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38
“이거, 이거, 그리고 저거. 아주 최상급 원석이네요. 그런데 최상급이기만 하면 뭐하죠? 최신 커팅은 무슨. 요즘 이 커팅 방식이 얼마나 조잡하다고 말이 많은데 이걸 들이대요.”
티나의 말에 보석상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그건, 제가 다른 것과 잠시 착각했나 봅니다. 이상하다. 들고 올 때 확인했는데….”
“재고 처리하려고 들고 온 거 같은데 어림없어요. 그나마 제일 나은 이 귀걸이. 그 가격이면 제가 귀걸이에 목걸이까지 세트로 살 수 있어요!”
티나는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나는지 마지막에는 격정적으로 말을 끝맺었다. 보석상이 시무룩한 상태로 궁을 나갔다.
“그런데 나디는 정말 하나도 몰라요? 아예 모르는 것 같은데.”
“여태 제가 일하면서 황궁에 여성분이 단 한 분도 없었기 때문에….”
그 말인즉슨 보석함 구경도 오늘 처음 해 봤다는 이야기였다.
“그럼 폐하는 어떻게 했어요? 장신구를 착용하시는 걸 종종 봤는데….”
“남성 장신구는 시종장님이 고르세요. 옷도 마찬가지고요. 사실 드레스도 맞출 일이 없어서….”
모든 곳에서 만능인 나디의 유일한 약점이라 볼 수 있었다.
“보석이랑 드레스 보는 법을 시종장님이 안 알려 주셨나요?”
“한번 알려 주셨는데 쓰일 데가 없어서 이젠 기억도 안 나네요.”
보석과 드레스도 자주 봐야 유행이나 품질이 눈에 들어올 텐데 나디의 말이 이해가 갔다.
“그럼 티나 옆에서 보고 배워요. 나디, 사실 나도 드레스나 보석은 티나가 고르는 걸로 입고 있으니까요.”
나디는 눈을 빛내며 티나를 바라보았다. 다시 온순한 양으로 돌아온 티나가 씩 웃었다.
“일단 저 두 명부터 갈아치워야겠는데요?”
황제에게는 잘했는지 모르겠으나 저렇게 사람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사람들이라면 문제가 있었다. 티나의 말대로 황궁 디자이너는 해고되고 보석상은 거래가 끊겼다. 나디는 제국의 유명한 보석상들과 드레스숍의 디자이너들을 수소문해 다시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아니, 티나의 눈앞에. 티나는 그들을 보며 한마디 했다.
“거래하면서 품질이 떨어지거나 기만하려는 자가 있으면 끝입니다. 품질을 유지할 수 있고 가격도 합리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곳만 남으시고 못 하겠는 분들은 전부 돌아가 주세요.”
당연하게도 아무도 돌아가지 않았다. 티나는 차례차례 둘러보면서 나디에게 이것저것 보석과 드레스 보는 법을 알려 주었다. 최종적으로 각각 두 곳씩 선별한 티나가 그들에게 다시 일렀다.
“내가 말한 거 못 지키면 바로바로 교체입니다. 알아들었으리라 봅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거래를 해볼까요?”
티나가 상큼하게 웃으며 그들에게 손뼉 쳤다. 티나와 나디가 드레스 원단과 디자인, 그리고 보석들을 고르는 사이 나는 시녀 한 명을 불러 보니를 데려오게 했다.
“샬리 언니!”
보니가 나를 보더니 반갑게 뛰어왔다.
“뛰다가 넘어져. 보니.”
아이는 너무 말랐다. 듬뿍듬뿍 먹여서 얼굴이 반질반질해지는 걸 봐야겠는데.
“샬리 언니, 보고 싶었어요.”
보니가 내 치맛자락을 짧은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우리 보니가 많이 심심했나 보네.”
보니는 지금 손님궁에 거처하고 있었다. 아마 혼자 있어서 심심할 테니 조만간 카샤에게 말해 달리아 궁으로 옮겨야겠다 싶다.
“보니 우리 예쁜 옷 입을까?”
“옷이요?”
아이의 고개가 갸웃하며 넘어갔다.
“티나, 보니 옷이 너무 없잖아. 기성품도 그때 급하게 몇 벌 산 게 다니까. 이번에 보니 옷도 몇 벌 맞추자.”
