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35
* * *
“일단 마법을 배울 수 없게 되었으니 검술을 배워야겠군.”
“네.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저 열심히 배울게요.”
사실 마법은 큰 기대가 없었다. 마법사의 재능은 전체 인구의 0%에 가깝다고 하니 말이다.
“내가 가르쳐 줄게.”
그가 직접? 카샤가 검을 쓰는 것은 이미 몇 번이나 봤다. 뭘 모르는 내가 봐도 하나같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 엄청난 스승이 생긴 건가. 하지만 카샤의 검술 수업은 시작하기도 전에 폐강되어 버렸다. 공작 성의 너른 홀에서 다 같이 식사 중일 때였다. 카샤와의 검술 이야기를 꺼냈더니 헨리가 웃으며 한마디를 했다.
“폐하께서 검술 수업을요? 그것도 샬리한테요.”
“문제라도 있나.”
“많고말고요.”
헨리가 씩 웃음 지었다.
“우선, 제가 듣기로는 황제 폐하 집무실에 서류가 한가득 쌓여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시간이 아예 없으실 거란 말이지요. 아아, 그런 눈 하지 마시고요.”
“하…. 내가 알아서 한다.”
“예, 그럼, 그래도 시간이 난다고 쳐봅시다.”
카샤가 해 보라는 듯 턱짓했다.
“샬리가 힘들다고 주저앉으면 훈련 더 시킬 수나 있으십니까?”
“뭐…?”
그의 당황한 얼굴에 헨리가 예상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직 500번은 더 휘둘러야 하는데 샬리의 손바닥이 다 터져서 울상이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손바닥이 터졌는데 무슨 500번이나 더 휘두르나.”
이제 그의 얼굴은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우리한테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몇천 번씩 휘두르라 하셨던 분 맞으십니까.”
“네놈은 친위대 나간 지가 언제인데 아직 그 소리를 하지?”
“그러니까 샬리한테는 그렇게 못하겠다는 말씀이시죠?”
“…….”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카샤한테는 검술 못 배우겠구나. 나도 헨리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
“그럼 누구한테 배우죠?”
내가 묻자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한테…. 그래, 나한테는 안 되겠어.”
그가 한숨을 쉬며 인정하더니 아레인을 한 번 보았다.
“검술로나 가르치는 거로 보나 아레인이 적격이긴 한데….”
잠시 테이블 위로 적막이 흘렀다.
“저도 검술로는 아레인에게 지지 않습니다만.”
어색한 정적 사이를 헨리의 목소리가 비집고 튀어나왔다.
“검술이 뛰어나면 뭐 하나. 못 가르치는데.”
“왜 이러십니까. 저도 잘 가르칩니다.”
그 말에 카샤가 가볍게 콧방귀를 끼었다.
“차라리 블레인에게 가르치라고 하고 말지.”
“블레인이 얼마나 바쁜지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그리고 블레인한테 배울 바에야 저한테 배우죠.”
묵묵히 식사만 하던 블레인이 손에 쥐고 있던 식기의 움직임을 멈췄다.
“헨리, 그 말 좋게는 안 들리는데?”
블레인이 조용히 발끈하기 시작했다.
“아니, 넌 실력이 좀 그렇잖아?”
“…….”
점잖던 블레인이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헨리에게 ‘죽고 싶지?’라고 하는 걸 봐 버렸다. 어수선한 가운데 나와 아레인의 눈이 마주쳤다. 무감했던 그의 눈이 얕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가 내 앞에서 말하는 것을 카샤와 업무 이야기를 할 때를 제외하면 본 적이 없었다. 아직 그와 대화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지금도 심장이 옥죄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럼, 헨리 네가 샬리의 검술을 봐주도록, 알아서 잘할 거라 믿는다.”
마지막은 한 자, 한 자 힘을 주며 말하는데 내 간담이 다 서늘했다. 모두 공사다망한 것 같은데 괜히 바쁜 사람들 물고 늘어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저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인데 처음부터 헨리가 가르칠 필요가 있어요?”
