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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25화 (25/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25

“우리는 이미 결혼이 예정되어 있지 않나.”

“아직 아바마마가 허락하지 않았어요.”

그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가볍게 웃었다. 그래, 리노아 국왕이 반대한들 저 사람이 신경이나 쓸까 싶었다. 그가 다시 내 쪽으로 넘어와 옆에서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이 정도는 봐줘. 안 그러면 내가 숨을 못 쉴 거 같거든.”

그의 따뜻한 체온이 전신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깊은 피로감이 긴장을 풀며 머리 위에서부터 흘러내렸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카시카프가 내 어깨를 당기자 등 전체가 따뜻해졌다. 귓가에 나른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도착할 때까지 조금만 자.”

* * *

“으…. 음.”

누가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눈꺼풀에 뭐가 자꾸 꾹꾹 누르는 느낌이었다. 귀찮아서 손으로 휘휘 젓자 누군가 깍지 껴 내 손을 잡았다. 눈이 번쩍 뜨였다.

“샬리, 뭘 좀 먹어야지.”

나는 어느새 처음처럼 마차 한쪽을 차지하며 누워있었다. 카시카프가 바로 위에서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민망해서 일어나려고 하자 그가 한 손으로 내 등을 받치며 중심을 잡아 주었다.

“식사 시간이에요?”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깍지 낀 내 손등을 엄지로 만지작거렸다.

“간단하게 먹고 티레에 가서 제대로 식사를 하도록 하지.”

행군이 멈춰서 그런지 밖이 소란스러웠다. 그때 누가 마차 문을 노크했다.

“폐하, 투알린에서 팰컨이 왔습니다.”

팰컨이라면 전서구로 쓰이는 매 아닌가. 그러고 보니 투알린은 어떻게 된 거지?

“샬리, 잠시만.”

카시카프가 나를 한번 보더니 그에게 말을 전한 기사를 따라갔다. 나도 계속 마차 안에만 있어서 갑갑한 차였다.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머리 모양도 매만진 후 마차에서 내렸다.

음…? 마차에서 내리자 수십 쌍의 눈이 한꺼번에 내게 꽂혀 들었다. 당황하고 있는데 내 앞에 불쑥 커다란 인영이 나타났다. 부관처럼 보이던 헨리라는 남자가 씩 웃었다.

“헨리라고 불러 주십시오. 공주는 왜 나온 겁니까?”

큰 덩치에 근육도 크게 잡혀 있고 제복도 제대로 잠그지 않은 그는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해 보였다. 눈매는 치켜 올라가 있고 갈색 머리칼은 자연스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상남자의 표본인 듯 야성미가 줄줄 넘쳐흐르는 이였다.

“답답해서 나왔답니다. 그런데 다들 나만 쳐다보네요.”

내가 주변을 돌아보자 나를 주시하던 수십 쌍의 눈동자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게, 다들 신기해서 그렇습니다.”

말하는 본인도 내가 신기한지 이리저리 관찰하고 있었다. 기분 나쁘지 않은 게, 마치 대형견이 꼬리를 흔들면서 관찰하는 느낌이라서 기분이 묘했다. 그가 관찰하는 것을 내버려 두고 다시 주변을 살피자 모두 쉬는 모양새였다.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근처는 아닌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호기심 가득한 눈들이 힐끔힐끔 눈길을 짧게 보내곤 했는데 그게 한두 명이 아니다 보니 영 뻘쭘했다. 잠시 굳은 몸을 움직이며 풀려고 했는데, 따라붙은 시선 때문에 포기할까 싶었다. 문 앞에서 기지개를 한번 쭈욱 펴고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내 시야에 낯익은 모습이 잡혔다.

“저 아이는….”

내 말에 헨리가 시선을 돌렸다.

“아아, 투알린 감옥에 갇혀 있던 성녀인지, 마녀인지 하는 아인데 이번에 데려가기로 했습니다.”

“데려간다구요? 왜요?”

