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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36화 (36/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36

“황궁에 돌아오면 일사천리일 줄 알았는데, 걸리는 게 너무 많아.”

카샤가 손끝을 세워 미간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테너 덕분에 일사천리로 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사실 저는 훨씬 더 오래 걸릴 줄 알았어요.”

그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테너가 말한 게 제일 나은 방법이긴 하지. 그는 항상 효율성을 먼저 따지니까.”

“정말 시종장은 대단한 것 같아요. 카샤는 그에게 교육받았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닮은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휘며 웃었다.

“어떤 점이?”

“음…. 철두철미하고 방금 말한 것처럼 효율성을 따지는 부분이요.”

그리고 제 할 말만 하고 남의 말은 잘 안 듣는 점까지도. 물론 이건 속으로만 말했다.

“맞다, 그 부분은 정말 진저리가 날 정도로 배웠지. 다행히 나 혼자만 교육받지는 않았다, 아레인도 같이 익혔거든. 흠, 말이 나온 김에…. 아레인을 그대의 호위로 붙이면 어떨까 싶어.”

그가 드물게 나를 살피며 의중을 물었다. 헨리가 수다 떨 때 은근슬쩍 아레인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어필하는 것을 들었다. 나와 아레인의 관계가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랬을 거다. 그래도 아직 아레인과는 대화든 뭐든 옆에 있는 것 자체가 거북한데….

“아레인 말고 다른 사람은 어떤가요? 루카라든지….”

“물론 루카도 뛰어나긴 하지만, 그래도 아레인과는 비교가 불가하다. 껄끄러운 것은 알아. 말을 섞지 않아도 돼. 그냥 호위만 하는 거야.”

“아레인이 뛰어난 건 알겠어요, 그러니 더 필요한 곳에 배정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테너와 그가 잘하는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면 내게 붙이는 건 인재 낭비였다.

“그대가 걱정돼서 그러니 부디 허락해 주면 안 되겠나. 지난번 블레인 성에서와 같은 일이 일어나면….”

그는 그때 일이 다시금 생각이 나는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곤 얼굴을 쓸더니 내게 애원하는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럼…. 말을 섞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니 그냥 투명인간이 옆에 있다고 생각하지 뭐.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그제야 그가 얼굴을 피며 화사하게 웃었다.

“음, 그리고 그대의 예법 선생 말인데…. 내가 추천해 줘도 되겠나?”

“전 어차피 제국인들에 대해 잘 모르니 카샤가 추천해 주면 고마운걸요.”

“잘됐군, 스타니 자작 부인이라고 나를 가르친 이다. 괜찮은 사람이니 그대의 마음에도 들 거야.”

황제를 교육한 사람이라니. 카샤의 깔끔하고 절도있는 예법을 전수해 주신 분이구나!

가끔 그의 몸짓이나 행동을 볼 때마다 각이 딱 잡혀서 속으로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도 그럼 카샤처럼 말끔하고 멋진 자세를 자연스레 구사할 수 있는 건가. 배우기만 하면 막 카리스마가 흘러넘치고 그렇게 포즈 하나에 멋들어지고 그렇게 되나 본데.

“카샤의 교육담당이었다니 벌써부터 마음에 들어요.”

내가 맹렬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 * *

마차에서 내려 확인한 황비궁의 위용이 엄청났다. 황궁이 워낙 넓은 곳이라 황제궁과 제일 가깝다고 해도 마차를 타고 이동해야 할 정도의 거리인 건 당연했다. 내가 살고 있던 공주궁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몇 배는 큰 궁이었다. 황후궁을 제외하고는 황제궁과 가장 가까이 있었으니 아마 역대 황제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황비들이 거주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궁의 이름이 달리아궁이라고 하더라고요. 초대 일 황비가 달리아를 그렇게 좋아했대요. 궁 정원에 달리아가 환상적으로 피어있어요. 공주님.”

시종장을 따라서 먼저 황비궁을 확인했던 티나가 새처럼 조잘대며 나를 정원으로 안내했다.

“예쁘다….”