“있어. 처음이 제일 중요하지.”
그렇다고 하니 할 말이 없네.
“헨리. 잘 부탁해요. 저 열심히 배울게요.”
“샬리, 저는 혹독하게 훈련시키니까 긴장해야 할 겁니다.”
그 말에 카샤를 비롯한 모두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왜 그러지…? 나만 모르는 무언가가 있나 싶어 어리둥절해질 때였다.
“헨리, 수다 떨면서 놀지나 마라.”
아 수다…. 헨리, 그렇지.
* * *
제국에 입성할 때 우리를 반기는 제국민들의 환호 소리가 엄청나서 당황했다. 제국민들의 카샤에 대한 인기가 대단했다. 이 정도면 만백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긴, 타국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나 잔인하고 무서운 황제지, 제국민들 입장에서는 아주 든든한 통치자일 것이다.
비록 귀족들을 한번 피로 물들였다고는 하나, 국민에게는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들었다. 귀족 세력이 성행할 당시에 제국민들의 불만이 하늘을 치솟았다고 하니, 그는 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사람일 것이다.
“모두가 그대를 좋아하는데.”
그가 마차 석에 편히 등을 기대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카샤를 환영하는 것 같은데요. 제가 오는 걸 제국민이 이미 알고 있나요?”
“이건 그대를 위한 환영 인사다. 다들 소문 하나는 빠르지. 그대는 이미 제국민에게 인기가 좋아서 딱히 신경 쓸 필요도 없었고.”
음…. 인기가 안 좋았으면 여론 조작이라도 했을 거란 얘긴가…?
“테너, 오랜만이네요.”
황궁에 도착하고 처음 우리를 맞이한 이는 시종장 테너였다.
“다시 뵈니 반갑습니다. 샬리오니 공주님.”
그가 인자한 미소로 화답하더니 우리를 황제궁의 응접실로 안내했다.
“급하게 보고 할 일이 있나 보군.”
“그렇습니다. 폐하.”
제국 일인 것 같은데 내가 있어도 되나?
“제가 같이 들어도 되는 내용인가요?”
“공주님이 꼭 들으셔야 하는 내용이지요.”
그 말에 카샤의 입매가 비틀렸다.
“말이 나왔나 보군. 뭐라 하던가.”
“정통성의 이유와 제국의 문화를 배울 겸 황비를 먼저 거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 내 문제였구나. 황비를 거친다는 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터라 크게 신경 쓰이는 내용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나 보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군. 내일 한 명도 빠짐없이 국정 회의에 참석시켜라.”
“이제 그러시면 안 됩니다. 폐하.”
카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자네가 하는 말엔 항상 이유가 있었으니 들어보도록 하지.”
“폐하께서 하시는 일이 곧 공주님에게 영향이 가게 됩니다. 공주님을 황후로 만드실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허울뿐인 황후는 황비만도 못하게 됩니다.”
“흠…. 내가 없을 때 말이군. 하지만 그럴 일이 있겠나.”
“공주님을 황후로 만들기 위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귀족들을 제거한다면 폐하가 아닌 공주님의 이미지에 크게 손상이 갑니다. 그렇게 황후로 만드시면 안 됩니다.”
그 말에 카샤가 침음을 삼키며 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참는 건 이제 골이 난다. 내 성미가 아니란 걸 알지 않나. 테너.”
“우선, 공주님과 약혼을 하십시오.”
약혼이라니? 귀족들이라면 몰라도 국가의 대소사에 약혼이란 건 무용지물 아닌가.
“약혼?”
“황족 중에 약혼한 이가 단 한 분도 없다는 것은 잘 아실 겁니다. 그래서 생소하시겠지요. 한데 약혼을 생략한다는 법도 없습니다.”
“테너, 약혼을 먼저 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요?”
“황비로 들어가시면 황후로 승격되시기까지 매우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게 됩니다. 이때는 귀족들도 황족의 대소사에 큰 발언권을 가질 수가 있지요.”
