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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39화 (39/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39

“다른 놈들이 이걸 본다고 생각하니까…. 역시 안 되겠는데.”

그의 표정은 심각했다. 정말 진심으로 저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더니 나를 빤히 보고는 표정을 풀며 싱긋 미소지었다.

“지금 당장 어디 가두고 나만 보고 싶은데.”

농담처럼 가볍게 말하는데 왜 이렇게 몸이 서늘하고 팔에 소름이 돋아나고 그러지.

“시간 다 됐어요. 얼른 가요.”

시종장을 보며 깨달은 건데, 카샤가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할 땐 무시가 상책이었다. 그가 내 팔을 자신의 팔에 끼우고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가지 말까?”

또 저 소리, 내가 이렇게 꾸민다고 반나절 넘게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에 넣고 나만 보고 싶은데.”

그가 무언가 중얼거렸지만 나는 다시 무시로 일관했다. 한동안 카샤의 안정된 모습만 봐와서 이땐 몰랐다. 그의 위험한 스위치가 켜지려 한다는 걸.

* * *

시종이 호명하고 연회장에 들어선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아무 생각 없이 카샤가 이끄는 대로 가다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가 데려가는 곳은 연회장의 상석이었다. 아직 약혼식을 올리지도 않았는데 나를 저 자리에 올릴 셈인가. 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내게 미소로 응답했다.

“폐하, 저기에 절 앉히려는 건 아니죠?”

내가 그에게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연회장이 쥐죽은 듯 조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맞다, 여기에 꼭 앉아 있어. 다른 곳은 절대 가면 안 된다. 어차피 내 옆자리에 그대 말고는 앉을 사람이 없는데.”

그가 신사적인 미소를 띤 채 말하는데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눈치챘다. 카샤의 위험 회로의 스위치가 켜진 모양이었다. 그의 연회용 미소를 보자 처음 그를 사절단으로 마주했을 때가 생각났다. 나는 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그가 이끄는 자리에 얌전히 앉았다. 내 손을 꽉 잡은 그가 귀에 속삭였다.

“다른 놈이 쳐다봐도 절대 눈길을 주지 마라.”

-시선을 차단하는 게 이 방법 말곤 없나. 그가 멀어지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눈길을 주는 사람들을 그가 다 차단하는 모양이었다. 이쪽으로 오는 시선은 움찔 떨고는 비껴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황제가 손짓하자 연회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계속 이럴 건가 싶어 카샤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가 여전히 앞만 보며 내게 물었다.

“왜 그러나.”

“계속 그러고 있을 거예요?”

“그대는 나만 계속 그렇게 보고 있어.”

나는 카샤를 보고 그는 시선 차단하고 그러자는 말인가. 이러려면 뭐 하러 연회장에 왔나 싶다. 그의 말대로 진짜 안 오는 것이 나았겠는데.

“하아…. 전공치 배분은 어떻게 하지,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시선이 모이는데….”

그가 심각한 얼굴로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못 참겠단 말인가. 카샤는 초조한 듯 검지로 의자 걸이를 톡톡 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꽤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음, 정말 나가야 하나. 하지만 그의 말대로 곧 수여식이 있었다. 내가 주위를 둘러보자 저 멀리서 헨리가 내게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나도 마주 흔들어 주다가 설마 헨리도 차단할까 싶어 카샤를 힐끗 보았다. 그가 미간을 찌푸린 채 헨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벌써 이러면 약혼식과 결혼식을 할 때는 어쩔 생각이지. 방금까지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이제는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가 가볍게 내 턱을 제 쪽으로 당겼다.

“샬리, 수여식 동안 다른 곳에 있는 건 어떻겠나.”

카샤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직 위험 회로가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위태해 보였다.

“저기 커튼 뒤에 있는 발코니에 있을게요. 어때요?”

나름 사람들의 시선을 차단하는 곳이라 물어보았는데 그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내가 데리러 가겠다.”

“폐하, 계속 이럴 순 없어요. 약혼식 때도 이러실 거예요?”

그 말에 잠시 멈칫하던 그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가 우울한 낯빛으로 내게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아니, 그래도 이번만은 내 말대로 해줘, 샬리.”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발코니 쪽으로 이동했다. 옆에서 아레인이 뒤따라 오고 있었다. 커튼을 걷어 발코니를 가는 동안 수많은 시선이 내게 따라붙었다.

나는 참을성 있게 여유를 잃지 않고 발코니로 들어섰다. 통과하는 순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국의 연회장 발코니는 리노아와 달리 굉장히 넓었다.

수십명이 들어와도 될 정도로, 마치 연회장 안의 또 다른 작은 연회장 같은 분위기였다. 아레인은 말없이, 정말 호위하듯 내 곁에 서 있었다.잠시 뒤 아무도 안 들어 올 줄 알았건만, 커튼이 확 걷혔다.

“샬리, 음료 하나 없이 여기 들어가면 무슨 재미입니까.”

