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24
그녀를 황후로 데려오기 위해 투알린으로 향했다. 역시 이렇게 시간을 끄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점차 참을성이 없어지고 신경이 가닥가닥 끊어질 때였다. 특히나 사절단에서 한번 보았던 투알린의 왕자가 리오니와의 결혼을 운운하며 헛소리를 하지 않은가.
이성이 날아간 순간 피를 보지 않는다는 애초의 계획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서 눈을 뽑고 혀를 자를 것이다. 사지를 자르고 목을 효수하면 만족이 될까.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참이었다. 리오니가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내가 바라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귀엽게 헐떡이며 내 앞에서 멈춘 모습을 보자 이제 내 시야에는 그녀밖에 안 들어왔다. 나를 보려고 이렇게 열심히 뛰어온 것인가. 그녀를 꼭 껴안자 드디어 만족스러운 한숨이 나왔다. 온몸이 충만해진 기분이었다. 다시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나의 소문이 그녀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자 왕자를 함부로 손댈 수가 없었다.
헨리의 말대로 정말 운이 좋은 놈이었다. 그녀가 왕자와의 결혼을 부인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놈은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그놈을 갈기갈기 조각 내 찢어 버렸을 테니까. 그녀의 요청에 따라 리노아 기사들을 구하러 갔다. 지하 감옥을 내려가자 아레인이 보였다.
아마 그가 정한 행동 방침에 따라 제 실력을 완전히 내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리노아를 공격할 의사가 없으니 아레인을 공주의 호위로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한 참이었다. 그러나 그녀와 아레인이 서로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심지어 끌어안기까지 하니 그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감정에 휘둘려 나답지 않은 실수를 했다. 아레인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공주는 꽤 충격받은 모습이었다. 그때는 나 자신도 치솟는 화를 절제하지 못했다. 아레인과 대화하고자 하는 그녀가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싫었다. 리오니가 쓰러지고 난 후 바로 리노아로 이동하기로 했다. 투알린 국왕에게서 가장 좋은 마차를 얻어내고 그녀를 조심스레 눕혔다.
“아레인, 공주와는 어떤 사이지.”
리노아에 대한 정보는 전부 아레인에게서 들어온다. 그러니 그녀와 그가 어떤 사이인지는 내가 물을 수밖에.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폐하.”
“아무 사이도 아닌데, 끌어안았다고?”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하는 건가. 아레인이 잠시 침묵했다. 찌릿한 통증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제가 실력을 드러낼 수 없으니 공주님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그게 마음에 걸리던 참인데 무사하신 걸 봤으니 기꺼워서 그랬습니다.”
그 말을 들었음에도 왜인지 꺼림칙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끼는 최측근을 내가 불편하다 해서 책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투알린을 처리하고 바로 리노아로 와라. 블레인을 놔두고 갈까? 아니면 헨리?”
“당연히 블레인입니다.”
아레인에게 투알린의 뒤처리를 맡기고 리노아로 출발했다. 마차 안에서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품에 안고 싶은 걸 끝까지 인내하며 버텼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기에. 정치든 전쟁이든 뭐든 내가 짠 틀에서 뜻대로 움직이는데, 왜 리오니, 그녀만은 항상 엇나가는가. 지금 나는 두려움에 휩싸인 상태였다. 유년 시절 죽음의 문턱에서 여러 번 생사를 오간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녀에게서 미움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극심한 불안감과 초조함이 뒤섞였다. 내가 남들 감정에 이렇게 신경 쓴 적이 있었나. 아니, 없었다. 아랫사람의 감정 하나하나에 신경이 곤두선다고? 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던 사람이었다. 처음 겪어 보는 일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리오니 공주가 일어났다.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그녀의 낯빛은 생기를 잃은 인형처럼 차갑고 낯설었다. 그 모습을 보자 자연히 내 몸은 뻣뻣하게 굳어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긴장감이었다. 초조한 마음에 어느샌가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드리고 있었다.
내가 리노아에 간다고 하자 그녀가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본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낡은 조각배에 그녀 혼자 올라탄 것처럼 위태해 보였다. 이런 경우엔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테너가 있었다면 내게 알맞은 조언을 해 주지 않았을까.
싫어하지 말라고, 멀리하지 말아 달라는 말에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한참을 생각이 잠긴 것처럼 말이다. 아레인을 생각하기라도 하는 것인가. 그녀의 입에서 아레인과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말이 나오길 바랐다.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원하는 말을 들었지만 만족한 건 아니었다. 둘 사이엔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더 이상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다만 나도 그녀의 애칭을 부르고 싶었다. 아레인이 그녀를 불렀던 것처럼, 그녀가 아레인을 불렀던 것처럼. 그녀도 내 이름을 불러 주었으면. 그런데 막상 그렇게 불러 달라고 하자니 쉽사리 입이 열리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머리칼을 헝클였다.
“카시… 카프.”
하지만 불러 달라고 한 보람이 있었다. 불리는 일이 없어 내 이름을 잊을 정도였는데 그녀가 불러 주자 속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가득 찼다.
그녀는 내 공허함을 채워 주고 있었다. 계속 받아먹고 싶었다. 가득 찰 때까지. 아니, 차면 다시 흘려보내고 되 찰 때까지 끝없이 반복하고 싶었다.
