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28
“샬리, 정말 다행이구나.”
어마마마가 나를 꼭 끌어안았다.
“몸은 좀 어떠세요? 쓰러지셔서 너무 놀랐어요. 지금은 괜찮으신 거예요?”
“다시는 그러지 말려무나. 누굴 닮아서 이렇게 간덩이만 큰 거니.”
가족들과 상봉의 기쁨을 나눈 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샬리, 황제를 설득하였느냐. 이렇게 빨리 돌아온 거라면 그 일 말고는 없겠구나.”
오라버니가 내게 물었고 가족들이 모두 궁금해한 사항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소상히 말해 주었다. 그들은 투알린이 고대 병기로 리노아에 시험하려 했다는 사실에 분노했고, 나를 인질로 잡으려고 했다는 말에는 기함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레인이…. 제국의 첩자였다고?!”
“대체 몇 년 동안 우리를 속였단 말이지. 그럼 황제가 다음으로 노리는 것은 리노아란 말인가…. 정말 하나같이 제국의 손바닥 안이나 다름이 없구나.”
“아레인이 첩자인 것이 세간에 알려진다면 리노아에 명예가 땅에 떨어지고 수치가 될 텐데 큰일입니다.”
다들 그에 대해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나 또한 그랬으니 말이다. 나는 어마마마가 또 쓰러질까 싶어 걱정되었다.
“황제가 리노아를 공격하지 않기로 약속했어요.”
나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카시카프가 리노아에 온 목적이 바로 이것이니 말이다.
“황제가 네게 청혼을 하였단 말이냐…?”
아바마마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연속으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어 그런 것 같았다.
“샬리, 황제가 너를 마음에 두고 정식으로 결혼을 청했다면 황비로 들어가겠구나.”
“저를 황후로 맞이한다고 하셨다는데….”
아바마마는 내 말에 회의적이었다.
“우리는 소국에다 타국이지 않으냐. 아마 바로 황후로 들어갈 수는 없을 게다. 황비로 들어가 황후로 승격이 될 수는 있겠지. 다만 그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란다.”
확실히 내 신분은 힘없는 왕국의 공주님이라 제국의 공작가보다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내게는 여전히 아이인데, 네가 제국의 황비가 된다니 이 어미는 걱정이 앞서는구나. 이게 좋은 일이어야 할 텐데….”
“어마마마, 좋은 일이에요. 프레타스 제국과 리노아의 국교가 좋아지는 일이잖아요.”
“너는 어떠니? 너도 황제를 마음에 두었어?”
“좋아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결혼하겠어요.”
나는 어마마마의 손등을 쓸며 안심시켰다.
“샬리, 네 선택에 후회는 없는 거야?”
오라버니가 나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럼요. 오라버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말은 네가 제국의 사절단으로 가기 전에도 했던 말 같구나.”
나는 그들의 불안감을 지우기 위해 활짝 웃는 수밖에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황제와 국왕 내외, 왕세자와 내가 한자리에 있었다.
“폐하, 샬리오니 공주에게 청혼하셨다 들었습니다.”
“이미 들었다면 얘기가 빠르겠군. 만월의 밤이 지나면 샬리를 제국으로 데려가겠다.”
그 말에 나를 포함한 모두의 눈동자에 당황이 들어찼다.
“그렇게 빨리 말입니까? 준비된 게 전혀 없습니다. 지참금이라든지 양국 간에 정할 것이 많지 않습니까. 아레인 벨라스 경의 일도….”
카시카프가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샬리는 다른 것 없이 그대로 내게 오면 된다. 아레인은 샬리의 호위 명목으로 제국으로 데려갔으면 좋겠군. 그리고 리노아에 첩자를 심은 일은 진심으로 사과하지. 제국이 이후로 리노아에게 선전 포고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대들이 원하는 보상을 말하면 뭐든지 들어줄 테니 말해 보라.”
아레인을 제국에 시집가는 공주의 호위기사 명목으로 데려간다면, 첩자였다는 사실을 감출 수가 있으니 제국과 리노아 둘 모두에게 좋은 방법이긴 했다. 피해 보상은 아주 큰 거로 받아야겠는데. 뭐가 좋을지 나중에 아바마마랑 상의를 좀 해 봐야겠다.
