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33화 (33/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33

1. 제국 적응하기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아, 그게 말이죠.”

내 질문에 헨리가 입을 열자 카샤가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헨리, 블레인에게 일러 공주의 방 주변에 경비를 늘려라. 루이, 이번 일에 대한 블러디반의 의뢰자가 누군지 알아봐. 그리고…. 다들 이만 나가 보는 게 좋겠군.”

헨리와 루이가 존명을 외치며 모두 방을 나가 버렸다.

“제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예요?”

카샤가 모두를 내보낸 뒤 내가 물었다.

“내가 황태자일 적 얘기야. 별일은 아니다.”

별일 아닌데 헨리가 저런 추측을 한다고? 하지만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더 묻지 않았다.

“위험하니 오늘은 같이 있는 게 좋을 것 같군.”

그가 자연스럽게 말을 넘기며 옆으로 붙자 내 눈이 가늘어졌다.

“아까 헨리에게 말해서 제 방 경비를 늘리셨잖아요.”

“내가 안심이 안 돼서 그래.”

그가 한 치의 사심도 없다는 듯 당당한 얼굴로 나를 마주했다.

“어떻게 하고 싶으신데요?”

“옆에서 그대를 종일 지키는 거지.”

“여기는 침대가 하나밖에 없는데 어디서 주무시려구요?”

“침대가 몇 개든 그건 큰 상관이 없다.”

“습격을 이미 한 번 받았는데 또 오겠어요? 아까는 바깥에서 방심하고 있어서 그런 거죠. 지금은 안이고 경비까지 철저하잖아요. 고맙지만 저 혼자서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가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카샤, 아까는 정말 고마웠어요. 어깨에…. 정말 박히는 줄 알았거든요.”

아까 말하지 못했던 고마움을 전하자 그의 입매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오히려 내가 고마운데. 한 군데도 다치지 않아서. 좀 전엔 정말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아까 그가 감싸 안았을 때 그의 심장이 내 것처럼 세차게 뛰던 것을 기억한다. 고마운 마음에 마주 웃자 그가 내 얼굴 여기저기에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티레의 첨탑일 이후로 그가 자주 하는 것이었지만 여기엔 조그만 문제가 있었다. 가볍게 시작하던 키스가 내버려 두면 분위기가 급변하며 주변 공기가 팽팽해지는 게 문제였다.

지금도 그렇다. 쪼듯이 장난스럽게 입술에 키스하다 어느 순간 나를 무장해제 시키고 그의 혀가 부드럽게 안으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적당한 순간에 입술을 떼어 냈다.

“카샤, 잘 자요.”

내가 밤 인사를 하자 그의 눈썹 한쪽이 불평하듯 올라갔다.

“잘 잘 수 있을 리가….”

* * *

다음 날 우리는 황성에 도착하기 전 정비를 하기 위해 뷔스티에 성에서 하루를 더 묵기로 했다. 티나도 황성에 입성하기 전 어떤 드레스와 화장, 보석을 맞출지 다른 시녀들과 고심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우겨서 계속 편한 여행자 드레스를 고수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티나 말을 얌전히 귀담아들었다.

“공주님, 이 드레스와 보석이 어울릴지 한번 봐야겠어요.”

나는 묵묵히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옆에서 보니가 작달막한 손으로 장신구들을 만지작거리며 그중에 두 가지를 골라 티나에게 건넸다.

“티나 언니, 이 보석은 언제 해요? 샬리 언니가 하면 예쁠 거 같아요.”

적당한 크기의 연한 분홍빛이 감도는 핑크 다이아몬드가 메인 보석으로 그 주위를 작은 크기의 오팔이 둘러 감싸고 있었다. 섬세한 세공이 가미되어 있는, 머리 장식과 목걸이가 한 세트인 장신구였다.

“보니가 안목이 좋네? 안 그래도 저 푸른색 드레스랑 같이 맞춰 보려고 생각 중이야.”

티나가 열 번 가까이 뒤에서 내 허리를 졸라매고 있을 때 구세주가 방문하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마법사인 에이솔 캐피타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티나가 방문자를 타박하듯 용건을 물었다.

