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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31화 (31/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31

“그냥, 불러보고 싶어서. 리리.”

그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리며 다정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몽실몽실한 무언가가 속을 간질이더니 우리 주변을 둥둥 떠다니며 퍼져나갔다.

똑똑-.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꿈속에서 빠져나온 듯 정신이 확 들었다.

“식사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각하.”

우리가 내려가자 다른 이들이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의 식기류들이 하나같이 고급스럽고 세련되었다.

특히나 커틀러리들은 전부 손잡이 부분에 보석들이 박혀 있고 그 주위가 아름다운 문양으로 음각되어 있어 사치의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역시 유행의 최첨단을 달리는 티레다웠다. 내가 말없이 그것들을 관찰하고 있자 옆에 있던 카샤가 내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았다.

“이게 갖고 싶은가.”

“그냥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커틀러리의 아름다움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있어서 기쁘군요.”

헨리가 내 말에 맞장구를 치자 그 주변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귀빈께서 좋아해 주시니 저도 기쁩니다. 이것들은 전부 체사 장인이 만든 것이지요.”

식사 중간중간 헨리와 티레 시장이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참 보기 좋았다. 티레로 이동하는 동안 그를 말 상대해 줄 사람이 주변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카샤와 블레인, 그리고 아레인은 중요한 일이 아니면 안타깝게도 헨리의 말에 딱히 대꾸해 주는 법이 없었다. 내가 종종 상대해 주다 보면 어느새 카샤가 마차 창문을 닫거나 그 앞을 차단하는 식이었다.

“야경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이 가는군요.”

티레 시장은 전에도 자랑했었던, 성벽에서 보는 야경이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운지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고 있었다.

“이따 야경 보러 가시면 되겠습니다.”

헨리가 씩 웃으며 카샤에게 말을 건네자 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앉은자리에서 창밖을 확인하니 이미 날이 어두워진 바깥은 찬란한 티레의 야경을 밝히고 있었다.

티레의 야경이 예쁘긴 하지. 나도 처음 봤을 때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성벽에서 아레인이 티레에 대한 이러저러한 모습을 설명해 줬었는데….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카샤가 시녀들을 물리고 나를 불러세웠다.

“야경, 본적 없으면 같이 보지.”

말을 하는 그의 시선이 묘하게 나를 빗겨나 있었다. 내가 그에 맞추어 시선을 마주하자 오히려 반대로 돌려버렸다. 나는 다시 따라붙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이거 어째 묘하게 기시감이 드는데?

“야경은….”

이미 보았다고 말하려는데 그가 눈을 내리깔고 내 손끝을 잡더니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꼈다. 음, 왠지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보러 가요, 같이.”

* * *

성벽에 바짝 붙어서 티레의 아름다운 밤의 거리를 눈으로 훑었다. 다시 보아도 화려하고 멋진 모습에 잠시 넋이 나갔다.

“티레 야경이 그대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네, 보고 있으니 걱정거리나 고민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아요.”

그가 뒤에서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제국으로 가는 것 때문인가, 아니면….”

그가 뒷말을 삼키며 침묵했다. 내 뒤에 있어 그의 표정이 어떤지 보이질 않았다.

“제국으로 가면서 아무 걱정도 없을 순 없어요. 저는 모르는 곳이잖아요. 그래도 괜찮아요. 그냥 새로운 환경에 대한 설렘이나 두려움 같은 거예요.”

“내가 옆에 있어도 그것들을 없애 줄 수는 없는 모양이군.”

마치 날 믿지 못하는 모양이라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나 스스로가 지레 찔려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고…. 내가 답이 없자 그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혹시 나와 혼약한 것을 후회하나.”

이번에는 머뭇거림 없이 바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왜 그런 말을 하세요.”

그가 한숨을 내쉬자 목덜미에 그가 뱉어 낸 숨이 흩어졌다.

“그대를 대할 때면 뭔가 가로막혀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보이지 않는 벽 같은 것이 말이야, 나는 그걸 넘어서지 못하고 있고.”

이곳에서 여러 가지 일이 있었고, 뜻하지 않은 일에 많이 힘들었다. 그게 힘겨워서 황제든 아레인이든 못 믿을 사람이라고 못을 박았다. 그동안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힘들다고 황제나 아레인에게 책임을 지우듯 탓하며 상처를 주지 말자고. 시간은 걸리겠지만 온전히 내가 해결하고 이겨내야 하는 일이라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그리했다 해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끔, 혹은 지금도 다른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은 생각이 불쑥 솟아오를 때가 있었다. 그건 몸의 주인인 샬리오니가 될 때도 있었고 황제, 혹은 아레인일 때도 있었다. 신 크리하엘도 속으로 맹비난을, 사실은 욕도 엄청나게 했다…. 그래서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금만 거리를 두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미 나를 그렇게 느끼고 있을 줄이야.

할 말을 고르고 있는데 그가 돌연 몸을 떼고 나를 돌려세웠다. 그의 남청색 눈동자가 티레의 빛을 받아 새파랗게 이지러지며 살라 먹을 듯이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대를 존중한다 했지만 사실 그건 내 진심이 아니다. 난 그대의 전부를,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다 가지고 싶거든.”

그가 내 한쪽 볼을 감싸며 엄지로 느릿하게 훑어 내리더니 턱을 올리며 시선을 맞추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고백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나를 안아 올리더니 성벽 끝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그 위로 성큼 올라섰다. 나는 너무 놀라 숨을 크게 들이켰다. 카샤가 돌아 버린 것이 분명했다. 아니,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한 발만 앞으로 뻗어도 성벽 낭떠러지였다.