나는 제국에 그 어떤 뒷배도 없으니까…. 그들에게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나는 그저 타국인일 뿐이었다. 그것도 한참을 깔아보는 약소국의 공주. 당연히 못마땅할 테지. 황제가 권력으로 찍어 눌러 황후로 올렸다 한들, 그가 곁에 없으면 빈껍데기나 다름없는 이름뿐인 황후가 될 게 뻔했다. 내 권력은 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닌 그에게서 나오게 될 테니까.
“폐하께서 귀족들의 발언을 무시하고 저를 황후로 올리면 그 뒷감당은 제 몫이란 거죠? 저는 제국에 아무런 세력이 없으니까요.”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아무리 감싸 안으셔도 오히려 역효과만 나게 되겠지요.”
카샤가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약혼으로 시간을 끌란 소리군. 샬리에게 뷔스티에와 시노어를 붙인다면 그들도 함부로 할 수 없겠지.”
“또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말씀드리기 외람되오나 리노아가 약소국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공주님의 출신을 물고 늘어진다면요. 하지만 이번에 리노아가 투알린을 흡수한다면 전 베고니아 수준으로 국력을 끌어올릴 수가 있습니다.”
카샤가 아무 세력이 없는 내게 공작 가를 두 곳이나 붙여 준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었다.
“그럼 리노아가 투알린을 온전히 흡수하는 동안 저는 제국의 교양과 예법을 배우면 되겠군요. 그 사이 제국의 공작 가문 두 곳에서 후원도 받고요.”
“그렇습니다. 누가 보아도 건드릴 수 없을 만큼, 황후의 재목을 갖추실 때까지 약혼 기간을 가지시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고 생각되어 드리는 말이지요.”
나는 충분히 테너의 말을 이해했다. 카샤가 지금까지 귀족들을 대함에 있어 피를 여럿 본 것은 사실이었다.
나 또한 그렇게 황후로 올린다면, 귀족들에게 황제를 폭군으로 만드는 황후가 될 여지도 줄 수 있었다. 시종장은 나를 껍데기뿐만이 아닌 진정한 황후로 만들어 주려고 하고 있었다. 황제의 시종장으로 오래 보필했다더니 대단히 빈틈없이 철저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카샤의 철두철미함은 아무래도 테너가 교육을 담당한 영향이 큰 것 같았다. 저번 궁 안에 갇혔을 때는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내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는 그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카샤는 마음에 차지 않는 듯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제냐크 공작까지 지지해 준다면 이렇게 돌아갈 필요는 없지 않나.”
“3대 공작이 지원한다면 분명 바로 황후로서 승격이 될 요건이 충분합니다. 하지만 제냐크는 대대로 중도파였습니다. 아마 절대로 그들의 입장을 바꾸지 않을 겁니다.”
테이블을 두드리던 카샤의 손가락이 멈췄다.
“알겠다. 자네 말대로 하지.”
“고마워요. 테너.”
“별말씀을요. 제가 해야 하는 일인 것을요.”
“수고했다, 이제 나가 봐도 좋다.”
“드릴 말씀이 또 있습니다.”
“뭐지?”
카샤의 말투가 퉁명스러워졌다.
“공주님의 거처를 어디로 정하실 생각이신지요.”
“음, 어차피 약혼할 거, 같은 궁에 있었으면 싶은데….”
“안 돼요. 폐하.”
“아니 됩니다. 폐하.”
나와 테너가 동시에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멈칫하더니 우리 둘을 쳐다보았다.
“또 참아야 하나….”
“황후가 되더라도 같은 궁에 못 있는 거 아시잖아요.”
“모르겠는데.”
뭐야, 이 막무가내는…. 떼쓰는 것도 아니고. 당황한 나와 달리 시종장은 태연하게 카샤의 말을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임시로 황비궁에서 하나를 선택하시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그가 나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럼 황제궁과 제일 가까운 곳으로 하지.”
“예, 폐하.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테너는 황비궁의 새 단장을 위해 자리를 비웠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못마땅했다.
“카샤, 왜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