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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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타스 제국의 국무 회의장은 황제의 부재로 얼마 전부터 심각한 의견이 오고 갔다. 현 카시카프 황제의 즉위 후 귀족파가 전부 숙청되어 갈아져 나가고, 남은 것은 황제파와 중도파뿐이었다.
실제 중도파는 실권 없는 귀족파의 역할까지 해야 했다. 나머지는 방계에서 끌어온 신진 귀족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고 그들 대부분이 황제파였다.
지금 제국의 황권은 황제가 거의 압도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사실상 남아 있는 귀족들은 허수아비라고 해도 될 정도로 권력의 구도는 기형적이었다. 프레타스 제국의 초대 황제 이후로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황후는 안 되오.”
“당연한 일이지. 황후는 무조건 제국에서 나와야 합니다.”
황후 반대를 외치고 있지만 속으로 그들은 침음을 삼키고 있었다. 사실 제국은 선대부터 서서히 황권이 약화하여 무너져버리고 있었다 해도 다름이 아니었다. 그나마 유지하던 황권도 선황제가 유명을 달리하며 황태자에게로 제대로 넘어가지 못했다.
중도파들은 제국의 핏줄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황태자는 황제파에 의해 겨우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이미 숙청되어 버린 사이드 공작은 황권을 집어삼킬 두 가지 계획을 세웠었다.
황태자를 제거하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황태자의 후손을 제 가문의 핏줄과 엮는다. 사이드 공작은 딸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의 방편으로 방계의 여식까지 데려와 황태자비로 만들려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전부 다 실패했다. 사이드 공작뿐만이 아니라 귀족파, 중도파 가릴 것 없이 전부다.
황태자의 울타리 안에 들기 위해, 혹은 감시나 꼭두각시의 목적으로 각 가문에서는 다음 세대의 영식과 영애들을 그의 곁에 붙이기 위해 안달 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모조리 무위로 돌아갔다.
카시카프 황태자는 저에게 접근하는 모든 영식과 영애들을 무자비한 방식으로 떼어 냈다. 그 당시 그에게 붙은 암살자들은 기세등등한 귀족파들에 의해 실력 고하를 막론하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밀파되었다. 황제파에 의해 꾸준히 채워진 친위대와 암영조가 없었다면 아마 그는 진즉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던 황태자는 자신에게 붙은 영식과 영애들을 매번 암살자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그들을 암살자들과 칼들이 맞부딪히는 중앙에 두고 버려뒀다.
하나같이 곱게만 키워져 왔던 귀족 자녀들은 살기가 난무하는 한중간에서 벌벌 떨었다. 대부분은 목숨의 사투를 벌이는 현장의 한복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를, 신 크리하엘에게 비는 수밖에 없었다.
종래에는 황태자가 장소를 옮기려 하면 귀족 자녀들은 지레 겁먹고 내빼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귀족 세력에서 암살자들을 보내는 일을 멈춘 것은 아니다. 목표는 황태자였으니 밀파된 암살자들이 다른 이를 겨냥할 일은 없다고 여겼으므로.
그러나 결국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귀족파에 속한 백작가의 영식이 암살자의 눈먼 칼에 맞은 것이다. 맹독을 묻힌 칼이였기 때문에 백작가의 영식은 그 자리에서 사망해 버렸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황태자에게는 누구도 붙지 않았다.
황태자비 계획은 당연히 물 건너갔고 그가 황제가 된 이후로는 발언권조차 줄어들어 귀족 대부분이 황후의 빈자리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다. 자연스럽게 생긴 암묵적인 룰이었다.
이유는 당연히 황제에게 거스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한 명이라도 언급했다가 노한 황제의 불똥이 어디로 튈지 누가 알겠는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들은 눈칫밥을 한두 번 먹은 이들이 아니었다. 남은 귀족들 모두가 실시간 숙청으로 갈려져 나가는 귀족파들을 지켜보았다.
피에 흠뻑 물든 대전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그에 대해 누구 하나 이의 있는 귀족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것은 타국의 공주가 황후 자리를 넘보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전까지였다.