카시카프는 그 아이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백발의 아이는 여전히 구속구를 채우고 고개를 숙인 채 웅크려 있었다. 옆에는 감시관처럼 보이는 기사 한 명이 옆에 교대하며 지키고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폐하께서 대동하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요. 이유 없이 데려가진 않으실 겁니다.”

루카 때도 생각했지만 이 사람들은 황제에 대한 믿음이 참 확고했다.

“제가 잠시 봐도 좋을까요?”

“예. 뭐, 구속구가 있어서 보통의 아이와 별다를 게 없습니다. 위협될만한 건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저 아이를 살펴보는 걸 허락해 달라는 의미로 물어본 거였는데, 확실히 구속구가 없으면 위협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름이 뭐니?”

가까이 다가가 이름을 물었는데도 아이는 웅크린 채 답이 없었다. 나도 같이 쪼그리고 앉아 얼추 눈높이를 맞추었다.

“내 이름은 샬리오니야. 샬리 언니라고 부를래?”

주위를 둘러보니 아이에게는 위협적인 덩치를 자랑하는 기사들이나, 로브를 둘러쓰고 아이를 경계하는 마법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주변 환경이 이러니 감옥에서 나와도 이렇게 무서워할 만하다 싶었다. 내가 근방을 둘러보고 다시 아이를 보았을 때 꼬맹이는 일찌감치 고개를 들고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아이가 나를 빤히 보더니 쉽사리 말을 못 하고 우물쭈물했다. 윤기가 흐르는 백발에 동그란 금안을 가진, 조그맣게 웅크린 아이는 마치 귀여운 고양이 같았다. 오래 갇혀 있어서 그런지 지저분하지만 씻기면 지금보다 훨씬 사랑스러울 것이다. 동그란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보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샬리… 언니라고요…?”

허…. 저 조그만 입으로 작게 샬리 언니라고 부르니깐 너무 귀여워서 심장이 잠깐 덜컹했다.

“응, 샬리 언니라고 부르면 돼. 여기는 덩치 큰 무서운 오빠들밖에 없지?”

내 말에 우리를 지켜보던 기사들이 여기저기서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뭐. 아이들이 보기엔 그게 사실이잖아요?

“이름이 뭐니?”

눈치를 보며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아이가 작게 ‘보니….’라고 말했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옥에 갇혀 있었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짠했다.

“이동하는 동안 보니를 제가 맡으면 어떨까요? 기사들을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아이를 감시하는 것처럼 보였던 기사가 헨리의 눈치를 보았다.

“폐하께 말씀드려보죠, 뭐.”

헨리가 턱을 쓸며 심드렁히 대답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보니가 슬며시 일어나더니 울상이 된 채 내게 귓속말을 했다.

“샬리 언니…. 마려워요.”

세상에, 화장실이 가고 싶은데 기사들한테 말도 못 하고. 기사들은 대화를 나누는 우리가 신기한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보니랑 잠시 저기 갔다 올게요. 멀리 안 가고 금방 올 거예요.”

“알겠습니다. 대신 너무 오래 있으시면 안 됩니다.”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은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열에서 잠시 이탈해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니의 볼일을 해결했다. 손을 잡고 돌아오는데 아이가 내 손을 놓고 어딘가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보니?”

설마 도망가는 건가 싶었는데 뛰어가다가 쭈그려 앉더니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내게 들꽃처럼 보이는 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언니, 고마워요. 계속 옆에 있어도 돼요?”

아이가 얼굴을 붉히며 내게 의지하려는 모습에 그 마음의 무게가 크게 느껴졌다. 카시카프가 어떤 목적으로 아이를 데려가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말에 선뜻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폐하께 여쭤볼게. 많이 무서웠나 보구나.”

나는 오면서 봐두었던 개울가에 보니를 데려갔다. 아마 근처에 개울이 있어 식사도 같이 해결하려고 여기서 쉬어가는 모양이다.

“보니, 일단 얼굴만 깨끗하게 씻을까?”