이번만큼 헨리가 반가운 적이 없었다. 그에게서 샴페인처럼 보이는 음료를 받아들며 물었다.

“헨리는 수여식에 참석 안 하는 거예요?”

“아, 저랑 블레인은 뭐 딱히 이번에 한 게 없어서 말이죠.”

둘 다 사령관에다 단장인데 높은 배분을 받지 않나? 의아했지만 그러려니 한 나는 음료를 보고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이거, 혹시 마시던 거 준 거 아니죠?”

그의 손에는 음료가 없어 내가 미심쩍은 눈으로 보았다.

“저를 뭐로 보고 그러십니까. 급하게 온다고 샬리 꺼 밖에 못 챙겨 왔네요. 아레인, 네 것도 다시 챙겨줄까?”

“됐다, 그보다 네가 무슨 일이지? 연회에 다 참석하고.”

“아, 물론 샬리 보려고 왔지. 오늘은 여신이 강림한 줄 알았습니다. 너무 예뻐서요.”

그가 농담처럼 담백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헨리도 멋있어요.”

“흠, 이쯤이면 내 거랑 네 음료 들고 올 때가 되었는데.”

헨리의 음료 타령은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었다. 뒤이어 들어온 사람이 아레인에게 음료를 넘겨주었기 때문에.

“오늘 매우 아름다우십니다. 샬리오니 공주님.”

“고마워요, 블레인.”

블레인의 손에는 음료가 두 개였고 하나는 아레인 쪽으로 넘어갔다.

“블레인, 내 건?”

“없다.”

“하, 정말 이러기냐? 같이 참석하자고 할 땐 언제고.”

“그건 네놈이 여기로 도망가지 않았을 때 얘기지.”

그들의 콩트를 재밌게 보고 있을 때 또 다른 누군가가 커튼을 열어젖혔다. 저마다 예쁘게 치장한 영애들이 발코니로 조심스럽게 들어오고 있었다.

* * *

투알린의 승전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은 저마다 오늘의 주인공을 애타게 기다렸다. 드디어 소문으로만 듣던 ‘그’ 리노아 공주님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녀의 수업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저마다 그녀를 극찬하니, 해소되지 않은 궁금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 때문인지 이번 연회는 귀족들의 가장 높은 참석률을 보이며 한창 북적였다. 한구석에서는 영애 무리가 호들갑을 떨며 오늘의 주인공들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제가 들은 바로는 그렇게 미인이라고 하시던데, 스타니 자작 부인이 그렇게 극찬을 하셨대요.”

한 영애가 속삭이듯 작은 어조로 말했다.

“라이올라 영애보다도 아름답다고 하더군요.”

다들 공주에 관해서 얘기할 때 그에 일체 관심 없는 영애가 있었다. 그녀는 이번에 시골 영지에서 상경한 남작가의 영애, 아이비였다. 아버지가 꼭 결혼 상대를 찾아오라고 해서 상경한 참이었다. 괜찮다 싶은 영식은 저마다 이미 짝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 외에는 대부분 사별했거나 이혼한 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남아 있는 가장 잘난 미혼들은 두 공작이었다.

무려 황제 아래 최고 직위인 공작들이 전부 미혼이라니 신기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이비 영애는 두 공작에게 저를 어필이라도 하자 마음먹었다.

물론 자신도 있었다. 아이비는 제 영지에서 기사, 하인, 하녀, 심지어 영지민에게까지 공주처럼 떠받들리며 자랐다.

영지에서는 아이비가 제일 예쁘고 하나같이 아가씨, 아가씨 하며 선망 어린 시선을 보내왔었다. 그녀는 고고한 한 마리의 학이었고, 손짓 한 번에도 기사들이 저에게 흠모의 눈길을 주곤 했다.

정숙하고 올려다보지 못할 선망의 꽃으로 남고 싶었던 아이비는 그들을 냉정하게 쳐내곤 했다. 그래서 제도의 사교계가 어렵다 해도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의 대화에 참여하려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비가 말할 때마다 시골에서 올라와 잘 모른다는 뉘앙스로 그녀를 돌려 까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그들과 수준이 맞지 않다고 여기며 애써 참았다.

그녀는 구석 영지에서 올라왔지만,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제도에 산다는 그 대단하다는 귀족들은 하나같이 유치해 보일 뿐이었다. 영애들이 떠드는 소리는 하나같이 한심한 것투성이였다. 자기 앞가림이나 잘할 것이지. 그들에게 한심한 눈길을 던지는데 시종이 누군가의 입장을 알렸다.

세상에. 아이비는 공작들을 보고 심장이 콩콩 뛰기 시작했다. 둘 다 하나같이 인물들도 훤칠하고 몸에 밴 신사적인 모습도 멋있었다. 저렇게 멋진 분들이 왜 아직 결혼하지 않고 있을까. 뛰어난 인물은 누구나 알아본다고 제 눈에만 멋진 것이 아니었다. 모든 영애가 두 공작에게 눈을 떼지 못하며 소란을 떨었다.