“카샤…. 뭐 하는 거예요?”

절로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대와 오로지 단둘이 있고 싶어서.”

지금도 단둘이 있는데 그게 지금 성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것과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순간 크게 휘청거리더니 몸이 떠올랐다.

흔들리는 순간 눈을 감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그가 어딘가로 착지하는 것이 느껴졌다. 겨우 눈을 뜨자 더 기가 막히는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는 성벽 옆의 첨탑 난간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를 안고 여기를 뛰었어? 뒤늦게 심장이 세차게 뜀박질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떨어지면 즉사다. 대체 이게 무슨 미친 짓인 거지.

“카샤, 무서워요. 다시 돌아가요.”

그가 나를 안은 채로 난간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이제 괜찮지 않나.”

장소가 그대로인데 대체 어디가.

“여기엔 왜 온 거예요. 돌아가요, 네?”

무서운데 기댈 곳이 그밖에 없었다. 그의 재킷을 꽉 붙들어 매자 그가 내 상체를 감싸듯이 단단히 끌어안았다.

“우리만 여기에 유리된 거 같지 않나. 오직 둘뿐이지.”

“그냥 돌아가면 안 돼요? 카샤….”

내 눈에 들어오는 건 그의 상체뿐이었다. 일부러 바깥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샬리, 봐. 여기에 우리밖에 없어.”

그가 내 등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살며시 눈을 바깥으로 돌리자 광활한 전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성벽에서 바라볼 때와는 전혀 달랐다. 사방이 뚫려 있어 시야에 가리는 것 없이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정말 그의 말대로 세상과 유리된 듯 우리 둘만 있는 것 같았다. 첨탑에 앉아 외따로 떨어진 세상을 관찰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어떤 미친 생각을 하는지 그대는 모르겠지. 곁에만 있어 준다면 날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대가 날 싫어하지만 않으면 되니까.”

왜 그런 말을…. 싫어하는 사람과 결혼 할 리가 없지 않나. 내가 좋아하는 마음도 없이 결혼을 승낙했을까 봐. 그와의 혼약을 정략결혼처럼 여기고 수락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싫어하지만 않으면 됐다니. 저렇게 오해하고 있을 줄이야.

그렇다고 그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여전히 그를 믿지 못한다. 아레인을 첩자로 보낸 그를 이따금 원망도 한다. 시일이 오래 지난 것도 아니었다. 이런 불완전한 마음으로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건 상대를 기만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여겼으니까.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사람이 실은 그를 믿지 못하고 원망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배신감을 느낄 테니까. 차라리 내가 그와의 혼약을 정략결혼처럼 여긴다 생각하는 편이 그에게는 더 나을 수도 있었다.

기대하는 바가 없으면 실망하는 법도 없다. 아무래도 이것은 우리 둘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인 것 같다. 그에게 내 삐뚤어진 마음을 좋아한다는 말로 포장하며 기대감을 심어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이제 그늘진 밤을 먹은 듯 새까매진 정염이 짙게 일렁이고 있었다.

가까이 있던 그의 얼굴이 한순간 다가와 서로의 코끝이 가볍게 부딪혔다. 그가 내 이마, 눈, 그리고 뺨에 차례차례 키스를 남기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턱 끝에 입을 맞춘 그의 입술이 느릿하게 타고 올라와 내 입술 바로 위에 스치다시피 한 상태로 멈추었다.

“샬리….”

그의 들끓는 듯한 나지막한 음성이 내 입술 위로 흩어지며 보드랍게 뭉개졌다. 절절한 눈동자가 그 이상을 원하는 것처럼 내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내 전부를 가지고 싶다고 하는 그가 버거웠다. 하지만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할까. 그와 결혼하기로 한 시점에서 이미 늦어 버리지 않았나.

내가 눈을 감아 버리자 그는 그대로 입술을 꾹 눌러왔다. 입술을 빨아 당기며 가볍게 물던 그가 혀로 치열을 훑자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그의 혀가 거칠게 내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마치 입 안을 삼켜버릴 듯이, 밀고 들어오기에만 급급했다. 끊임없이 몰아치며 내게 쏟아지는 그의 감정을 받아 내기가 버거웠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험하고 거친 키스였다.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치려 했지만, 상체가 꽉 밀착되어 여의치가 않았다. 내가 바르작거리자 그제야 그가 내 입술에서 떨어져 나갔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할딱였다.

“하아…. 미안하다. 참을 수가 없어서….”

그가 천천히 내 등을 쓸어내렸다. 한동안 그렇게 숨만 고르고 있었다. 그가 내 뺨을 어루만지자 다시 시선이 마주쳤다. 짙어진 눈동자가 다시 가까워지고 있었다.

“카샤, 그만….”

“이번엔 제대로 할 테니….”

내가 거절하기 위해 입을 열자 그가 다시 입술을 부딪쳤다. 처음과 달리 부드러운 키스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갈수록 격정적으로 몰아붙이는 탓에 호흡 곤란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그렇게 몇 번이나 내달리듯 격하게 입을 맞추고 난 후에야 달콤하고 녹을 듯한 키스를 선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혀가 내 입안을 부드럽게 유영할 때마다 심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몽롱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카샤, 그만해요. 이제 진짜로 더는….”

나는 그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그의 눈이 호선을 그리더니 내 말에 응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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