지금 아이의 얼굴은 땟국이 묻어 지저분한 상태였다. 얼굴만이라도 뽀얗게 씻어주고 싶었다. 보니는 얼굴을 쭉 빼고 눈을 꾹 힘주어 감았다. 윤이 도는 백발은 정말 다시 봐도 신기했다. 성녀들은 전부 백발이라고 했으니 원래 머리카락 색은 달랐겠지? 개울물로 보니의 얼굴을 여러 번 닦아 내니 투명하고 맑은 아이 얼굴이 보여 내가 다 개운한 기분이었다.

“다 됐네. 예쁘다.”

보니의 호박색 금안이 천진난만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게 귀여워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였다. 갑자기 보니의 금안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뭐야…?

나도 모르게 머리에서 손을 떼고 한걸음 물러섰다. 바뀐 하얀 눈동자에는 은은한 빛이 감돌며 이질적인 기운이 풍겼다. 마치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느낌에 저절로 몸이 굳어졌다.

“보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보니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왔다. 초점 없는 하얀 눈동자가 내게로 향했다. 검은 동자가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샬리오니.”

내 이름을 부른 아이가 한번 살포시 웃었다. 목소리는 아이의 것이었지만, 보니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였다. 이를테면…. 신이라든지…. 이제야 보니가 그저 평범한 여자아이가 아닌 성녀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구속구를 차고 있어 아무 위험이 없다 하였는데…. 성녀라서 신이라는 인외의 존재와 연결된 건가. 아이의 몸을 빌려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말이다.

“당신은 신 크리하엘인가요?”

무슨 신탁이라도 내리려고 그러나? 나는 대신관도 아니라서 해석도 못 하는데…. 그나저나 보니는 구속구를 차고 있는데, 신력은 못 써도 신탁을 받는 건 가능한 건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몸이 굳어 버린 한편, 저 존재가 내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머릿속은 맹렬히 돌아가는데, 몸은 움직임 없이 잠자코 있었다. 좀 전에 웃고 있던 아이는 어디 갔는지 다시 무감정한 표정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하는 일이 점점 거슬리기 시작하는구나. 황제의 일에 나서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무슨…. 나서지 말라니, 내가 무얼 했다고. 아, 혹시…. 내가 전쟁을 막고자 해서?

“황제의 전쟁에 간섭하지 말라는 말인가요?”

아이의 몸을 빌린 신은 긍정하듯 입가에 진한 미소를 피웠다. 잠깐이나마 보았던 보니와는 생판 다른 모습에 나는 몸을 떨었다. 그래도 궁금한 건 물어야겠다.

“어째서요? 전쟁이 나면 많은 사람이 불행해지잖아요.”

신이라면서 왜 전쟁을 막지 않고 파괴하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세계를 부수고 싶은 걸까. 신이라면서 그럴 리가.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 생각 끝에 신에게는 내가 모르는 인과법칙에 의한 당위성이 있겠다 싶은 결론이 났다. 하지만 아이가, 아니 신 크리하엘이 따분한 얼굴로 내 말을 받았다.

“지루하거든, 재미가 없구나. 네가 온 뒤로는 더더욱. 카시카프에게 해 놓은 안배를 네가 어그러뜨리고 있다.”

뭐라고…? 하마터면 신이라는 것도 잊고 험한 말이 튀어 나갈 뻔했다. 전쟁하는 이유가 그저 재미를 찾기 위해서인가.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속이 부글부글 끓는 와중에 신이 나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영 거슬렸다.

“당신의 세계를 망치려는 이유가 지루하기 때문인가요?”

“한낱 미물이 상관할 바가 아니거늘.”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신은 제 할 말만 하고, 내 말은 전혀 귀 기울여 듣고 있지 않았다. 그럼 궁금한 거라도 물을 수밖에.

네가 온 뒤로.

좀 전에 신이라는 작자가 했던 말이다. 그건 꼭 내가 어디서 온 건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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