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29화 (29/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29

나는 이번 일로 시간이 나자마자, 왕궁 도서관에서 크리하엘에 대한 정보를 열심히 찾아 뒤적였다. 신관에게 묻는 것이 더 빠르고 정확한 일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꺼려졌기 때문이다.

이건 내 생각일 뿐이지만 보니가 차고 있는 구속구 때문에 신이 쉽게 나타날 수 없을 거라고 본다. 왕궁 도서관의 서기에게 들은 바로는 구속구를 착용하고 있을 때 신탁을 받은 기록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했다. 물론 구속구를 찬 상태란 이미 마녀로 판정을 받은 거니 신탁받을 일이 있을까 싶긴 하다.

분명 크리하엘이 구속구를 지독하다 하였으니 쉬운 일이 아닌 건 확실했다. 할 수 없네. 옆에서 보니는 챙기고, 적은 가까이 두는 게 좋다고 하니까, 그렇게 하지 뭐.

“티나, 신 크리하엘 말고 다른 신도 있어?”

이미 왕궁 도서관 사서에게 확인했지만, 혹시 내가 모르는 민간 신화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르니 물어보았다.

“네에? 신 크리하엘 말고 다른 신이요?”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야,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야.”

아예 다른 신 자체가 있다는 사실을 못 받아들이는구나. 확실히 신은 크리하엘 하나뿐인가 본데. 정말로 파괴의 신 같은 게 아닌데 나한테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그리고 그가 했던 말의 주체가 황제 카시카프이고. 크리하엘은 그를 장기 말처럼 쓰려고 하는 거였다.

신 본인의 만족을 위해.

“그나저나 황제 폐하를 실제로 보니까 정말 멋있던데요. 공주님이랑 천생연분인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니?”

“그럼요~공주님이 제국으로 시집가신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요.”

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아레인이 다른 제국인들과 함께 만월의 밤이 끝난 다음 날에 도착했다. 그는 리노아에 투알린을 인수인계를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일정은 하루가 연기되었다. 참 아이러니했다. 첩자였던 그가 투알린을 수습해 우리에게 절차를 넘겨준다는 것이. 그를 생각하자 속이 시큰거렸다. 그건 다른 왕족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황제에게서 어떤 피해 보상이든 받기로 했지만, 마음의 상처는 그것으로 메워지는 게 아니었다. 나는 오랜만에 공주궁 뒤편의 정원으로 발걸음을 했다.

그리 오래전도 아니었는데 시간이 참 빠르게 흐른 것 같았다. 처음에는 이전 생이 그리워서, 여기 와서 많이 울었다.

큰 아름드리나무 앞에서 서럽게 운 걸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 당시엔 처음 들었던 환청이라든지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의심하고 있을 때였는데.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예전 생각이 잘 안 나네.”

요즘은 전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면 답답하게 무언가가 막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전 생이 기억나려고 하다가도 희미해지곤 하는 것이다. 내가 다시 전의 기억을 떠올리려 할 때였다. 잔디를 밟는 발걸음 소리에 화들짝 놀라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가 여긴 왜…?

정원의 갈래에서 마주친 이는 아레인이었다. 눈길이 닿자 묻어놓았던 속이 따끔하며 쓰라리기 시작했다. 우리 둘 다 굳은 탓에 분위기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서성이다 입을 열었다.

“공주궁 정원에는 무슨 일이에요.”

그가 잠시 멈칫하더니 얼굴을 쓸어내렸다.

“예전에…. 공주님과 자주 왔습니다.”

내가 샬리오니의 몸에 들어가기 전? 기억 상실이라고 거짓말하는 건가. 그게 맞다 해도 여기를 찾아오는 그가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용서를 빌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는 우울한 낯빛으로 대답했다. 그의 눈은 깊이 침잠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저는 아레인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경청하겠습니다.”

