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23
“그대가 좋다. 이전엔 한 번도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어.”
내 손위에 커다랗고 묵직한 손이 얹어졌다.
“부디 거절하지 마라.”
부탁인지 명령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대가 곁에 없다는 생각만 해도……. 누리고 싶은 것은 다 누리게 해 주겠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그대에게 주지. 샬리, 나와 결혼해 줘. 그대를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최고의 위치로 올려 줄 테니.”
예상하지 못한 마지막 말에 당혹스러웠다. 무엇이든 다 주겠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판이해진 분위기도 그렇고, 창밖을 보며 무덤덤하게 청혼하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제게 다 주신다고요.”
“그대가 원하는 건 뭐든지.”
카시카프의 절박한 눈동자가 내게 박혀 들었다. 그동안 절박했던 건 난데, 그가 갑자기 돌변한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뭐든 상관없었다. 결혼만 해도 감지덕지하건만 잘 해 주겠다고 하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청혼해 줘서 고마워요. 카시카프.”
미소 지으며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에 안도한 듯한 그가 마주 웃었다.
“내가 필요한 건 샬리, 그대뿐이야. 그대의 전부를 가지고 싶어. 내게 줄 수 있나.”
* * *
곳곳이 피투성이였다.
“전하, 다른 침실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다섯 살, 선황제 부부가 독살당한 이후로 매번 시달리는 한밤중의 습격이었다.
“테너, 아레인은?”
“마지막 침입자를 추격 중입니다.”
얕게 떨리는 손을 맞잡아 진정시켰다. 그 후로 십 년. 이제 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상당히 위험했다. 평소와 달리 꽤 민첩하고 예리한 놈들이었다.
“거울을 가져와.”
테너가 가져온 거울로 목을 비추니 가느다란 실선이 생겨있었다.
“후….”
오늘은 아예 작정했나 본데. 다른 침실로 이동하자 시종들이 참극이 난무하는 방의 시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생과 사를 오갈 때면 살아야만 하는 이유에 대한 의문이 들 때가 있었다. 다 내려놓고 선황제 부부를 따라 아무 생각 없이 잠들고 싶은 적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들이 그리운 건 아니었다. 사실 아무런 애정도 없었다. 그들은 내게 관심이 없었고 데면데면했으니 말이다. 오히려 유모가 암살당했을 적에나 눈물을 좀 흘렸었지. 지금까지 죽어 버린 암영조가 대체 몇 명이지. 질척하고 매스꺼운 과거의 기억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머리를 털었다.
“사이드 공작을 죽여야겠어.”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전하.”
암살자의 습격을 받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주고받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공허한 마음을 억누른 채 잠을 청해야 한다.
오지도 않는 잠을. 내 곁엔 아무도 없었다. 밑으로는 많았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전부 다 내 아랫사람이었다.
한때 유모가 죽고 테너가 데려왔던 아레인이 형제처럼 나와 같은 선상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도 나와 나란히 설 수는 없었다. 깊은 낭떠러지 같은 고독감이 어떠한지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설명한다고 알아줄 이도 없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눈 옆을 지그시 누르는데 테너가 들어왔다.
“전하. 아레인이 돌아왔습니다.”
“들여보내.”
이제 성년이 된 아레인은 한참을 커 버려서 올려다봐야 할 지경이었다. 그의 제복은 점점이 튄 핏빛으로 가득했다.
“공작의 개로 추정됩니다. 증거 불충분으로 즉결처분했습니다.”
뭐, 이런 게 한두 번인가.
“친위대로 돌아갈래?”
“예?”
오늘은 정말 아슬아슬했다. 하마터면 나뿐만 아니라 아레인까지 잃을 뻔했다.
“네가 원하면 친위대로 돌아가도 좋다. 헨리도 널 친위대로 돌려달라고 난리거든.”
“헨리 때문에 가기 싫습니다.”
그렇게 사지에 붙어있고 싶나. 나 같으면 미련 없이 돌아갔을 것이다.
“알아서 해.”
아레인을 손짓으로 돌려보내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의 말에 안도하는 내가 있었다.
* * *
곳곳이 피투성이였다.
“이제 제가 없으셔도 되겠는데요. 저를 뛰어넘으신 것 같습니다.”
아레인은 요즘 저런 말을 하곤 한다. 마치 떠나고 싶은 것처럼. 진절머리나겠지. 나만 해도 그런데 너는 오죽할까. 이 끝나지 않는 도돌이표 같은 것들이. 칼끝으로 흐르는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이제 정말로 사이드 공작을 죽일 때가 된 것 같은데.”
“전하.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테너와 주고받는 말은 변한 것이 없었다.
“암영조는?”
“한 명 외에는 전부 무사합니다.”
내 실력이 늘어날수록 암영조가 살아날 확률도 늘어난다. 최소한으로 피해를 줄이려면 내가 피나는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다.
* * *
아레인이 리노아로 떠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친위대로 돌릴 걸 그랬다. 그가 없는 동안 루이를 굴릴 수밖에 없나. 내게 정을 주던 이가 한 명 빠져나가자 속은 더 말라비틀어져 가고 있었다.
점점 더 감정에 무뎌지는 나날들이었다. 그렇게 몇 년을 무감정한 사람처럼 보냈다. 그 시간을 어떻게 버텼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된 날이었다. 단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계획대로 돌아갔다.