“그저 황비로 들이시는 줄로 알았건만!”
“아직 확실하지 않은 것 아니오?”
그 질문에 말한 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황성에 소문이 파다하여 제국민들도 다 알고 있는 것을.
“제대로 된 소식통으로 들은 얘깁니다.”
사실 황제가 없어서 이런 얘기를 입 밖으로나 꺼낼 수 있지, 평소 같으면 눈치 보며 입도 뻥끗하지 못했을 것들이었다. 그들은 베고니아전에서도, 그리고 이번 투알린전에서도 황제가 참전할 기회를 주지 않아 전공에 따른 보상도 배분받지 못했다.
황제파인 공작 가 두 곳을 끼고 황제 혼자 다 해 먹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넝쿨째 굴러들어온 베고니아의 미스릴 광산은 뷔스티에와 시노어 공작가가 공적으로 하나씩 받는 걸 보며 손가락만 쪽쪽 빨아야 했다. 물론 참전도 못 했기 때문에 승전 공적치에 대한 발언권조차 없었다.
이번 투알린도 마찬가지다. 어떻게든 기회를 얻기 위해 애쓰던 귀족들은 황제가 베고니아 때보다 훨씬 적은 수로, 그것도 고대 병기까지 들고 나들이라도 가듯 떠난 것을 보며 망연자실했다.
고대 병기는 선선대에서부터 내려온 황족의 사재였으니 간섭할 거리도 없었다. 그냥 제힘으로 왕국 하나 먹고 그걸 또 이번에 데려올 공주의 구혼선물로 준다는 데 귀족들은 할 말을 잃었다. 참전이라도 했으면 반대 의견이라도 내보는데 그들은 티끌만큼도 손을 댄 곳이 없었다.
아니, 손을 댈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황제는 귀족들을 불신했다. 재상이 있음에도 대부분의 정무를 그가 다 보는 중이었다.
그가 믿는 건 황제의 즉위를 도운 공작가와 두 곳을 위시한 몇 가문밖에 없었다. 황제가 친위대 외에는 믿지 않는다는 소리가 괜히 우스갯소리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친위대에 사람을 채운 건 뷔스티에 가문이고, 시노어 공작은 이전에 친위대 소속 기사였기 때문이다.
“제대로 의견을 모읍시다. 우리끼리 반대한다고 해서 폐하께서 눈 하나 꿈쩍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목이나 떨어지겠지. 제국법을 이용해야 합니다.”
“제국법이라니요? 타국의 공주가 황후가 되지 못한다는 법은 없습니다만.”
“물론 그렇습니다. 다만 황비를 거쳐야 한다는 조건은 있지요.”
그 말에 다들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전부 비관적인 표정들이었다.
“공주가 제국의 문화와 예법을 모를 때나 적용 가능한 법이 아닙니까.”
“폐하께서 리노아 공주를 급히 데려온다고 들었습니다. 리노아에 통보하고 바로 출발했다 하니 제국에 대해 어디 배울 겨를이나 있었겠냐 이 말입니다.”
그 말에 다들 회의적인 반응만 나왔다.
“황비에서 황후가 되는 게 까다롭긴 합니다만…. 그래도 폐하의 의중이….”
“공주가 황비일 때 가만히 넋 놓고 있자는 말이 아닙니다. 그 틈에 제국인의 여식 중 한 명을 황후로 보내야지요. 폐하께서도 드디어 여인에 눈을 뜨신 것 같으니 이제 거부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다들 리노아 공주의 명성을 한 번쯤은 들어보았기에 썩 내키는 얼굴들이 아니었다.
“폐하께서 공주를 꽤 아낀다고 들었는데…. 또 목이 날아가면 어쩐단 말이오.”
그들이 걱정하는 건 제 목숨, 제 가문의 안위뿐이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지탱해 왔는데 황후 문제로 도박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타국 공주가 황후가 되는 모습을 보자니 속이 뒤틀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주점이나 여관에서 떠돌이 음유시인들이 리노아 공주의 미모를 찬양하는 노래를 종종 부른다고 한다. 귀족들보다 평민들에게 더 잘 알려지고 인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지금 문제는 그것보다 여론입니다. 제국민들이 리노아 공주를 열렬히 반기고 좋아하고 있다고 하니 문제지요.”