카샤가 이번에 달리아궁에 책정해준 예산이 어마무시했다. 내가 공주궁에서 받던 예산은 우스운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내년에 다시 예산을 책정하면 배 이상은 많을 거라는 말에 기겁했다. 본래 황비궁의 평균 예산이라 하니 제국의 금력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티나도 나 따라와서 고생이 많았지. 다른 시녀들까지 전부 다 드레스랑 보석 세트로 맞추자.”
“저는 그냥 보석이랑 드레스만 봐도 기분이 좋아요, 공주님. 소원 성취에요!”
티나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 * *
카샤와는 오랜만에 함께 하는 점심시간이었다. 그는 제국으로 복귀 후 매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정말 밤늦게 잠깐 얼굴만 보고 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늘 검술 수업이 있지?”
“네, 맞아요.”
황제가 허공에서 손가락을 까닥하자 루이가 어디선가 튀어나왔다. 정말 신출귀몰한 사람이었다.
“아레인을 데려와.”
아레인은 왜?
“샬리, 오늘부터 아레인을 바로 호위로 붙이도록 하지.”
그 뒤로 말이 없어서 그냥 넘어가나 싶었는데.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식사를 끝냈을 무렵, 아레인이 친위대 정복을 입은 채로 나타났다.
“아레인, 지금부터 샬리의 호위를 맡아라.”
“직책 변경입니까? 아니면 임시로….”
“계속, 지금부터 바로.”
아레인이 약식으로 부복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래도 인사는 해야지.
“아레인, 잘 부탁해요.”
“공주님 주변에 아무 문제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 * *
“와, 기사들 훈련하는 곳은 처음 와 봐요.”
티나가 볼을 붉히며 소녀처럼 웃었다. 오늘은 헨리와 첫 검술 수업을 하는 날이었다. 장소는 친위대의 연무장이었는데 여기저기서 웃통을 까고 멋진 상체를 뽐내는 기사들 덕분에 눈이 호강하고 있었다.
“어? 아레인 조장님, 샬리오니 공주님 아닙니까?”
땀에 흠뻑 젖은 큰 덩치의 누군가가 나를 아는 체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해맑은 목소리에 청순한 얼굴을 보니 루카였다.
“루카, 정말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나요?”
“예, 하하. 저는 멀리서 종종 뵈었습니다. 친위대는 어쩐 일이신가요?”
“군단장님에게 검술을 배우려구요. 공작님은 지금 계신가요?”
“아, 어쩐지 웬일로 우리 괴롭히러 오셨나 했더니. 예. 계시고 말고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대체 헨리는 뭘 하길래 저렇게 순한 루카마저도 괴롭힌다는 말을 한단 말인가. 내가 보기엔 그저 수다를 좋아하는 사람일 뿐인데 참으로 미스터리였다.
“샬리, 왔군요. 복장 합격! 머리 모양 합격! 준비물 합격!”
“고마워요. 헨리, 제가 제대로 준비한 모양이에요.”
“이런, 지칭 단어 불합격입니다. 저는 이제 검술선생이니까요. 선생님이라고 하셔야 합니다.”
내 뒤에 서 있던 아레인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헨리의 눈썹 한쪽이 까딱했지만 별 대꾸는 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다.
“네…. 헨리 선생님. 잘 부탁드려요.”
“자, 그럼 갑시다.”
우리는 연무장의 비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헨리가 자세를 잡아 주며 이것저것 초보가 주의해야 할 점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똑같은 자세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계속 반복할 겁니다.”
“이것만 계속 반복해요?”
“예, 이게 잡히면 다음 자세로 넘어갈 겁니다.”
헨리가 내게 목검을 쥐여 주며 시범을 보였다. 나는 헨리가 보여준 대로 똑같이 따라 하며 일자로 내려쳤다.
“으음, 계속해보십시오.”
헨리는 별말 없이 계속할 것을 요구했다. 한 백 번쯤 내려치자 팔이 후들거리며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안 되겠습니다. 기초 체력부터 길러야겠어요.”
아. 역시? 고작 백 번 내려쳤다고 팔이 후들거리니 말 다 했다. 나는 빠르게 인정하고 헨리 선생에게 받을 다음 지령을 기다렸다.
“일단 오늘은 연무장 돌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얼마나 돌아요?”
“너무 힘들어서 쓰러지기 직전까지 달리시면 됩니다.”
으어…. 예? 갑자기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던 아레인이 튀어나왔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왜 그래? 우리가 하던 대로 하는 건데.”
“똑같이 하면 당연히 안 되지. 보면서 네가 체크 해라.”
