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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26화 (26/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26

“내가 누군지….”

“가야겠구나, 구속구는 정말 지독하군. 내 경고를 잊지 마라.”

올 때와 마찬가지로 크리하엘은 예고도 없이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정말 딱,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갔다.

보니의 하얀 눈동자가 서서히 제 색깔로 돌아오고 있었다. 방금 내가 본 신이 신 크리하엘이 맞나? 알고 보면 내가 모르는 파괴의 신 같은 것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지루하니까 전쟁을 막지 말라는 헛소리를 할 리가 없다. 신이라는 자가 했다는 말이라고는…. 내가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자 보니가 내 드레스 자락을 조심스레잡아당겼다.

“샬리 언니….”

아이는 조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아니, 무언가 제 몸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는 건 아는 것 같았다.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으니까.

“보니, 괜찮니?”

“조금 전의 기억이 없어요…. 제가 혹시 또 뭔가를 했나요?”

나를 쳐다보는 눈동자가 애처롭게 흔들렸다. 아이는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또 있었어?”

“두 번 정도…. 샬리 언니, 저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저는 마녀가 아니에요. 무서운 아이도 아니에요.”

아, 너를 어쩌면 좋을까? 고작 열 살이나 되었을까. 몸집이 작고 마른 편이니 어쩌면 나이가 더 많을 수도 있었다. 내가 보기에 성녀는 성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신에게 속박된 허수아비와 다름이 없었다. 그 대가로 준 신력이 다 무슨 소용인가. 함부로 사용할 수 없고, 잘못 다루면 마녀로 몰려 목숨을 잃는 것을.

“맞아, 넌 아무 잘못 없어. 그저 평범하고 예쁜 아이지.”

나는 보니의 작은 몸을 안아 들고 서둘러 황제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갔다. 내게는 신 같지도 않은 신의 출현으로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있었다. 내가 돌아왔을 땐 다행히 카시카프도 아직 마차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보니를 안은 채로 마차 안에 들어가려니 혼자서는 힘들 것 같아 잠시 망설였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헨리가 제 옆을 톡톡 두드렸다.

“공주, 나랑 재밌는 얘기 안 할래요?”

“어떤 재밌는 이야기요?”

혼란한 머릿속을 가다듬어야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신을 붙들만한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에 선선히 응답해 주었다. 보니와 나는 헨리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아주 신난 것처럼 자신의 주변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무뚝뚝한 상남자의 표본처럼 보였었는데 알고 보니 입담 좋은 수다쟁이였다.

“그럼 공작에 군단장이신 거예요? 제가 이름 말고 공작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냥 부관인 줄 알았더니 엄청난 신분이었네. 헨리라고 부르라고 해서 눈치 없이 공작님을 계속 헨리라고 부를 뻔했잖아.

“난 그렇게 부르면 싫습니다만. 이참에 같이 이름을 트죠.”

그는 마치 수다 동지라도 만난 양 내게 친근했다. 공작이라면 좀 위엄도 넘치고 그럴 줄 알았는데 소탈해도 너무 소탈했다. 그래서 금세 사람들이랑 잘 어울리는 친화력이 좋은 사람인가 보다 생각했다. 이제 제국으로 시집가는데 아는 사람이 있으면 좋지 않나 싶어서 나도 흔쾌히 대답했고.

“샬리라고 불러 주세요. 정말 헨리라고 불러도 되나요?”

“샬리. 황후가 되시기 전에 실컷 불러야겠는데요.”

그는 내가 황후가 된다는 사실을 기정사실로 하고 있었다. 카시카프가 최고의 자리에 올려 주겠다고는 했지만, 황후라고 직접 얘기한 건 아니었는데. 알고 보니 황후가 아니라 황비일 수도 있지 않은가. 한데 카시카프가 내게 프러포즈 한 게 좀 전이었건만 그게 밖에 전부 들렸나? 이 마차 보기보다 방음이 굉장히 안 좋은 모양인데?

“황후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부르면 제가 곤란해져요. 헨리.”

누가 들을까 싶어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황제 외에 함부로 황후를 예단하면 안 되는 거로 알고 있는데…. 나는 헨리가 황제의 최측근이라서 어느 정도 수용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고 말을 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의아한 표정이었다.