“우리도 제국의 꽃으로 불리는 영애가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전부 고개가 제냐크 공작에게로 돌아갔다.
“내 여식을 말하는 겁니까.”
“라이올라 영애라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도 인정한 바가 있으시고.”
공작가의 아름다운 영애는 황후가 되기에 적합한 정통성을 지녔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지만 제냐크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 가문에서는 황후를 배출할 생각이 없습니다.”
중도파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제냐크 공작이 거부하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들은 것과는 좀 다르군요. 라이올라 영애가 폐하의 짝이 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들었습니다만…. 어험….”
“폐하께서도 라이올라 영애의 담이 크다고 칭찬하지 않으셨습니까.”
대신들이 떠드는 꼴을 묵묵히 지켜보던 제냐크 공작이 입을 열었다.
“라이올라가 암살자들 사이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것을 말하는 거라면 그대들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전부 합죽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 사건은 다들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은 종류의 이야기였다. 라이올라는 본인이 자처해서 그리되었다지만 다른 이들은 전부 그들이 자녀들을 황태자에게 떠민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지지부진하게 끝나버린 회의를 마치고, 정무까지 다 마친 제냐크 공작은 늦은 저녁 저택으로 귀가했다. 그들의 말대로 라이올라 때문에 제냐크 공작은 근심에 쌓여 있었다. 전부터 황제의 옆에 서길 원하던 아이가 아니었는가.
황제가 타국의 공주를 황후로 앉히기 위해 데려오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크게 마음을 상할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차분히 미소를 지어 제냐크 공작은 딸이 황제를 단념했다고 생각했다.
공작 저에서의 생활도 딱히 변함이 없었으니 말이다. 외출이 잦긴 하지만 그것은 실연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종종 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황후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라니 절대 안 될 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버지, 오늘 엘리제 영애를 만나러 루스타인 백작 가를 방문했는데요.”
엘리제는 그녀의 가장 가까운 또래 영애였다.
“그랬구나. 재미있었느냐.”
라이올라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식사 중에 백작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정무 회의에서 저를 황후로 올리자는 얘기가 나왔다면서요?”
“그것은 신경 쓸 것 없다. 아직도 황후가 되고 싶은 것이냐.”
“아버지, 저는 황후만 되고 싶은 게 아니에요. 황제 폐하의 마음도 얻고 싶어요.”
제냐크 공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리노아의 공주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의 마음을 얻지 못했는데 제 여식이 너무도 허황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둘 다 힘든 일이로구나. 얼마 전에 포기한 것이 아니었느냐?”
“어머, 전혀 포기하지 않았어요.”
라이올라는 포기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라니 떴다. 그 모습에 제냐크 공작은 씁쓸해졌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러는 거니. 그냥 포기하거라. 황제 곁에서 목숨을 연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단호한 제냐크 공작의 말에 라이올라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저는 최고의 자리에 앉을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태어났어요. 아버지. 어릴 때부터 황후 외에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해요.”
“아무렴, 너는 분명 그렇게 태어났단다. 하지만 때가 맞지 않는구나. 지금은 아니다. 황후 자리는 거절했으니 일찌감치 마음을 접거라.”
“저도 황제 폐하가 얼마나 어려운 분인지 알아요. 차근차근 계획을 밟아나갈 예정이에요.”
제 딸이 도통 고집을 꺾지 않아 공작은 난감함과 동시에 피로감을 느꼈다.
“황후의 자리는 이미 예정이 되어있다. 리노아의 공주가 그 자리에 앉게 될 거란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공주가 황후가 되는 것을 방해할 생각 없어요.”
라이올라가 다시 꽃처럼 환한 웃음을 지었다. 제가 황후가 될 거라면서 어째서 공주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제냐크 공작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무슨 말이냐, 방금은 황후가 되고 싶다면서.”
“아버지는 그냥 지켜만 봐주세요. 제가 황후가 되는 모습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