“아레인, 당신은 제국의 첩자였잖아요. 그런데 나를 만났던 이유가 뭔가요? 기억을 잃기 전에 우리는 연인이었다고 그랬잖아요.”

“…….”

어떤 변명이라도 해 줘, 제발. 내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을지 모르지만 속은 절실했다. 그가 무슨 말이든 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분명 감정의 오류에 갇혀 있었다. 그가 리노아에서 기사단장이 된 시기는 황제의 정복 전쟁 계획과는 시기가 다르니까 아예 논외로 두었다.

우리에게 항상 믿음직했던 기사단장이 첩자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공주와 연인이었던 사람이니 첩자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 자체를, 그가 첩자일 거라는 것 자체를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기억이 나지 않으니 이 부분은, 답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좋아요. 아레인에게 내가 먼저 연인을 청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전부 제 잘못입니다. 샬리….”

“그런 말이 아니에요…. 나한테 왜 그렇게 잘해 줬나요. 나는 국왕도 아니고 왕세자도 아닌데. 나한테 잘 보일 필요 없잖아요. 기억을 잃었으면 그 뒤로는 나를 내버려 두지. 왜 다시 내 앞에 나타나서 나를….”

내가 여기서 믿는 사람이 대체 몇 명이나 있을 것 같아서. 심지어 나는 황제도 믿지 않고 있는데. 좋아하는 사람도 거리를 두려고 하는데.

“샬리, 당신에게 용서받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의 눈빛은 절절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정말로 내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고 그것은 진심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모습이 너무 아프게 박혀 들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에도 그렇게 느꼈다. 그때도 저렇게 진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던 거다.

“내가 궁금한 건. 아레인. 당신이 언젠가 우리를 버릴 사람들이라 생각해서 동정한 건가요? 나는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그게 아니라면, 그러면 너무 비참하잖아요.”

내 말에 몇 번 입을 달싹이던 아레인은 결국 입을 열지 않았다. 내가 했던 질문들에, 그는 단 하나도 제대로 된 답을 내어놓지 못했다. 나는 그를 뒤로 한 채 정원을 벗어났다.

* * *

나흘의 시간 대부분은 가족들과 보냈다.

“황제가 너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건 알겠더구나.”

오라버니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일전에 황제와 포옹한 것을 보고 그러는 것 같았다.

“보신 거 하나도 빠짐없이 어마마마께 잘 전달해 주세요. 제가 사랑받지 못할까 봐 걱정하시니까요.”

한껏 놀릴 태세였던 오라버니가 김빠진 얼굴을 했다.

“가면 이제 더는 네 어리광을 받아줄 사람이 없다는 건 알고 있지?”

“내 편이 아무도 없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특히나 제국 귀족들은 왕국들을 얕보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그에 대한 것은 나도 걱정되던 참이었다. 제국의 공작들은 일국의 왕보다 자긍심이 높다고 들었다. 타국의 공주인 나는, 제국의 공작 영애보다 처지가 좋지 못하다.

“참, 오라버니. 투알린에 성녀가 감옥에 갇혀 있었어요.”

“성녀가 감옥에? 그럼 마녀였겠구나. 그런데 마녀가 투알린에 있다고?”

그는 꽤 놀란 얼굴이었다.

“아직 어린아이였는데, 저도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지만 딱해 보였어요. 제국 기사의 말을 들으니 보통 신전에서 해결한다고 들었는데요.”

“그래, 성녀는 전부 신전에서 다루지. 처벌도 마찬가지고. 이상하긴 하구나.”

“투알린에서 뭣 때문에 성녀를 잡아두고 있었을까요?”

“애초에 성녀는 신전이 아닌 곳에서 관여할 권리가 없어. 아마 투알린도 신전에 넘기기 전에 잠시 가두어 놓은 거겠지.”

“그렇군요. 저…. 오라버니.”

국왕과 왕세자인 그들은 아레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처럼 속이 뭉그러졌을 텐데….

“아레인은, 어떻게….”

