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30
“감당하실 일 없도록 할게요. 오라버니.”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음 지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으려나.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가 놓았다. 그게 작별 인사의 전부였다. 나흘은 가족들과 이별을 준비하기에 너무도 갑작스럽고 짧았다. 떠나는 마차 안에서 잠시 숨을 골랐지만, 눈시울에 눈물이 어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대를 웃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카시카프가 내 손을 꼭 쥐었다. 그의 손이 커서 한 손에 다 둘러싸였다.
“폐하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건 너무 당연한 것 같은데.”
“사람은 변덕의 동물이니까요.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어요.”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흘러나왔다. 카시카프가 내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하게 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나는 안 변해. 절대로.”
그의 눈동자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불안해서 그랬나 봐요. 제국에는 제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내가 있는데, 왜 아무도 없다고 하는 거지. 다른 이는 알 필요 없다.”
내가 홀로 서고 싶은데 아직 단단하지 못하니까. 잘 해낼 수 있을지 불안해서 그래요. 내가 강해져야, 그래야 당신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비틀린 마음 말고, 같은 마음을 나누고 싶거든요. 속에 있는 말을 풀지 못하고 그냥 웃었다.
* * *
티레는 자유 도시였다. 리노아, 포르토, 투알린, 프레타스 제국까지 네 곳의 경계가 만나는 꼭짓점인 것이다. 초반에 상인들이 모여드는 교역장으로 시작하였고 그 후로 상업이 크게 발달해서 거대한 상업 관광 도시가 되었다.
제국을 포함한 네 개 국가가 만나는 곳이라 각종 문화가 어우러지며 다채롭게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도시라고 만만히 볼 수 없는 것이 이곳에서 쏟아지는 교역 물량과 거래량, 관광 수입만 보아도 한 왕국 이상으로 벌어들인다고 했다.
그들은 시 의회가 따로 있었고 그중에서 시장을 뽑는 이곳 기준에서 따지자면 특이한 구조였다. 시장은 대부분이 은퇴한 거상이거나 상업과 관련된 곳에서 대성한 인물들이었다.
티레 자유 도시는 두 번째 방문이었다. 투알린으로 갈 때 이곳을 거쳐 갔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밤에 왔었고 정신없어서 티레 성에서 잠만 청하고 스쳐 지났기에 방문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티레 성벽에서 본 야경이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전쟁으로 인한 걱정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서 잠이 오질 않아 아레인과 성벽에 올랐었다. 시장이 꼭 보고 가라고 권유했던 말을 흘려들었으면 후회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전경이었다. 티레에 관해 얻은 정보는 아레인이 불야성을 이루는 도시를 내려다보며 내게 알려 준 것들이었다.
티레에 도착하기 전 우리는 얼굴에 환영 마법을 씌우기로 했다.
“잠시만 기다려.”
카시카프가 기사들 사이로 사라지더니 한 여성을 데리고 왔다. 고급스러운 자수가 놓인 로브를 걸친 것을 보니 마법사였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이 어여쁜 사람이었다.
“샬리오니 공주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제국의 마법사 에이솔 캐피타 입니다.”
이 사람이 보니를 돌봐주었던 마법사였구나.
“만나서 반가워요. 캐피타 님.”
마법사와 인사를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그들은 희귀하고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행동반경이 다르니 리노아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에이솔이 우리에게 환영 마법을 씌울 거니까 마법을 써도 놀라지 마.”
마법을 직접 몸에 받는 건 처음이라서 신기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에이솔이 화려한 무늬가 양각된 완드를 소매에서 꺼내 우리에게 휘둘렀다. 그러자 무언가 이질적인 기운이 내 얼굴을 감싸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벌써 끝난 건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카시카프를 보는데 헉 소리가 나왔다. 카시카프의 얼굴은 맞는데 인상이 굉장히 흐릿한 느낌이었다. 한 번 보고 나면 금세 잊을 만큼 흐릿했다. 그냥 얼굴에서 눈을 떼는 순간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 같았다.
“카시카프, 제 얼굴도 흐릿해요?”
“그렇군, 이거 좀 마음에 안 드는데? 에이솔, 다른 마법은 없나?”
“외형이 안 변했으면 한다고 하셔서…. 다른 방법은 외형을 고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카시카프가 에이솔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연구비를 그렇게 받아가서 대체 어디에 쓰나. 됐어. 청결 마법이나 걸고 가지.”
에이솔이 급격히 시무룩해지더니 다시 우리에게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청량한 기운이 몸을 훑고 지나가자 금방 목욕을 마친 것처럼 전신이 보송보송해졌다.
와, 이거 진짜 좋구나. 안 그래도 티레 성에 가면 바로 씻어야지 했던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나도 배울 수만 있다면 마법을 전수해 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마법이란 건 정말 좋군요. 고마워요. 캐피타 님.”
내가 에이솔의 손을 덥석 잡고 경의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샬리오니 공주님. 에이솔이라고 불러 주세요.”
에이솔이 쑥스러워하며 내 손을 맞잡았다.
“에이솔, 가라.”
“예. 폐하….”
에이솔이 사라지고 기사들이 티레 성 쪽으로 길을 잡기 시작했다. 티레 성에 도착하자 이미 한번 보았던 티레 시장이 우리를 맞이했다.
“드시지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장은 우리가 누군지 모른다. 그저 제국의 고위 귀족이라고 알고 있었다. 티레 시장이 알고 있는 건 ‘블레인 뷔스티에’ 제국의 공작 하나뿐이다. 하지만 동행하는 이들이 누군지는 상인들의 발 빠른 네트워크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블레인이 시장에게 다가가 검집에 박힌 제국의 증표를 내보였다.
