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32
손을 떼자 그가 내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곤 다정하게 웃으며 내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
“세상에 우리 둘만 있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아무런 걱정할 일도 없을 텐데.”
그가 가까이에서 속삭이며 내 뺨을 손등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눈을 휘며 나를 응시하는 모습은 한없이 다정해 보였다. 하지만 그 모습에서 언뜻 아슬아슬하고 위태한 무언가가 엿보였다.
내가 카샤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의 말투엔 질척한 구속감이 묻어났다. 마치 내가 봐왔던 것들이 그저 빙산의 일각이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이미, 발을 빼기엔 너무 늦어 버린 것이다. 얼굴에 몇 번의 키스 세례를 더 받고 난 후 안 되겠다 싶어 말을 꺼냈다.
“카샤…. 이제 내려가요.”
과도한 감정 소모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여기 계속 있고 싶지 않나.”
첨탑 난간에 계속 있자고…?
“조금만 더 있다간 기절할지도 모르겠어요.”
그가 무언가를 가늠하듯 내 얼굴을 빤히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이었다.
“이대로…. 아니, 알겠다.”
그가 잠시 망설이더니 나를 안은 채 천천히 일어났다. 난간 모퉁이를 가볍게 돌더니 미처 내가 눈 감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뛰어넘어 성벽에 착지했다. 아무리 티레 야경이 밝다 해도 밤이건만. 하하…. 이런 미친 짓. 또 하기만 해 봐라!
* * *
“잘 자요.”
문 앞에서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데 그가 한쪽 팔로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떨어지기 싫은데.”
방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티나와 다른 시녀들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더니 전부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민망하게!
“우리 내일 이른 시간부터 출발해야 하잖아요.”
나는 감은 팔을 밀어냈다.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드레스가 어딘가에 걸린 것처럼 몸이 덜컥했다. 돌아보자 카샤가 손끝으로 드레스를 집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안고….”
나는 그를 조심스레 관찰했다. 평소의 그였다. 첨탑에서 느꼈던 위태롭던 카샤를 더는 자극하지 않기 위해 나는 순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나를 곰 인형 안 듯 꼭 껴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깨가 간질간질했지만 나는 묵묵히 참고 미동 없는 곰 인형이 되어 주기로 했다. 하지만 곰 인형도 자야 할 시간이었다. 체감상 십 분 넘게 껴안고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이렇게 꼼짝도 안 하고 있으면 안 피곤해요?”
“…….”
잠시 멈칫거리더니 답이 없었다.
“잠 와요….”
“…….”
오히려 더 꽉 껴안았다.
“다리에 쥐 나는 거 같아요.”
그제야 그가 황급히 몸을 떼고 나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제 괜찮으니까 그만 들어가서 자요. 알았죠?”
나는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와 냉큼 문을 닫았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들어오자마자 시녀들이 빠르게 내 옷을 가운으로 갈아입히고 목욕시중을 준비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붉히고 눈을 내리깔고 있었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한 시녀가 내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각하께서 아가씨에게 정말 푹 빠지신 거 같아요.”
그 말에 티나가 미간을 모았다.
“지금부터 습관 들여야지. 제국에 가서도 그럴 거야?”
티나가 내게 말을 건넨 시녀를 보며 입단속을 하기 시작했다. 리노아와 달리 제국에서는 묻지 않는 이상, 시녀가 모시는 이의 사사로운 일에 대해 먼저 언급해서는 안 되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제국에 가면 다른 문화와 예법들에 대해 다시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리노아에서 급하게 떠났기 때문에 기본적인 것 외에는 제대로 배울 시간이 없었다. 어설프게 배울 바에야 차라리 제국에 가서 제대로 배우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내 몸은 어느새 목욕을 끝내고 침의 차림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아침 일찍 출발하니깐 우선 잠부터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누우려는데 티나가 말없이 내게 작은 얼음주머니를 건네었다.