“폐하께서 황후로 맞이한다고 하셨으니 당연히 황후가 되실 겁니다.”

이건 마차 안에서 했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데. 그가 직접 헨리에게 표명했다는 거 아닌가.

“언제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요?”

“투알린으로 출발하기 전에 하셨는데. 뭐, 다들 이미 아는 내용입니다.”

그가 턱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아, 그래서 나를 그렇게 신기하게 쳐다본 거구나. 그런데 여기 오기 전부터 그렇게 말을 했다고?

“투알린은 어떻게 되었어요?”

“아레인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하. 겨우 만났다 했더니, 내가 사실 같이 그놈들을 정리….

아, 샬리. 아레인은, 그….”

신나게 잘 이야기하던 사람이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군단장이라 했으니 다 알고 있겠지. 이 사람, 아레인이랑 친한가 보네. 이야기할 때 신나고 즐거워 보였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친하다고 생각했었지. 헨리는 같은 제국 사람이니 배신당할 일도 없겠구나.

“헨리, 내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내가 말을 돌리자 헨리도 어색한 분위기를 벗어나서 그런지 기꺼워했다.

“제가 아는 거라면 답해드리죠.”

“폐하는 왜 투알린에 선전 포고를 하신 거예요?”

처음에는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상황을 하나씩 맞춰 보니 이상했다. 카시카프는 내가 샬리오니 공주라는 걸 알고 있었다. 투알린으로 오기 전에 나를 황후로 맞이할 거라고 했다면 왜 리노아로 곧장 오지 않고 투알린에 전쟁을 선포했을까.

“아, 그건….”

“헨리.”

카시카프가 지척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이젠 하다못해 공주까지 괴롭히고 있는 건가.”

그가 질렸다는 눈으로 헨리를 보았다.

“누가 누굴 괴롭혔다 그러십니까? 샬리의 말 상대해 주고 있었습니다.”

“샬리…? 하아….”

그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샬리, 일일이 상대해 줄 필요 없다. 무시해.”

헨리는 카시카프에게 마치 천덕꾸러기처럼 취급받고 있는 모양새였다.

“아니에요. 정말로 제 말 상대를 해 주셨어요. 재미있었어요.”

헨리가 안쓰러워 두둔해 주자 그가 진한 웃음을 흘렸다.

“나도 그대를 재밌게 해 줄 수 있는데, 샬리.”

카시카프가 헨리처럼 재미를 준다고?

“어떻게요?”

“우선 들어가지.”

헨리가 아쉬운 얼굴로 멀어졌다. 내가 일어서자 보니가 내 뒤로 몸을 숨겼다.

“보니…. 아니, 성녀 말인데요.”

“그 아이 말인가? 이름이 보니인가 보군. 왜 이곳에 있지?”

내 드레스 뒤에 몸을 숨긴 채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는 보니를 보며 그가 물었다.

“내가 옆에서 잠시간 돌봤으면 하는데, 기사들은 아이에겐 너무 위협적인 것 같아서요.”

“안 돼. 그냥 아이가 아니다. 이미 마녀로도 한번 판결을 받았지.”

사실 허락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매우 단호하게 거절했다.

“구속구를 차고 있어서 괜찮지 않나요?”

카시카프는 고개를 저었다. 보니는 사랑스러운 여자아이였지만 오늘 잠시 본 것이 다였다. 그래서 그런 아이가 아니라고 카시카프에게 주장할 수 없었다. 실제로 신과 대화하긴 했지만 그게 보니의 탓은 아니었다.

보니는 착한 아이처럼 보이는데…. 잠시 봤다고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건 안 된다고 하지만. 구속구도 채워져 있는 상태이고, 혹여 쓴다 해도 함부로 사용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더 중요한 건, 저 거칠고 덩치 큰 기사들 옆에 꼬마가 끼어 있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내가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자 그가 내게 절충안을 제시했다.

“기사를 무서워하면 여자 마법사에게 보내겠다. 그럼 되지?”

카시카프가 나를 보며 타이르듯 말투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루이, 에이솔에게 이 아이를 보내라. 그리고 머리카락 색을 바꾸라고 해라. 백발만 아니면 된다.”

“머리카락 색은 왜요?”

“성녀를 데리고 있다는 소문이 나면 안 되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 외에는 믿지 않는다.”