“호오, 이것은 마레 대장장이의 솜씨가 아닙니까.”
그냥 검집만 보고도 누가 만들었는지 아는 건가? 마레라는 대장장이가 유명한 것인지 아니면 그걸 알아보는 시장이 대단한 것인지. 그래서 최대 규모의 상인 도시 티레의 시장을 하나 보다.
“편하게 쉴 수 있는 방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식사는 하셨는지요. 언제든 드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 요리장이 공을 들여 준비하고 있지요.”
“신경 써 줘서 고맙군요. 식사는 곧바로 하도록 하죠.”
블레인이 시장의 말을 받으며 응대했다.
“별말씀을요, 귀빈을 맞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티레 시장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가 눈동자를 굴리며 나를 스쳐 가듯 보았지만, 마법 때문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알아보아도 눈치로 모른 척을 하든지.
“방을 안내할 사람을 붙이겠습니다.”
시장의 뒤에 서 있던 하인들이 우리에게 방을 안내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티나가 내게 단장하기를 재촉했다.
“아가씨, 바로 식사하셔야 해서 시간이 없네요. 일단 먼저 씻는 것부터 준비할게요.”
티레 성에서는 나를 아가씨라고 부르기로 말이 되어있었다.
“티나, 안 씻어도 돼. 에이솔이라는 마법사가 내게 청결 마법을 걸어줬어.”
나는 웃으며 다른 시녀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티나를 만류했다.
“어머, 정말 잘 되었어요. 그럼 공주님을 더 공들여서 치장할 수 있으니까요!”
난 그저 천천히, 쉬엄쉬엄 준비하자고 한 말이었는데…. 역시나 내 예상대로 나를 이리저리 재대로 굴리며 탈바꿈시킨 티나가 나를 뿌듯하게 쳐다보았다. 같은 방에 있던 보니가 나를 보며 입을 헤벌리고 있었다.
여행으로 지친 내 푸석한 피부와 머릿결은 그녀의 손에서 매끄럽고 윤이 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탈복이 쉬운 여행용 드레스도, 아름답고 풍성한 주름이 가득 잡힌 우아한 드레스로 그녀의 손에서 마법같이 바뀌었다.
“샬리 언니, 너무 예뻐요.”
의자에 앉아 있던 보니가 쪼르르 내려와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손뼉을 쳤다. 매번 눈치만 보더니 지금은 영락없는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빙빙 도는 모습에 정신없어진 내가 보니를 멈춰 세우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티나가 나를 꾸미려는 이유를 알 것 같네. 이 반들반들한 까만 머리칼을 요리조리 예쁘게 땋고 싶다.
“티나, 나 연회 가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힘을 줄 필요가 있을까?”
“이제 가시는 모든 곳이 연회예요. 아셨죠?”
아직 제국에 도착하기도 전이었지만, 티나의 얼굴을 보고 바로 포기했다. 그냥 미리 적응하는 셈 쳐야겠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티나가 의아해했다.
“벌써 식사시간인가요? 아직 시간 있는 줄 알았는데….”
“오셨어요, 각하께서요.”
다른 시녀가 문을 열어 확인하고는 얼굴이 발개져서 황제가 왔음을 알렸다. 폐하라 부를 수 없으니 그는 티레 성에서 각하라 불렸다. 티나가 시녀들과 보니를 챙겨 우르르 방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아이가 나를 아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들이 문을 닫기 전 나는 티나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보니 땋은 머리로 해 줘, 티나!”
방 안으로 들어온 카시카프가 잠시 멈춰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빠르게 곁으로 다가왔다. 내 손등에 가볍게 키스한 그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정말….”
그가 말을 잠시 멈추고 다시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귀엣말을 하기 위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키 차이가 너무 나서 손이 닿지 않자 그가 허리를 숙였다.
“카시카프라고 부르면 안 될 것 같아요. 뭐라고 부르죠? 저는 리오니라고 불러 주세요.”
내가 속닥이자 그도 고심하는 얼굴이었다. 얼마나 고심하는지 순간 석상이 되어 버린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티레에서 황제의 이름을 부를 수도 없고 뭐라고 부르는 게 좋을까.
“애칭 있으시면 알려 주세요.”
그가 대답이 없어 다시 귓속말했다. 한참을 굳어있던 그가 내가 했던 것처럼, 나를 따라 손을 모아 내 귀에 갖다 대며 속삭이기 시작했다.
“카샤. 그런데 우리 둘 다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입술이 내 귓가에서 움직일 때마다 귓불에 닿을 듯 말 듯 스쳐 지나갔다. 그의 입술과 내뱉는 숨결이 귀에 닿자 전신에 소름이 바르르 올라왔다.
“…그렇죠.”
얼굴에 열이 올라 손부채질을 했다가, 팔에 돋은 소름을 쓸어내렸다가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바라보자 그의 얼굴이 완전히 풀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애칭이 카샤구나…. 카시카프는 부를 때마다 이름이 너무 길긴 했어. 이름 안에 애칭이 있으니깐 역시 눈치를 챌 수 없는 다른 걸 불러야 하는데. 뭐라고 부르지.
“아, 애칭 끝자리를 두 번 부를까요? 샤샤는 어때요?”
내가 생각해도 참 좋은 방법이다 싶어 쳐다보았는데 그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나?
“뭐라고 불렀으면 좋겠어요?”
“좋은데…. 나는 리리라고 부르면 되겠군.”
“알겠어요.”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리.”
“네.”
“리리.”
“네….”
“리리….”
“샤샤, 왜요?”
무슨 용건이기에 세 번이나 부르나 했는데, 그는 한껏 휘어진 눈웃음을 뿌리고는 말이 없었다.
“용건 있어서 부른 거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