“흐음, 그럴까? 그래. 샬리는 내가 특별히 봐줄게요.”
“헨리, 제대로 해라.”
아레인이 표정을 굳히며 그를 쏘아보았다.
“하하, 굉장히 살벌한 호위를 달고 있네요. 샬리.”
헨리, 나 제대로 가르치는 거 맞죠…? 어째 믿음이 가시고 있어. 하지만 선생님의 가르침에 의문을 가지면 안 되는 법. 나는 연무장을 열심히 뛰었다. 한참을 뛰고 있는데 내 곁에 루카가 따라붙었다.
“와, 이렇게 뛰니까 투알린에서 뛰었던 기억나지 않습니까?”
“…루카는… 참 친절해요. 같이 뛰어…. 주는 거예요?”
내가 헉헉대며 루카를 고맙게 쳐다봤다.
“예, 훈련 다 마치고 나니 보이시길래요.”
헨리 쪽을 돌아보니 아레인이 뭐라 하는지 헨리가 귀를 막고 있었다. 대체 둘이 무슨 사이야. 헨리는 아레인을 엄청 좋아하는 것 같던데. 아…. 이게 한계였다. 그냥 강짜 놓고 드러누울까 생각할 때였다. 귀신같이 알아챈 헨리가 나를 불렀다.
“샬리, 이제 됐습니다. 이리 오세요.”
나는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리며 헨리 앞에 섰다. 날숨이 뭐고 들숨이 뭔지 분간도 안 갔다.
“일단 샬리는 굉장히 저질 체력입니다. 한동안은 체력부터 키우는 게 좋겠습니다.”
검술을 배울 수는 있을까. 나는 대답도 못 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아레인이 헨리를 보며 혀를 찼다.
“무식하긴, 네가 가르친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다. 번갈아 가면서 해.”
“체력이 안 되는데 어떻게 번갈아 가면서 하라는 거냐. 기본 체력이 있어야 뭘 해도 하는 거지.”
“아까는 제자, 제자 하더니 그렇게 흥미도 다 죽이고 잘도 제자가 따라오겠다. 어?”
“샬리 제자, 어떻습니까? 잘 따라서 올 수 있겠습니까?”
사실 아레인의 말대로 번갈아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조금만 더 견뎌보자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생님.”
“후, 내 제자가 이렇다. 친구야. 걱정하지 마라.”
아레인은 이제 헨리를 무시하고 있었다.
“너는 말이 통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 * *
오늘은 승전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주문했던 드레스와 보석들은 티나에게 큰 만족감을 주었다. 티나가 비장한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오늘 컨셉은 달의 여신이에요. 머리칼에는 진주 가루를 뿌려 달빛을 연상시킬거구요. 금사와 은사로 화려하게 수놓은 흰 드레스에 토파즈와 오팔이 어우러져 있는 이걸로 정했구요. 구두 역시 진주 가루와 금가루를 입힌 이걸로 신을게요. 머리 손질은 나디가 해줄 거예요. 자, 시작합시다!”
완전히 무장된 전투 용사가 이럴까. 새벽부터 일어나 중간중간 꾸벅꾸벅 졸며, 배고픔도 참고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티나의 완벽한 마법을 거친 모습은 내가 봐도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티나는 정말 천재야. 시대를 잘못 타고났어. 최고의 스타일리스트가 되어야 하는데.”
나디 또한 마찬가지였다. 머리를 뱅글뱅글 꼬아 올림머리로 만든 뒤 웨이브 진 머리칼을 몇 가닥 빼내어 자연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정말 샬리오니의 미모는 탈 우주급이다.
“모두 고마워요. 아름답게 꾸며 줘서….”
이거 끝나고 회식이라도 가야겠는데. 이 정도 수고와 노력을 받았는데 모른 체할 수는 없지. 어디가 좋을지 곰곰이 생각하는데 누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둘러보니 어느샌가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길래 내가 와도 모르지?”
그가 나를 돌려세웠다. 몇 번 입을 달싹이더니 꾹 다물었다. 이 반응은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너무 예뻐서 할 말을 잃었나 보다 카샤는 내게 콩깍지까지 씌었으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넋 놓고 나를 보던 그가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못 데려가겠는데.”
뭐? 방금 나 본다고 눈까지 풀렸으면서 이게 무슨 소리세요. 얘들이 얼마나 공들였는지 아느냐고.
“카샤, 왜 그래요. 이상해요?”
설마, 이상하다면 당신 눈이 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