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27
조금 전의 대화 때문에 그러는 건가.
“좀 전의 이야기라면 신경 쓰지 마세요. 당신은 황제고 제국의 입장으로 말씀하신 거잖아요.”
나는 안심하라는 뜻으로 그의 손위에 다시 내 손을 포갰다.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는데 헨리가 타고 있던 말을 마차 옆으로 붙이곤 내게 말을 걸어왔다. 카시카프는 그를 보더니 진저리를 쳤다.
“샬리, 저놈과 가까이 지내지 마라.”
“폐하, 벌써 질투하십니까? 샬리랑 대화 한번 못하게 하시니, 그거참 섭섭합니다.”
카시카프가 문을 닫으려고 하기에 내가 그의 손을 잡고 토닥였다.
“마차 안이 답답해서 그래요. 좀 더 열고 있어요.”
“티레에 얼른 도착했으면 좋겠군.”
전부터 손이 딱딱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의 손을 토닥이다 보니 대부분이 굳은살이었다. 검을 써서 그런가? 겉으로 보기엔 손가락도 길고 비율이 좋았다. 그의 손등을 유심히 살피자 자잘한 흉터가 많았다. 손을 뒤집어 보니 손바닥에는 깊은 흉터가 길게 자리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 사이에 굴곡이 졌다.
“그대가 내게 이렇게 관심을 두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지 모르지.”
그가 다른 한 손으로 내 미간을 부드럽게 쓸었다.
“신관에게 치료받지 않으셨어요?”
손바닥에 있는 흉터는 꽤 커서 황제의 손바닥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치료받으면 굳은살도 사라지니까. 난 그게 더 싫거든.”
그때 아직 있는 줄 몰랐던 헨리가 마차 가까이 다가왔다.
“그럼요, 그거 다시 만들려면 손바닥이…. 어디 보자, 수천 번은 터져야 합니다.”
“세상에, 그렇게 많이요?”
카시카프가 내 손을 쓰다듬으며 주의를 끌었다.
“샬리.”
“그렇게 터지고 나면 자리가 잡히죠. 그러다 쓰는 검술이 달라지면 또 터지고요.”
“검을 손에서 놓지 않는 한 계속 터지는군요?”
“샬리….”
“그럼요! 그래서 웬만하면 손은 신관한테서 치료를 잘 안 받습니다.”
“정말, 다시 굳은살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치료받기 힘들겠어요.”
“헨리, 그만 입을 다무는 게 좋겠군.”
탁-.
카시카프가 자기 할 말만 하고 창문을 닫아버렸다.
“나에게 물으면 다 대답해 주겠다.”
“궁금한 건 다 들은 것 같은데요.”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그의 입가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여기 힘주면 팔자 주름 생겨요.”
입가를 꾹 누르자 그가 웃으며 내 손을 잡아 폈다. 그리고는 손바닥에 가볍게 키스를 하며 물었다.
“나한테 궁금한 건 없나?”
“이제 이렇게 다칠 일 없으신 거죠?”
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바람에 흐트러진 내 머리칼을 그가 귀 뒤로 넘겨주었다.
“없어. 이젠.”
*
"폐하, 내일부터 만월의 밤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헨리가 카시카프에게 만월의 밤에 대해 알렸다.
"내일부터라고?"
만월의 밤은 책에서 나온 부분이라 나도 알고 있었다. 신 크리하엘의 기운이 가장 약해지는 시기로 사흘 동안 만월이 뜬다. 그리고 그 사흘 동안 달빛을 받으면 몸에 저주가 깃든다는 오랜 풍속이 있어서 해가 지기도 전에 절대밖에 나가지 않고 몸가짐을 바로 한다고 했다.
그 만월의 밤은 신전에서 이삼일 전에 항상 사람들에게 알리곤 했다. 아무래도 우리는 투알린과의 전쟁 때문에 오늘에서야 알게 된 것 같았다. 아니면 구속구를 지닌 보니의 몸에 들어와 크리하엘이 무리를 하는 바람에 갑작스럽게 공표되었던지. 그가 분명히 구속구가 지독하다고 했으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샬리, 내일부터 만월의 밤이 되면 사흘 동안 티레에 묶이게 된다. 괜찮은가."