“티나, 얼음주머니? 이걸 왜….”
얼떨결에 받아든 차가운 얼음주머니는 작아도 제 기능을 다 하고 있었다. 티나는 속상하다는 얼굴로 작게 말을 건넸다.
“부으셨어요.”
“응?”
갑자기 웬 얼음주머니를 주나 했던 티나는 그것을 잡고 있던 내 손을 위로 올리더니 입술 위에서 멈춰 세웠다.
“누르고 있으세요. 내일이면 아주 퉁퉁 붓겠어요.”
“어휴, 각하도 적당히 하시지….”
티나가 입을 삐죽이더니 중얼거리며 침실을 빠져나갔다.
어…. 으음, 뭐? 얼굴이 급속도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얼음주머니를 물끄러미 보다가 천천히 입술에 대었다. 그리고 침대 베개에 얼굴을 깊이 파묻었다.
나는 투명인간이다. 투명인간…. 아…. 그냥 사라지고 싶다.
* * *
제국의 황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제국의 3대 공작 가문 중 하나인 뷔스티에 공작령에서 머무르려는 참이다.
현재 군사령관의 직책을 맡은 블레인 뷔스티에. 본래 후작 가문이었던 뷔스티에는 황제가 즉위하며 귀족파를 숙청하고, 즉위를 도왔던 뷔스티에 후작을 비어 버린 공작 위에 승작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군단장을 맡은 헨리노프 시노어 공작. 그는 본래 황제파인 시노어 공작가의 차남이었다고 했다. 검술이 뛰어나 황제의 친위대에 기사로 들어갔었는데, 귀족파의 수장 사이드 공작에 의해 아버지와 형을 잃고서 그가 공작 가문을 잇게 된 것이다.
마지막 공작 가문은 제냐크 가인데 대대로 중립을 지키는 곳이라 했다. 이동 중에 매번 시시콜콜 얘기를 건네는 헨리 덕분에 나도 종종 궁금한 것들을 물으며 제국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아마 제국에 도착하면 전부 하나하나 다시 배우게 되겠지만, 사전에 정보를 알고 있다는 건 많은 도움이 되니 나에게는 고마운 일이었다.
사실 뷔스티에와 제냐크 가문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책에서 종종 등장했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제 더는 그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전부 다 새로 겪는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했다. 마차 밖으로 위용 넘치는 공작 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공작 성의 정문을 넘어 마차가 성의 입구에 멈춰 섰다. 카샤가 먼저 내린 후 내 손을 잡고 에스코트할 때였다.
쌔액-.
날카롭고 뾰족한 바늘 수천 개가 단번에 내게 쏟아지는 것처럼 전신에 오싹한 소름이 올올이 돋아났다. 머리는 빨간 경고 등이 쉴 새 없이 울리고 있었지만, 겁을 집어먹은 몸은 처음 겪어 보는 살기에 바짝 굳어 버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빠른 속도로 짓쳐들어온 날카로운 단도가 내 어깨 바로 앞에서 정지했다. 나를 에스코트하던 카샤가 어깨에 단도가 박히기 전에 잡은 것이다. 찰나였지만 순간 시간이 늘어진 것처럼, 나는 그 모습을 또렷이 보았다. 참고 있던 숨이 한 번에 터져 나왔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카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만 늦었으면….”
카샤의 얼굴이 창백했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단도를 헨리에게 넘겼다. 분명 바로 앞에서 멈추었는데도 불구하고 어깨에서 찌릿한 기운이 가시질 않았다. 그 느낌이 싫어 손으로 어깨 부위를 매만졌다. 그러면 없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주변이 분주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헨리가 턱을 쓸었다.
“흠, 정확히 샬리를 노렸는데요. 살기와 동시에 날아왔습니다. 실력자가 한 명인 걸 보니 개인 의뢰일 수도 있고….”