“마법 때문에 샬리오니 공주님을 뵈러 왔습니다.”

“에이솔! 정말 기다리고 있었어요.”

내가 과한 반가움으로 그녀를 손짓하자, 티나가 금세 체념하는 얼굴로 반쯤 열려있던 방문을 활짝 열었다.

“안녕하세요. 샬리오니 공주님. 마법을 배우려고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에이솔이 싱글벙글 웃으며 내게 물었다.

“맞아요. 그전에 마법적인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들었는데 에이솔이 그걸 알아볼 수 있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마법사들이라면 다 가능하지요. 샬리오니 공주님이 마법을 배우시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마법사들은 대부분 자신의 마법적 연구나 개발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가르치는 건 귀찮아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에이솔은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마법을 배우려 하는 것에 굉장히 반가운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마법적인 재능이 없으면 배우고 싶어도 불가능하다면서요?”

“있으실 겁니다. 제가 어떻게든 찾아내겠습니다!”

침착하고 우아하던 여인은 어디 가고 눈에서 불을 내뿜을 기세였다.

“부디 마법을 배우셔서 마법사들의 고충을 폐하께 알려 주세요. 공주님!”

으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카샤가 마법사들을 괴롭히기라도 하나.

“보기와 다르게 연구 자금을 많이 안 주시나요?”

“…그것은 아닙니다. 많이 주십니다.”

그럼 뭐가 문제지, 아하! 시간 외 노동인가?

“그럼 준 것보다 많이 부려먹으시나요?”

“그게 아니라….”

에이솔이 내게 이러쿵저러쿵 얘기했지만 결국은 황제가 마법 부서에 칭찬이 박하고 자주 구박한다는 내용이었다. 같이 검을 쓰는 친위대는 잘 챙기는데 마법 부서는 그렇지 않아 소외감을 느낀단다. 상사한테 귀여움받고 싶은 부하직원들의 투정이었다.

“에이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런데 내가 재능이 있는지부터 알아야 하지 않아요?”

에이솔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장한 얼굴로 살며시 내 팔을 끌어당겨 잡았다. 손바닥을 맞대고 진중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그녀는 잠시간 가만히 살피는 듯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녀의 미간에 굴곡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 이게….”

그녀는 눈을 뜨고 나를 보더니 애매한 얼굴을 했다.

“무슨 일이에요? 재능이 없어도 괜찮아요. 실망하지 않으니까 있는 그대로 말해 주세요.”

“우선, 마법적인 재능은 없으세요. 다만…. 제가 좀 이상한 걸 발견했습니다.”

“이상한 거요?”

저렇게 말하니까 좀 긴장되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 몸 같잖아.

“제가 신관들을 그렇게 많이 봐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는 봐왔거든요.”

뜬금없이 신관 얘기가 왜 나오지.

“신관의 몸에는 신력이 넓고 고르게 퍼져 있어요. 그리고 농도는 옅은 편이지요.”

“네….”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런데 공주님의 몸에 아주 소량이지만 신력이 응축된 상태로 한곳에 몰려 있는 게 느껴져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에이솔.”

내 몸에 신력이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사실 신관들과 다른 형태로 느껴져서 저도 지금 의문이 들어요. 제가 보니를 봤을 때…. 성녀의 신력이 저렇게 응축된 걸 확인했는데….”

“그럴 리가 없어요. 저는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는데요.”

처음엔 얘가 나한테 장난치나 싶었지만, 에이솔은 매우 진지한 표정이었다.

“공주님이 성녀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성녀의 신력은 신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풍부하고 강하게 응축되어 있어요.”

물론 아니지. 내가 성녀라면 크리하엘이 나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하지 않았을까? 뭐, 신탁이 일 년에 몇 번 없다고 하니까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러면 에이솔이 잘못 본 것 아닐까요?”

다시 한번 내 손을 잡고 살펴보던 에이솔은 고개를 저었다.

“공주님의 신력은 응축되어 있긴 하지만 정말 소량이에요. 신관보다도 훨씬 못 미치는 양이지요. 그래서 공주님이 느끼지 못하셨을 수도 있어요.”