나는 빨리 출발했으면 싶었다. 가족들이 전쟁 소식을 듣기 전에, 걱정하기 전에 말이다.
“지금 당장 출발하면 리노아에 언제 도착할 수 있을까요?”
“반나절 만에도 갈 방법이 있다. 다만 그대의 체력이 괜찮을지 걱정되는군.”
“저는 괜찮아요. 멀쩡해요.”
그가 나를 걱정스럽게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
우리는 간단히 식사를 마친 후 리노아로 빨리 이동하기 위해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솔비크 산맥을 선택했다. 리노아와 투알린 사이를 끼고 있는 산맥이다 보니 상인들이 이용하는 굉장히 활발한 교역로였다.
산을 가로질러 마차가 다니기 충분할 정도로 길도 크게 내었다고 했다. 그런데 상인들이 모여들자 점차 도적들이 하나둘 늘어나 도적소굴이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양쪽 왕국이 주기적으로 합심해서 도적들을 소탕했지만, 최근 1년 사이에 국가 간의 사이가 멀어진 것이 도적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원인이 되었다.
결국엔 목숨을 내버릴 정도로 시급한 사람이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곳이었다. 하지만 산의 중심을 가로질러 단번에 넘어가기 때문에 이 산맥만 뚫리면 투알린과 리노아의 거리가 사흘에서 반나절로 줄어든다. 사람들은 안전을 위해 산맥을 빙빙 둘러가고 나 또한 리노아에서 투알린으로 갈 때 그랬었다.
황제처럼 최정예의 마법사와 기사들을 거느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면 누구도 엄두 내지 않을 길이었다. 몇 시간을 달렸을까. 아무런 낌새도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카시카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샬리, 마차가 멈추면 절대 나오지 마라. 알겠지?”
“도적들이 습격할까요?”
“산맥을 거의 다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공격 한번 없었으니 아무래도 끝자락에서 한꺼번에 칠 모양인 것 같군.”
그가 그 말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천천히 멈추기 시작했다.
“절대 나오지 마, 알겠지?”
“네. 알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말은 담담히 했지만 속은 굉장히 떨리고 있었다.
“아, 보니는요?”
“그건…. 둘만 한 공간에 놓아둘 수 없다. 위험해.”
“그렇다고 아이를 저 바깥에 둘 수는 없잖아요. 구속구도 착용하고 있는데 뭐가 문제예요.”
“내가 안심이 안 돼. 하지만, 하아…. 알겠다.”
그가 한 손으로 마른세수하더니 마차를 열고 나가면서 마법사를 불렀다.
“에이솔, 마차 문을 잠그고 방음 마법에 보호 마법을 걸어라. 그리고 아이를 데려와.”
잠시 뒤 보니가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백발과는 정반대인 흑발로 바뀌어있었다.
“보니, 괜찮을 거야. 여기 있으면 아무 문제 없어. 폐하께서 도적들을 다 혼내 주실 거니까.”
나는 아이가 많이 놀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의외로 보니는 차분했다. 오히려 나를 멀뚱멀뚱 보더니 가까이 다가와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내 손을 잡고 토닥였다.
“엄마가 이렇게 해 주면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보니를 보았다. 이건 마치 나를 위로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 분명 겉으로는 무서운 내색 하지 않고 덤덤하게 잘 대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티가 많이 나나….
“괜찮아, 나는 안 무서워.”
보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 손을 토닥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감옥에서 엄마가 죽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감옥에 갇혀 있던 걸 보면 꾀죄죄하긴 해도 아마 오래전도 아닐 것이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여전히 내 손을 토닥이는 보니를 보며 물었다.
“사실은 내가 많이 무섭거든, 보니가 안아 주면 안심될 거 같은데.”
그러자 아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는 아이의 작은 몸을 내 무릎 위에 올리고 꼭 끌어안았다. 보니도 짧은 팔을 펼쳐서 낑낑거리며 마주 안았다. 이렇게 해도 엄마가 안아 주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사람의 온기가 그립지 않을까 싶어서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다.
“보니는 안 무서워?”
아이가 나를 올려다보더니 씩 웃었다.
“헨리 아저씨가 막 이렇게, 이렇게 검을 휘두르니까 굉장히 세 보였어요. 마법사도 손에서 불이 나오던데요?”