“그리고 구혼선물을 가져왔는데 받아주었으면 좋겠군.”
“어떤 구혼선물을….”
구혼선물이라니,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투알린을 리노아에게 주겠다.”
“…….”
네…?
모두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잠시 잠깐 이해하지 못했다. 전부 일시 정지 상태가 되었다. 내가 다시 환청이 들리고 그러나? 아니었다.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니었다. 리노아 왕족들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아레인에게 뒤처리를 맡겼으니 곧, 그대들의 손에 정권을 이양하는 국서가 도착할 것이다. 투알린 왕족과 귀족들은 그대들이 원하는 대로 알아서 처리하면 되고.”
왕국 하나를 우리에게 준다고요?!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러면 나한테 구혼선물을 주겠다고 투알린에 전쟁을 선포했다는 거야?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이 머릿속에서 '딱‘ 소리를 내며 제자리를 찾아갔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본인에게 직접 물어봐야 한다.
“폐하, 투알린을…. 리노아에 주신다구요?”
“그래, 부족하면 말하고.”
“그러면 투알린을 결혼 선물로 제게 주겠다고 공격하신 거예요?”
“그것 때문에 일찍 처리한 것은 맞지만, 어차피 그놈들이 고대 병기를 가지고 설치고 있어서 전쟁은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다.”
그건 그렇지….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제국과 투알린은 전쟁을 했을 것이다.
“역시 부족한가? 그대가 원한다면 다른….”
“아니에요. 폐하, 괜찮아요!”
이제 무슨 말이 더 나올지 두려울 정도였다. 우리가 주고받는 대화를 따라잡지 못한 왕족들은 얼이 빠져 있었다.
“폐하, 제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지금 투알린을 통째로 넘겨주겠다고 하시는 겁니까?”
정신을 차린 아바마마가 물었다.
“그렇다. 왕족과 귀족들까지 모두 그대들이 알아서 처리하면 되지.”
우리 왕족들은 이제 나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내게 답을 구하는 듯했지만, 나 또한 얼이 빠진 건 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투알린을 받아들이기로 한 아바마마와 오라버니는 매우 바빴다. 왕국을 선물로 준다는데 피해 보상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피해 보상으로 포르토 왕국이라도 준다고 하면 정말 큰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만월의 밤, 사흘이 지나기 전에 모든 짐을 싸야 하는 황당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티나, 이거 사흘 만에 가능할까?”
티나는 내가 돌아오자 기쁨을 눈물을 펑펑 흘렸지만, 지금은 눈에서 시퍼런 빛이 나올 정도로 독기 어린 모습으로 돌변해 있었다.
“공주님, 절대 안 돼요. 보석들이랑 드레스며 하나같이 조심히 다루어야 하는데 사흘은 시간이 너무 촉박해요!”
“그… 렇지? 폐하께 말하고 올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같이 가요."
티나가 급하게 짐을 싸던 것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니야 티나, 마저 하고 있어. 다른 시녀랑 갔다 올게."
나는 카시카프를 만나 기한을 늘리기로 했다.
그를 찾아갔을 때는 궁의 정원에서 제국의 기사 여럿과 이야기 중이었다. 매우 바빠 보여서 나중에 다시 올 생각에 돌아가려던 참이었는데 눈이 마주쳤다. 카시카프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나를 껴안았다. 그의 체향이 내게로 물씬 풍겨왔다.
“살 거 같군.”
잠시 그렇게 있다가 내가 그를 천천히 떼어 냈다.
“할 말이 있어요.”
그는 내 머리칼에 손안에 넣고 이리저리 만지며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있었다.
“카시카프, 사흘은 너무 촉박한 거 같아요.”
“어째서?”
“짐들을 분류해서 꾸리자니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래요.”
“그 짐들을 다 들고 갈 필요가 있나? 필요한 건 제국에서 모두 마련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나를 끌어안았다.
“내가 뭐든지 주겠다고 했잖아.”
“그러셨죠….”
“크흐흠!”