“에이솔, 아무리 소량이라도 신력이라는 것이 생기면 본인이 알 수 있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그래서 음, 실례인 말이지만 공주님의 몸 안이 이상하다고 한 거예요. 공주님 본인도 모르시고 신력은 비정상적인 상태로 있죠.”

뭐지? 크리하엘이 보니의 몸을 빌렸을 때 나에게 무언가를 한 건가. 하지만 말을 하는 것도 버거워 보였었다. 실제로 몇 마디하고 바로 올라가 버렸으니 말이다.

“저는 마법사긴 하지만 이런 특이한 경우에 관심이 많거든요. 그런데 이런 경우는 저도 처음 봤어요.”

그러니깐 나는 유례가 없는 이상한 인간이라는 건가. 불안한 마음이 여기저기서 삐죽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거 알려지면 어떻게 돼요?”

“알려지면…. 안될 것 같아요. 공주님. 신전에서 공주님을 반드시 데려가려고 할 거예요. 성녀도 아니고 희귀한 일이니까요.”

실험 쥐를 관찰하는 것처럼? 왜 나는 몸도 정상적이지 않은 거지.

“에이솔, 우리 둘만 알고 있어요. 알겠죠?”

“폐하께도 안 알리실 거예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요. 일단 지금은 우리 둘만 알고 있어요.”

나는 에이솔에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고서야 그녀를 보내 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복병이 터지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차라리 있으려면 많이 있든가. 아 그러면 신에게 잡아먹히겠지. 이거 알아본다고 신관에게 알리는 건 탈탈 털리는 거나 마찬가지고.

카샤에게 알리면 나를 어떻게 볼까. 그래도 돌연변이 보는 것처럼 하지는 않을 테지. 이번에는 제국 도서관을 털어야 하나. 하지만 마법사인 에이솔도 이런 일이 처음 있는 일이라 했으니 시간 낭비가 될 수도 있었다. 성녀도 아니고 신관보다 적은 양의 신력이 응축되어 있다니. 이런 것에 무지한 나는 알아보려고 해도 막막하기만 했다.

* * *

에이솔이 다녀간 후로는 카샤가 찾아왔다. 이번은 혼자 해결할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머리를 꽁꽁 싸매고 알아본다고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카샤, 내 몸에 이상한 게 들어있대요.”

그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마법이 가능한 몸인가?”

“아뇨, 마법적 재능은 없대요. 대신 몸 안에 다른 게 들어있어요.”

그의 표정이 설핏 경직되는 게 눈에 보였다. 예전 같으면 저 미세한 차이를 못 알아봤을 텐데. 마력이 아닌 다른 게 들어있다고 하니 카샤가 저렇게 반응할 만도 하다. 나도 그랬으니까.

“샬리, 무슨 말이지?”

“몸 안에 신력이 소량 응축되어 있다고….”

“에이솔을 불러와야겠군.”

“그녀가 말하길 내가 특이한 경우래요.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않기로 했어요.”

하지만 결국 에이솔은 카샤에게 불려와 다시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만 가 봐도 좋다.”

그가 고심하듯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많이 안 좋은 상황인가요. 저?”

“신성 제국에서 절대 알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건 확실하군.”

신전이 아니라 신성 제국 자체에서 관심을 가질 정도로 심각하다는 뜻인가. 실험용 쥐가 된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아무 걱정할 필요 없어. 누구든 절대로 내게서 그대를 떼어 놓을 수 없을 테니까.”

크리하엘과의 이야기를 해야 할까. 신력이라 했으니 신과 관련이 있는 건 확실한데. 다만, 얼마 전의 일은 이것과 크게 상관없어 보였다. 만약 신이 그때 내 몸에 손을 대었다면 조금이라도 뭔가 이상한 것을 감지했을 것이다. 나 혼자 단정 짓고 결론 내리자니 찝찝하고…. 그렇다고 그 얘기를 하자니 내 정체가 뭔지 드러내야 하는데 미친 사람 취급받기 딱 맞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