“뷔스티에 공작님은 냉철한 모습이 정말 현기증이 날 정도예요. 좀 무뚝뚝해 보이시긴 해도 왠지 제 여자에겐 잘 해주실 것 같아요.”

“어머, 저는 시노어 공작님이 훨씬 더 잘해주실 것 같아요. 똑같이 무뚝뚝하시지만 잘 웃어주시잖아요.”

“두 분은 왜 그렇게 말이 없으실까요. 한마디라도 하면 소원이 없겠어요.”

“시노어 공작님은 연회에서는 정말 보기 힘든데 오늘 나오셔서 정말 좋네요.”

아이비는 이러쿵저러쿵하는 그녀들이 한심했다.

“자신 없으니 뒤에서 이런 말들이나 하지.”

시선이 대번에 아이비 쪽으로 모여들었다. 그녀들은 아이비와 달리 이후로도 공작들과 대면할 기회가 많았다. 새삼스러운 불공평함에 아이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비 영애, 사교계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셨죠?”

한 영애가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저는 여러분과 달리 공작님들께 인사라도 건넬 겁니다.”

나중에 내가 공작부인이 되어도 저렇게 웃을 수 있는지 두고 보자 싶었던 아이비는 그 영애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 두었다.

“작은 영지의 남작가라 하였으니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겠지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왕 사교계에 발을 들이셨으니 기본적인 것들은 지켜주세요.”

사교계가 처음이라고 무시하고, 입만 나불거리는 것이 아이비는 영 꼴 보기가 싫었다. 본인은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사람인데 자꾸 영지를 들먹이며 깎아내리는 것이 불쾌했다.

그때였다. 오늘의 주인공이라는 황제와 리노아 공주가 들어오고 있었다. 별생각 없던 아이비는 리노아 공주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아름다워서 깜짝 놀랐다.

황제는 어찌나 잘생겼는지 앞의 두 공작도 그 미모 앞에는 한풀 꺾였다. 아이비는 공주의 아름다움에 조금 감탄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우아한 자태가 여실히 드러났다. 자신도 꽤 예쁜 얼굴이었는데 공주는 저보다 좀 더 예쁘긴 했다.

황제가 공주를 아낀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눈에 불을 켜고 시선을 차단하고 있었다. 아이비는 초반에 잠시 감탄하고 금세 신경을 꺼버렸다. 저와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비가 리노아의 공주였다면 아마 저 자리에는 본인이 있을지도 몰랐다.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공주 대신 자신이 저 자리에 있었다면, 아이비도 황제를 휘어잡을 자신이 있었다.

아이비가 공작에게 갈 타이밍을 재는데 공주가 발코니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가는 기사로 보이는 남자도 굉장한 미남이었다. 황제를 두고 다른 남자와 커튼으로 가려진 발코니를 가다니. 리노아는 연애에 자유 분방하다더니, 애인도 여럿 두는 모양이지? 황제를 두고 애인을 만들다니,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고상한 제국과 비교하면 리노아는 자유분방한 게 아니라 참 문란한 나라라고 단정 지은 아이비가 공주를 보며 콧방귀를 끼었다. 황궁에서 여는 대규모의 연회장의 발코니는 공개된 소모임 장소나 다름없었지만, 황궁 연회에 처음 참여하는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레인이 그녀의 호위 기사인 것 또한.

아이비가 원체 고지식한 편이란 얘기는 많이 들어왔지만, 아닌 건 아닌 거였다. 그러나 더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녀가 눈여겨보던 두 공작이 하나같이 그쪽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그 안에서는 이제 얘기 소리와 웃음소리도 간간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말 신은 불공평했다. 한마디도 하기 어렵다는 공작들과, 멋진 기사까지 달고 있는 건 너무 했다. 황제라는 최고의 남자까지 쥔 채로 말이다. 아이비는 저 문란해 보이는 공주에게 너무 화가 났다. 여기는 리노아가 아니라 제국이었다. 아이비는 옆의 영애들을 돌아보았다. 왜 이럴 땐 소란 떨지 않는지 의아했다.

사교계가 처음이긴 해도 이건 화를 내야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제국의 잘난 남자들을 전부 손에 쥐고 희롱하고 있건만. 아무리 미모가 뛰어나다고 해도 그렇지! 리노아에서는 어땠을지 모르나 제국까지 와서 저런 난잡한 모습을 보이는 건 실례였다.

마침 옆에 있던 영애들이 의견을 모으기 시작했다. 발코니에 가서 저 대화에 껴 보자는 취지였다. 참 나, 역시나 한심한 영애들이었다. 문란한 공주를 망신을 주지는 못할망정, 부스러기나 주워 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이비는 흥분한 채로 그 무리에 파고들어 같이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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