즉위식이 있던 그 날은 주변이 온통 피바다였다. 절반을 베어 버리고 나니 바닥이 찰박이며 흥건할 정도였다. 본디 제일 탐나는 사냥감은 마지막으로 몰아세워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폐하, 천벌이 내릴 겁니다. 즉위식에서 이런 말도 못 할 살육이라니! 신 크리하엘이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천벌은 다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우린 견해가 좀 다른 것 같군.”
반역하기에 참으로 알맞은 간덩이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주변에 튀긴 핏방울들을 덕지덕지 묻히고도 흔들림 하나 없는 모습이. 다른 놈들은 구석에 숨어 벌벌 떨고 있건만.
“폐하, 타깃은 전부 처리했습니다.”
루이를 비롯한 암영조와 친위대 전부가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내 뒤로 도열했다.
“정말 우스운 일이로군. 전부 내 사람으로 채워 넣었거늘. 주인을 문 개는 버려진다는 것도 모르나.”
그가 친위대를 보며 이를 갈았다.
“벌써 황제가 된 듯하군. 사이드 공작. 그대에게 사람을 추천해 준 이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사이드 공작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블레인을 직시했다.
“블레인, 자네 설마…. 나를 배신 한 건가.”
“반역자인 자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블레인이 웅크린 귀족들 사이에 서서 그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공작의 두 눈에서 독기가 흘러나왔다.
“어찌…. 어찌 이런…. 모든 것이 완벽했는데….”
나는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고 살아왔다. 천천히 공작에게 다가갔다. 끝까지 떠는 법이 없었다. 체념한 눈빛도 아니었다. 그는 끝까지 음험한 야욕에 사로잡혀 있었다. 억울한가. 그만 포기해. 칼끝을 가슴에 들이대자 그의 눈이 짙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주 봐줄 만하군.
“네놈이 그렇게 꿈꿔왔던 내가 종이 인형이 되는 첫날인데, 그 뜻에 따라주지 못해 안타까워서 어쩌지.”
공작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었다.
“크…. 크윽…. 쿨럭…. 허억….”
아주 느릿하게, 그 질척하고 더러운 욕망이 가득 찬 눈에 생기가 차츰 빠져나가는 모습을 천천히 감상했다.
허망하군.
생각보다.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피를 너무 많이 먹어 털어지지 않았다. 칼을 버리고 그곳을 벗어났다. 놈들을 죽이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여긴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공허한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 * *
누구지? 테너일 리는 없으니 외부 침입자인가. 옆에 내려둔 칼을 집어 들었다. 즉위 이후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썩 달갑지 않았다. 평온한 휴식이 깨어지는 순간이라 기분이 언짢아졌다. 투알린 드레스를 입고 있는 한 여성이 대형 온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승전 연회에 온 사절단인가 보군. 무시할지 아니면 내쫓을지 고민하는데 그녀의 눈동자가 내 눈에 박혀 들었다. 투명하고 맑은 연청색 눈동자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온실을 탐색하고 있었다. 들었던 칼을 다시 내려두고 그녀를 관찰했다. 온실 창문을 투과한 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스며들어 보석처럼 반짝였다.
꽤 마음에 드는지 온실을 둘러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탐심이 가득했다. 다만 그것은 내가 지금껏 보아왔던 제 잇속만 채우려는 더러운 욕심 덩어리와는 달랐다.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눈동자에서는 생기가 흘러넘쳤다.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느 순간 그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가슴을 간질였다. 그녀가 홀연히 사라지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내가 헛것을 본 것인가.
그녀는 정말 귀여운 여인이었다. 하는 행동들이 어찌나 앙증맞은지 모른다. 내가 괜히 작은 동물로 그녀를 부르는 게 아니었다. 탈출하겠다고 금고 위로 올라간 모습을 본 순간 화가 나는 동시에, 품 안에 얼른 넣고 아무도 모르게 가두고 싶은 욕망이 솟아올랐다. 그녀가 작은 새였다면 새장 안에 넣고, 만질 때 외엔 절대 꺼내 주지 않았을 텐데.
함께 아침 식사를 할 때였다. 후식을 보며 눈을 빛내는 모습을 보자 한 스푼씩 떠먹여 주고 싶었다. 얼굴을 온통 가리고 있어서 실패했지만. 내 곁에만 있으면 원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든 가져다줄 것인데. 그녀는 계속 나가고 싶어 한다. 어떻게 해야 그녀를 잡을 수 있을까. 리오니가 결국 창문을 통해 나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참 이상했다. 절대 내 생각처럼 움직이질 않으니 말이다. 한참을 고민 후에 그녀를 보내 주기로 했다.
하지만 떠나보낸 지 하루 만에 후회했다. 하루 종일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예상한 바였지만, 역시나 잘못된 선택이었다.
테너가 준 그녀의 초상화는 금세 바랠 지경이었다. 특히 내가 계속 쓰다듬던 눈동자 부분이. 그림만 보니 애가 닳을 지경이었다. 그녀를 품에 안았던 감촉이 점차 흐릿해지고 있었다. 맞춘 것처럼 내 품에 쏙들어왔었는데. 가냘파서 힘주어 안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강하게 껴안았다간 그녀가 압사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시 만나면 온종일 껴안고 놔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곳곳에 내 흔적을 남기고 내내 그것만 보고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내가 시도 때도 없이 마법 부서를 방문하자 테너가 아예 일거리를 이쪽으로 옮겨왔다.
"폐하,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실 바에야 공주님을 반려로 바로 맞아들이시면 어떠한지요."
왜 나는 그 생각을 못 했던가. 그녀가 황후가 된다면 하루 종일 곁에 있을 수 있지 않은가.