아저씨라고 하는 걸 보니까 헨리와도 꽤 친해졌나 보네. 그가 워낙 말이 많으니까 안 친해질 수가 없겠다 싶었다.
마차는 매우 조용했다. 가끔 우리가 나누는 대화 소리 말고는 정적만 흘렀다. 싸움이 일어나면 마차가 흔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마법이 걸려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시작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체감상 삼십 분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다시 마차 문이 열리고 카시카프가 들어왔다. 바람을 타고 쇠를 머금은 피 냄새가 훅 끼쳐왔다.
“끝났어요…?”
이렇게 빨리? 밖의 상황을 모르니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그가 마차 문을 재빨리 닫았다.
“그럼, 모조리 쓸어버렸지. 그대는 걱정할 것 없다.”
그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것이 마치 산책을 다녀온 사람처럼 차분해서 괴리감이 느껴졌다. 마차 밖에서는 피 냄새가 풍겨왔는데 말이다. 나를 가만히 보더니 그의 눈썹 한쪽이 올라갔다.
“이제 된 거 같은데, 그 아이는 그만 보내지.”
나는 보니를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제 곧 도착이라고 했으니 같이 가는 게 어떨까요?”
보니가 그의 눈치를 보더니 무릎 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손을 나팔 모양으로 만들어 내게 속닥거렸다.
“언니는 저 사람…. 아니, 폐하랑 무슨 사이예요?”
제 딴에는 작게 소곤거리며 말한다고 했지만 아마 카시카프도 다 들었을 것이다. 아이의 장단에 맞춰주기 위해서 나도 작게 소곤거렸다. 물론 좁은 마차 안에서 그는 이것도 다 들리겠지만.
“결혼할 사이야.”
“아, 결혼하면 그거…. 그게 되잖아요. 저도 알아요. 뭐였더라?”
그가 무심한 표정으로 우리가 소곤대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기억났다! 그거요. 신랑, 그럼 언니 신랑이 되는 거죠?”
카시카프가 그 말에 크게 헛기침을 하자 보니의 몸이 놀라 움츠러들었다. 황제한테 신랑이라니, 아마 평생 가도 들어보지 못할 단어일 텐데. 웃음이 비죽 새어 나왔다. 아이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아니, 귀족 꼬맹이들도 못 할 것 같긴 해.
“맞아, 내 신랑 될 사람이야.”
그가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아이를 내보내라던 카시카프가 그 뒤로 별말이 없어서 나는 보니를 내 옆에 다시 앉혔다. 우리는 산적을 소탕한 후 유유히 산맥을 빠져나왔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우리가 마법사들과 다수의 기사가 있는 것을 보고 산적들이 처음부터 매복을 포기하고 아예 리노아 쪽의 산맥 초입에서 모두 모여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실력 있는 마법사들은 전부 왕국이나 제국에서 모조리 스카우트를 해 가는 형편이니, 보통 남아 있는 마법사들은 대부분이 생활 마법 정도나 쓸 수 있는 하위마법사들뿐이었다. 그저 마차를 보고 돈 많은 귀족이겠거니 했던 산적들은 마법사 역시 귀족에 속해 있는 실력 없는 이들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산적들은 지나가는 마차가 제국의 황제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테니 그들이 판단이 마냥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본의 아니게 길을 막은 도적들을 깨끗이 소탕해 버린 황제 덕분에 솔리크 산맥은 한동안 청정 지역이 되었다. 그 후로는 소문 빠른 상인들의 산맥 이용 행렬이 늘어났고, 리노아와 투알린의 교역이 다시 눈에 띄게 증가했다고 하니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 * *
내가 황제와 함께 리노아에 돌아오자 가족들이 기겁했다. 그럴 만도 했다. 반나절 만에 투알린에서 리노아로 주파해 버렸으니 아직 전쟁 소식이 리노아까지 당도하기도 전일 것이다. 깊은 밤에 도착했으니 카시카프와는 다음 날 아침 정찬 때 다시 만나기로 했다. 보니는 내가 따로 챙겨 티나에게 맡겼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아바마마와 오라버니는 내가 돌아온 것을 기뻐하면서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