 빼 버렸기 때문에 춤은 거의 추질 못한다.

“그러게요, 제가 인기가 많아서 전부 다 볼 거예요. 안 하는 게 좋겠어요. 정말로.”

바빠서 생각도 못 하고 있었네, 곧 약혼식인데 시종장한테 춤 선생이라도 붙여 달라고 해야겠다. 여기는 속성 과정 같은 거 없나?

“그대와 추고 싶은데.”

정말 지금?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러면 이실직고해야지.

“제가 실은 춤을 잘 못 춰요. 카샤 발을 엄청 밟을걸요? 농담 아니고 진짜예요.”

발 밟을 거라는데 웃길래, 정색하고 농담이 아니라고 했는데도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정말 지금 추자구요?”

“정 걱정되면, 내 구두 위로 발을 올려. 내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그거 진짜 웃길 거 같은데, 보는 사람은 없으니 괜찮으려나? 내가 망설이자 그가 나를 난간에 앉혔다. 그리고는 구두를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정말 그렇게 출 모양이다. 그가 관능적인 미소를 피워올리더니 내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발 위로 나를 세웠다.

“안 무거워요?”

“느낌도 없어.”

진짜 그렇다는 말은 아니겠지만, 안 무겁다는데 그냥 놔두었다.

“구두가 미끄러워서 불안하네요.”

“샬리, 나한테 완전히 몸을 붙여.”

그가 내 허리를 잡고 무게를 위로 지탱하자 그의 구두를 사뿐히 밟는 것처럼 나만 붕 떠 있는 상태였다. 카샤 팔은 내 무게를 감당하느라 힘들겠지만 말이다. 마침 새로운 연주가 시작되자 카샤가 천천히 움직이며 느린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이렇게 춤을 추게 될 거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어서 유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내가 그대를 웃게 하는 데 성공한 것 같은데.”

그가 내 눈을 지그시 보더니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난 정말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그의 발 위에서 손쉽게 춤을 추고 있었다. 너무 편해서 약혼식도 이렇게 하면 안 될까 싶을 정도였다.

“웃으니깐 정말 보기 좋아. 약혼식에서도 이렇게 출까?”

제 마음속에 들어갔다가 나오셨어요?

“그래도 사람들 보는 눈이 있는데 어떻게 그래요. 그때까지 제가 열심히 배워야죠.”

벗은 구두 두 짝이 달랑 놓여 있으면 사람들이 웃을 거야. 그 모습을 상상하니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가 갑자기 춤을 멈추었다. 내가 의아해서 바라보자 그가 눈을 내리깔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치 내 속을 가늠해 보듯이 샅샅이 내 눈동자를 훑기 시작했다.

“내가 있는데 왜, 배우지 마.”

그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오더니 내 귓불을 살며시 깨물었다. 그리고는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다른 남자들이랑 출 거 아니면.”

대답을 요구하듯 내 허리를 힘주어 끌어당기자 우리 사이엔 빈틈 하나 없이 밀착하게 되었다. 위험 스위치가 꺼진 게 아니었구나…. 나는 그를 달래기 위해 어깨에 둘렀던 팔을 내려 허리를 마주 끌어안았다. 그래도 배우긴 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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