“루이한테 반드시 잡아 오라고 전해. 단정하지 말고 다시 살펴라. 한 명이 아닐 수도 있다.”
“살기가 일자마자 아레인과 같이 튀어 나갔습니다. 그 둘이니 아마 금방 잡아 오지 않겠습니까.”
벌렁대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카샤가 나를 말 없이 감싸 안았다. 맞닿은 가슴으로 그의 심장이 나처럼 세차게 뛰고 있는 것이 전해져왔다.
“정말 위험할 뻔했어.”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폐하, 일단 안으로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블레인이 카샤에게 안으로 들기를 권하고 집사를 불렀다. 갑자기 급습당한 공작 가는 조용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뷔스티에 공작가의 집사가 우리를 방으로 안내했다.
“샬리, 괜찮나…?”
그가 나를 조심스레 살피기 시작했다. 티나가 뒤에서 불안한 모습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폐하, 저도 배우고 싶어요.”
“뭘?”
“마법이나 검술이요.”
내 말에 카샤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러더니 곧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제국에서 배워야 할 것이 하나 더 늘었다. 마법이나 검술 그게 어떤 것이든. 호신술처럼 제 몸 하나 지킬 수 있을 만큼은 몸에 익혀야겠다.
정확히 나를 향했던 처음 느껴보는 살기에, 몸이 덫에 걸린 것처럼 피하기는커녕 옴짝달싹 못 하고 굳어 버렸었다. 지금처럼 넋 놓고 목숨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흡사 내 생명을 갈취당하는 기분이었다. 황제가 되기 전까지 카샤는 무수히 많은 위협을 겪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마법은 기본적인 재능이 뒷받침되어야 배울 수 있어.”
“네. 마법이든 검술이든, 뭐든 좋아요.”
“좋아, 내일 에이솔에게 말해 보도록 하지. 그런데 샬리, 처음에 암살자만 봐도 오래 떨었던 것 같은데….”
“제가…. 그러네요.”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그랬다. 처음 베고니아의 잔당들이 내가 아닌 카샤를 노렸을 때, 벤치 뒤에서 웅크리고 한참을 떨었었는데 말이다. 처음엔 소름 끼치도록 간담이 서늘했지만, 지금은 너무 화가 나고 분했다.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폐하, 아레인입니다.”
아레인…. 이동 중에 그와 종종 눈이 마주쳤었다. 알고 지내던 이에게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황제의 친위대였으니 아마 이후로도 자주 마주칠 테고 익숙해져야 했다.
“들어와.”
아레인 곁에는 루이도 같이 있었다. 그들의 얼굴이 썩 밝지 않았다.
“놓쳤나 보군.”
“자결했습니다. 루이와 포위하자마자 입 안의 독극물을 씹어 삼키더군요.”
“단서는?”
“블러디반 암살 길드의 상급 조직원으로 보입니다. 독극물부터 지니고 있던 암기류들까지 전부 구하기 힘든 고급품들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멍청하게 굴 놈들이 지금은 없을 텐데. 제국에 머저리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
나를 처리할 생각이었다면 왜 한 명만 보냈을까. 황제와 최정예들이 함께 있는 걸 알았을 텐데, 그 암살자는 죽으러 온 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없긴 왜 없습니까, 폐하께서 원한을 샀던 영애나 영식들이 한 둘입니까. 그 어린놈들이라면 밑져야 본전으로 한 번쯤은 저지르고도 남았을 텐데요.”
헨리가 문이 열린 방 안으로 들어오며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소리, 귀찮은 놈들을 떼어 낸 것뿐이다.”
“곱게 자란 그들을 매번 겁에 질리게 하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서 미인을 데려온다고 소문이 다 났으니 원한 품은 누군가가 심술이 났나 보죠. 꽤 의표를 찌르긴 했지만, 암살자가 한 명인 걸 보니 그런 놈들밖에 안 추려지는데요.”
대체 무슨 원한 살만한 일을 했기에 그러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