언제 근처에 있었는지 루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루이는 다른 기사들과 달리 체구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보니도 크게 겁먹지 않았는지 루이의 손을 마주 잡았다.

사실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떼를 쓸 줄 알았다. 아직 어린아이니까, 무서운 환경에 놓이면 제일 편한 사람에게 투정 부리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보니는 이리저리 눈치를 보더니 얌전하게 루이를 따라갔다. 그래도 아이는 아이인지 따라가면서도 힐끗거리며 나를 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우린 들어가지.”

카시카프가 내 손을 잡고 마차 안으로 에스코트했다.

“그래, 무슨 대화를 했는데?”

헨리와의 대화를 말하는 거구나. 보니에 대해 생각한 탓인지 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황제가 전쟁을 벌이는 것을 막지 말라니. 신이 했던 말은 아무래도 그에게 꺼낼 수 없었다. 왜 황제의 전쟁을 막으려고 했는지부터 시작하면, 나는 그에게 할 수 없는 말이 훨씬 많았다. 말을 꺼내다 보면 분명 내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냥 헨리 주변 이야기요?”

“정말로 헨리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나?”

그가 진지한 얼굴로 내게 답을 구하듯 바라보았다.

“카시카프는 황제잖아요. 굳이 헨리처럼 재미있을 필요가 뭐 있어요.”

“헨리가 재미있다고 하는 사람은 그대밖에 없다.”

정말인가. 수다가 좀 과하긴 해도 맛깔스럽게 이야기를 잘하던데.

“헨리 인기 많아 보이던데…. 아니에요?"

“전혀. 그렇지 않다.”

여기선 헨리 같은 사람이 인기가 없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내게 가까이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우린 재밌는 이야기 말고 다른 걸 하지.”

또 뭘 하시려고.

“안고 있자고요?”

“흔적. 아까 보니까 사라졌더군.”

흠칫 놀라 떨어지려 했지만, 그가 이미 내 허리를 꽉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샬리….”

감미로운 낮은 목소리가 내 귓가로 감겨들었다. 그래…. 이제 결혼할 사이니까. 나는 눈을 딱 감고 그에게 손목을 내밀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뭔가 싶어 눈을 뜨자 그가 나를 고요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요?”

“그대의 눈, 보고 싶으니까 감지 마.”

그리고는 시선을 마주한 채로 내 손목을 제 입술 쪽으로 당겼다.

* * *

리노아 왕국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인 티레로 가는 동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신 크리하엘과 보니. 내가 얼마나 거슬렸으면 보니를 통해 내게 말을 전했을까.

“그 아이가 마음에 들었나 보군.”

“카시카프, 보니는 어떻게 할 건가요?”

“그건, 말해 줄 수 없겠는데.”

그래. 당신도 나를 크게 믿고 있지는 않는구나. 나 또한 숨기고 있는 것들이 있으니, 그가 보기에 내가 못 미더울 수 있지. 나는 수긍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를 빤히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성녀를 어떻게 할지는 결정하지 않았다. 다만 이용가치가 있어서 데리고 온 거지.”

신에게도 휘둘리는 아이인데, 황제에게까지 도구처럼 이용되어야 하는 건가.

“보니는 사람이에요. 물건이 아니라.”

“그래, 이렇게 말하면 왠지 그대가 날 싫어할 것 같아서 말을 꺼낼 수가 없었지. 하지만 난 황제고, 제국이나 나에게 이익이 될 만한 건 마다하지 않는다.”

보니를 사람답게 대우해 달라고 하면 제국의 일에 주제넘게 참견하는 걸까. 그가 저렇게 말하니 섣불리 말을 꺼내도 될지 조심스러워졌다. 실제로 인권이 바닥인 곳에서 내 말은 위정자들에게 우습게 들릴 수도 있었다. 나부터도 투알린에 인질로 잡혀 있었으니 말이다.

그냥 내가 더 보니에게 잘해 주지 뭐. 내가 부탁하게 되고, 혹시나 그 부탁을 들어주면 그게 다시 마음의 빚이 될 것 같아서 피하고 싶은 점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게 여러 번 반복되다 보면 그를 의지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부탁하기를 꺼리고 의지하지 않으려는 결혼 상대라니. 내가 생각하기에도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마차 창문을 열었다.

“샬리….”

그가 내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내가 싫어진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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