아레인 얘기를 꺼내자 오라버니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떻게 하고 말고가 뭐 있을까, 그는 제국으로 돌아가지 않느냐. 진작 알아채지도 못했으니 답답하기도 하고 그렇구나. 우리가 나약한 게 분하기도 하고.”

“아레인은…. 아마 다른 사람이라도 쉽게 눈치를 채지 못했을 거예요.”

“그들이 첩자 노릇을 하고 돌아다녀도 제국에 한마디도 이의제기할 수 없다는 게 지금 리노아의 현실 같아서 그게 더 속상하단다.”

“아레인을 용서하실 건가요?”

“용서라니…. 순진한 생각이구나. 샬리. 용서는 그가 우리 사람일 때나 고려하는 거지. 그는 그저 제국의 첩자일 뿐이다. 용서하고 말고의 대상이 아니야.”

“그래도 그를 믿었잖아요. 믿었던 우리를 배신했잖아요.”

“그래, 믿었지만 그는 우리를 배신한 게 아니야. 그저 첩자로서 활동한 거지. 우리는 그에 대해 제국에 불만을 제기하고 싶어도 못 하는 처지고. 미리 알아차렸다면 목을 벨 수는 있었겠지만 말이다. 이게 다란다. 샬리, 더는 아레인에게 마음 쓰지 마라.”

알아차렸다면 목을 베었을 거라는 그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 오라버니와 나는 아레인을 다르게 보고 있었다. 우리는 똑같이 아레인을 믿었지만, 오라버니는 아레인에게 전혀 의지하지 않은 것이다. 그에게 아레인은 친구도 동료도 무엇도 아닌, 그저 믿고 있던 기사단장일 뿐이었다. 그래서 분한 생각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언제부터 아레인에게 의지하고 있었을까. 힘들다는 핑계로, 나도 모르게 친근하게 느꼈나. 그가 내게 친절할수록 잘해 줄수록, 함께 할 동료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배신감을 강하게 느꼈나 보다. 지금도 나는 가족들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았기에. 이제 정말 제국에 가면 나 혼자다. 나 홀로 완전하게 설 수 있을까.

“아레인이 투알린에서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정말 정권이 이양된 국서를 받았다. 왕족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골머리를 앓고 있단다. 국서를 받았으니 비난받지 않으려면 살려는 두어야 하는데….”

오라버니도 왕족들을 처리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시는구나. 살려두면 훗날 복수든 무엇이든 해가 되어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것이 당연시되는 군주제인 곳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아니, 이제 내심 동조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전쟁도 싫고 사람이 죽는 것도 전부 다 싫다고만 생각했었다. 무섭고 두려웠으니까 그런 일이 내 눈앞에서 벌어진다는 게 끔찍했다.

그런데 이제는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하는 내가 있다. 나는 현대인인데 그들에게 점점이 조금씩 물들며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시대에 맞게 내 생각도 변하고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판단능력을 상실한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타고 있던 배의 방향을 바꾸다가 키를 고장 낸 기분이었다.

이제 선회도 할 수 없고 멈출 수도 없었다. 무엇이 되든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 * *

다음 날 우리는 제국으로 출발하는 마차에 올랐다. 어마마마가 눈물을 흘리며 나를 꼭 끌어안았다.

“정말 너무 갑작스럽구나.”

딸이 갑작스레 나흘 만에 시집간다고 하니, 나 같아도 느닷없다 여길 것 같았다.

“가서도 자주 연락할게요. 어마마마, 걱정하지 마세요.”

아바마마는 내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너를 제국에 보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저도 아직 믿기질 않아요.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사실상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어리광을 부렸다.

“어딜 가서도 잘 살 수 있을 게다. 내 딸을 싫어하는 인간은 내가 본 적이 없거든.”

그가 껄껄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에요. 아바마마…. 나를 물끄러미 보던 오라버니가 귀엣말을 했다.

“나 황제 감당 못 한다고 한 거 기억하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