커다란 헛기침 소리에 나도 모르게 후다닥 떨어졌다. 소리의 주인은 테일러 오라버니였다.
“오라버니…. 오셨어요.”
“왕세자로군, 무슨 일이지?”
나는 민망하고 부끄러워 죽겠는데 카시카프는 아주 태연했다.
“폐하, 투알린의 일로 상의 드릴 일이 있습니다만, 급한 일이 없으시다면 조회에 참석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 말을 하며 오라버니가 나를 흘깃 바라보았다.
“아, 나는 샬리와….”
“저는 그럼 이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람같이 내 궁으로 돌아왔다. 그런 나를 티나가 반갑게 맞았다. 왜 하필 그 순간에 오라버니랑 마주쳐서 부끄럽다. 정말.
“공주님, 폐하께 말씀드려보셨어요?”
“으응? 아…. 그게, 티나. 정말 필요한 것만 챙겨야 할 거 같아.”
내 말에 티나가 울상이 되었다.
“지금 폐하도 와 계셔서 인력이 훨씬 모자란 데…. 이걸 어쩐담.”
“드레스는 최소한으로만 가져가도록 하자. 어차피 제국이랑 유행이 달라서 대부분 다시 맞춰야 할 거야.”
“그건 그러네요. 그럼 제일 중요한 보석부터 먼저 챙겨야겠어요.”
“그래, 그렇게 하자.”
나는 티나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 중 애착이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작은 가방에 내 짐을 따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제일 중요한 서류 한 장을 집어 올렸다. 사실 내가 제일 걱정하는 부분은 황비에 관한 문제였다. 지금 프레타스 제국은 카시카프 덕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며 강성한 힘을 자랑하고 있었다. 두 번의 전쟁으로 다른 왕국에도 이미 위세를 떨친 상태이고 말이다. 내가 결혼했을 때, 여기저기서 황제에게 황비를 들이밀지 않을까 걱정되는 것이다.
나라 사이의 정략결혼은 대부분은 물질적인 이득 부분이 오고 간다. 분명 제국에 도움이 되는 일일 텐데 내가 황제에게 그것을 거절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그가 나를 좋아한다. 다만 그게 얼마나 유지가 될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식지 않을까. 문득문득 드는 생각들이었다.
여기 와서 제일 바랐던 것. 내가 살아남고 눈앞에서 전쟁의 살육이 벌어지는 걸 보기 싫다는 생각 그거 하나. 이루었지만 영원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황제의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손에 있는 종잇장을 무감하게 응시했다.
- 맹세 서약서 -.
어떤 경우에도 샬리오니 롯트 리노아를 형벌에 처하지 않는다.
집권 기간 리노아 왕국에 결코 전쟁을 선포하지 않는다.
제국에 도착하면 이 서류를 카시카프 앞에 내밀고 도장을 찍으라고 할 참이었다. 이건 그냥 서류 한 장이 아니었다.
마법으로 묶여 맹세하며 확인받는 서약서였다. 이 서약을 어기면 걸린 마법에 따라 부작용이 생기게 된다. 내 마지막 도피처 같은 거였다. 이게 없으면 안심할 수가 없다. 나는 여전히 불안하고, 그를 믿지 못하고 있으니까. 나는 서류를 책 사이에 끼우고 가방 깊숙이 밀어 넣었다.
“티나, 보니는 손님 궁에 데려다 놓은 거야?”
“네, 맞아요. 그런데 정말로 그 아이는 누구예요? 저렇게 귀여운 아이는 처음 봤어요. 마치 검은 아기 고양이 같아요.”
사랑스러운 아이라서, 확실히 지금은 검은 머리칼에 금안이니 고양이처럼 보일만도 했다. 황제는 보니가 성녀라는 걸 숨기길 바랐기 때문에 나는 그저 투알린에서 데려온 아이라고만 말해 주었다. 다시 그 신이라는 작자가 보니의 몸을 빌려 내게 협박할 걸 생각하면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떼 놓을 수도 없었다. 아이의 처지를 생각하면, 이렇게 만난 것도 하나의 인연인데 말이다. 보니를 가까이 두면 신도 가까이 두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