아름다운 그녀의 눈이 눈꺼풀 사이로 사라졌다. 어지러운가 싶어 이마를 짚자 또다시 경계 태세를 취하는 것이 아닌가. 이럴 줄 알았으면 역시 보내주는 게 아니었는데. 여러모로 손해 보는 선택이었다.
“어떤 연유로 리노아를 방문하시는 건가요?”
리노아에 도착하면 투알린을 구혼선물로 바치고 그에 대한 말을 꺼내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나는 마치 허를 찔린 양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아주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거절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차게 식었다.
“청혼….”
제대로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알아듣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그녀는 다시 벌떡 일어났다. 사랑스러운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내가 싫은 건가. 거절하려고 하는 건가.
“그럼, 리노아에 그대 말고 누가 있지.”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딱딱하게 나왔다. 싫어도 어쩔 수 없다. 무조건 그녀를 데려갈 것이다. 내 눈에 들지 말았어야지.
“어쩌다 저랑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드셨는데요?”
“저를 왜 좋아하는지는 알아내셨어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이 있는 것 같은데, 내 대답은 그에 근접하지 못한 것 같았다.
“곁에 있는 거라면 굳이 결혼할 필요는 없잖아요. 제가 제국으로 유학을 가도 되죠.”
그래서 그녀의 말에 무엇이든 동조하려던 나는 그 질문에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고작 유학으로 만족하라고? 그 정도였으면 내가 투알린까지 왔을까 봐. 바보같이 고개를 끄덕였으면 일이 틀어질 뻔하지 않았나. 투알린에서 결혼 운운하던 그 왕자가 생각나는군. 그런 놈한테 빼앗긴다고 생각하니 차가웠던 머리가 뜨겁게 들끓기 시작했다. 이건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 같은데.
“다른 놈하고 결혼한다니, 그건 절대 안 될 말이지. 결혼은 나와 한다. 다른 놈들은 안 돼.”
한 번 말이 트이니 지금까지 하고 싶었던 말이 쏟아졌다.
“그대가 곁에 없다는 생각만 해도……. 누리고 싶은 것은 다 누리게 해 주겠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그대에게 주지. 샬리, 나와 결혼해 줘. 그대를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최고의 위치로 올려 줄 테니.”
그녀만이 나를 온전히 채워 줄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 나란히 서게 되겠지. 내가 싫다면 어떻게 해서든 거절하지 못하게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그녀를 잡아둘 족쇄는 무엇이든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금씩, 내 품에서 달아날 수 없도록 옭아맬 것이다. 내 곁이 아니면 그 어디에서도 살 수 없게 만들 것이다. 내 곁이 아니라면 그녀가 있는 모든 곳이 불모지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4.믿음 없는 결혼
“저를요? 저는 온전히 저만의 것인데요. 카시카프. 누구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아레인의 일이 좀 전이었는데,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고. 이제는 사람을 믿는다는 게 힘에 부친다. 쌓은 신뢰가 없으면 그에 따른 실망도 없는 법 아니겠는가. 당신이 점점 더 좋아질지도 모르지만, 아마 당신에 대한 기대는 없을 것이다. 믿고 싶은데 믿지 못한다. 마음에 둔 사람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서글픈 일인지 당신은 모르겠지.
내 말에 한순간 그의 눈이 새파랗게 빛나며 섬뜩한 기운을 흘렸다. 순간 전신에 소름이 바르르 돋아났다. 하지만 다시 눈을 깜박였을 땐 그 섬뜩함이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는 꿀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못 보았나? 분명히…. 내가 팔을 문지르자 그가 내 손을 부드럽게 끌어왔다.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 그대를 존중한다.”
카시카프는 내 손등에 입 맞추며 미소 지었다. 청혼을 허락한 이후로 확연히 달라진 태도에 어리둥절해졌다. 이중인격인가 하는 의심이 피어오를 정도였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그가 갑자기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 왔다.
“카시카프? 이러면 무게 중심이 한쪽으로 쏠리잖아요.”
“마법사들이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그가 내 눈을 가까이서 빤히 응시하더니 눈을 휘며 웃었다.
“어…. 어?”
그가 내 무릎 뒤쪽으로 팔을 쑥 집어넣더니 훌쩍 안아 올려 그의 무릎 위로 앉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지금 그의 무릎 위에 앉아서 눈을 맞대고 있는 건가.
여전히 올려다봐야 하지만 시선이 얼추 맞아떨어졌다. 그는 한결같이 내게 살가운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코끝으로 진한 머스크 향이 흘러들어왔다. 잠시 어안이 벙벙하던 나는 뛸 듯이 놀라 발끝에 힘을 주고 그를 벗어나려 했다.
“가지 마….”
그가 한쪽 팔로 내 허리를 옴짝달싹 못 하게 그러쥐더니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아…. 이제야 살 것 같군.”
“카시카프…. 잠시만요. 이거 너무….”
“너무 뭐가?”
카시카프가 얼굴을 파묻은 채로 중얼거리자 그가 내뱉는 호흡이 어깨를 간질였다. 눈앞에서 결 좋은 붉은 머리칼이 사르르 흘러내려, 매만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의 체향이 내 숨을 타고 흘러들어와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나는 호흡 곤란으로 헐떡이며 재빠르게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우리 너무 가까운 거 같아요!”
한껏 풀어져 있던 그의 눈이 다시 초점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가 책망하듯 미간을 모은 채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샬리, 나를 죽일 셈인가.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참았는지….”
뭘 얼마나 참았는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물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너무 붙어있는 거 같지 않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