달리아가 이렇게 아름다울 줄이야. 지금부터 달리아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각양각색의 달리아가 그러데이션을 이루며 여기저기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내가 한참을 정신없이 정원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공주님, 이쪽은 나디 토클러예요. 시종장님이 소개해 주신 제국의 시녀예요.”

단정한 품새의 중년의 시녀 한 명이 나를 향해 인사를 했다.

“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샬리오니 공주님. 황제궁에서 시종장님 밑에 소속되어 있던 시녀입니다.”

“반가워요. 나디. 우리 앞으로 잘 지내봐요.”

“말씀 편히 해 주십시오. 공주님.”

말을 놓기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중년인인데…. 또 걸리는 점은 제국인은 다들 타국인을 제 밑으로 여긴다는 말을 자주 들어서 선뜻 말을 놓기가 꺼려졌다.

“담당이 바뀌어서 불만은 없나요?”

시종장이 보내 주긴 했지만, 타국 공주인 내 시중을 불만 없이 잘 들 수 있을까.

“오히려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곧 황후가 되실 분이잖아요. 시종장님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나디가 파격적인 발언을 했다. 황후가 아닌 사람에게 기정사실로 황후가 될 거라 말하는 것은 위험한 발언이었다. 물론 나랏님 없는 데서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지만. 나디는 나와 그런 대화를 나눌 만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

티나처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외부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속삭인다면 몰라도. 황제 외에는 그 누구도 황후의 자리를 공개적으로 예단할 수 없었다. 헨리는 황제의 최측근에다 직접 듣고서 그랬다지만, 혹시 그녀도 최측근이라서 그런 걸까?

“나디, 방금은 실수한 거죠?”

시종장이 이렇게 입을 함부로 놀리는 사람을 내게 보내 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제국이 익숙지 않으니, 돌다리도 한 번 더 두들겨 봐야지. 시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말은 곧 윗사람의 뜻이라고들 말한다. 방금 그녀의 말은 나 스스로가 황후가 될 거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는 것과 같았다.

물론 그녀가 최측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들은 윗사람의 명예에 흠집을 남기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내 목소리가 냉담하게 나오자 나디가 고개를 숙이며 치맛단을 잡고 사죄의 뜻을 청했다.

“용서하세요. 공주님, 모시는 기쁨에 그만 실언을 하였습니다. 시종장님에게서 자주 이야기로 접하다 보니 저 혼자 친숙한 마음에 그리되었습니다.”

“시종장과 어떤 관계인가요?”

무슨 사이길래 내 얘기까지 하나, 일단 나는 마음을 놓았다. 시종장이 편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믿을 만하다는 거니까.

“예, 공주님, 저는 시종장님의 여식입니다.”

“조금 전에 성이 토클러라고 하지 않았나요? 시종장의 성은 페레그린인데요.”

나는 놓아두었던 경계의 끈을 다시 팽팽히 당겨 올렸다. 티나도 옆에서 의심의 눈초리로 나디를 주시했다.

“시종장님이 제 수양아버지입니다. 한 사람이 갖는 권력 구도가 비대해지면 자연히 눈총을 받게 되니 성은 다르게 씁니다.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는 사항입니다.”

“혹시 결혼하셨나요? 아이는요?”

갑자기 화제를 전환하고 신상을 물으니 나디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답을 했다.

“네…? 결혼했습니다. 아이도 한 명 있습니다. 남자아이지요.”

“그럼 키우는 반려동물이 있나요?”

“네, 고양이 한 마리와 같이 살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잘 부탁해요, 나디.”

물론 나중에 테너에게 다시 한번 사실 확인을 거치겠지만 일단은 통과. 과거의 나는 참, 사람을 잘 믿는 사람이었는데. 나디 같은 사람이 있으면 그저 좋다고 바로 친해졌을 것이다. 환경이 변해서인지 삭막하고 정 없는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씁쓸해졌다.

* * *

달리아궁의 침실이 굉장히 화려하고 사랑스러웠다. 내부의 실내장식도 달리아 그 자체였다.

“공주님, 짐 정리가 다 끝났어요. 그리고 이거요.”

이곳저곳 둘러보며 눈요기를 하고 있는데 티나가 다가와 내게 작은 가방을 건네주었다. 그것은 내가 따로 챙긴 내 개인 짐이었다. 그래 봤자 얼마 되지는 않지만.

“티나, 보니는?”

“피곤했는지 오자마자 잠들었어요.”

아이들은 금세 지치곤 하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티나를 물렸다. 열쇠로 가방의 잠금을 풀었다. 이리저리 짐을 풀다가 나는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맹세의 서약서를 빼냈다. 분명 리노아를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카샤에게 바로 내밀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내 마음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이 종이가 뭐라고 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화장대 앞으로 가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서랍 열쇠가 들어있었다. 안에 서약서를 넣고 열쇠로 잠그며 생각했다. 이 서류를 내가 카샤에게 내밀 날이 없기를, 언젠가는 찢어 버렸으면. 아마 그때가 내가 당신을 완전히 믿게 되는 날이 아닐까.

* * *

“한 달 뒤 제국의 승전 연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연회 준비는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나디가 도와드릴 겁니다.”

“그렇군요.”

“약혼식은 약 두 달 뒤로 잡았습니다. 각국의 사절단이 오는 일정도 맞추기 위해 그렇습니다.”

테너가 내게 승전 연회와 약혼식의 일정을 알려왔다.

“고마워요. 내가 도와야 할 일은 없나요?”

“저는 제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저는 하고 싶어요. 마음에 없는 소리가 아니에요.”

내 말에 그가 예의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공주님은 편히 계시면 됩니다. 약혼식의 진행 상황은 제가 종종 알려드리겠습니다. 여기 공주님의 수업 목록입니다. 시녀에게도 일러두었습니다.”

테너가 내게 종이 한 장을 건네었다. 제국의 역사, 문화, 교양, 예법, 검술, 내궁 관리 등 배워야 할 것이 참 많았다.

“폐하께서는 밀린 업무를 보시느라 밤늦게 들리실 것 같습니다.”

“바쁘시면 들리지 않아도 좋다고 전해주세요.”

“아마 제가 쉬시라고 말씀드려도 듣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테너가 내게 필요한 서류들을 한꺼번에 정리해서 넘겨주었다.

“테너, 나디가 수양딸이라고 왜 말해 주지 않았어요?”

내 말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테너가 놀라는 것은 처음 본다.

“흠, 벌써 알아내셨습니까? 훌륭하십니다.”

뭐야, 이 반응은? 그도 나이가 있으니 내게 알려 주는 걸 잠시 잊을 수도 있다 여겼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철두철미한 테너가 그 사항을 깜박할 리가 없었다.

“절 시험한 건가요?”

“전혀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군요. 성도 다르거니와 보통은 처음부터 알아차리지 못합니다만.”

“나디가 실수하지 않았다면 저도 알지 못했을 거예요.”

“본래 말이 옮겨갈수록 그 과정에서 비밀이 아니게 되는 법이지요. 나디가 누군지는 폐하와 저 외에 정말 극소수만이 알고 있습니다.”

“이제 저와 티나가 추가되었네요.”

“본래 그러지 않는 아이인데, 덤벙거리지 않도록 제가 다시 주의 시키겠습니다.”

테너는 시종장답게 금방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러지 마세요. 테너에게 물은 건 사실 확인을 위해서였어요. 아들이 고양이를 키운대요.”

“그렇습니다. 손자가 고양이를 아주 좋아하지요.”

테너가 나를 보며 미소지었다. 능청스러운 시종장을 보자 웃음이 흘러나왔다.

* * *

예법 수업 첫 시간이었다. 황제에게 예법을 가르쳤다는 스타니 자작 부인이 드디어 오는 것이다. 그녀는 황제를 교육한 장본인으로 제국 사교계에 매우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평소와 달리 리노아의 예법을 하나하나 신경 쓰며 되짚고 있었다. 제국의 예법을, 아니 황제의 카리스마 넘치는 예법을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

“공주님, 스타니 자작 부인이 오셨습니다.”

스타니 자작 부인이 정도를 넘지 않은 절제의 미덕을 뽐내며 걸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자작 부인의 호의와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우아함을 강조하는 리노아 예법으로 자작 부인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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